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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법과 양심: 판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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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8 ㅣ No.1221

[경향 돋보기 - 법에 따른 판결인가, 양심에 따른 판단인가?] 판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박근혜 대통령 취임 두 돌인 2014년 12월 19일, 우리 헌법재판소는 8인의 다수의견과 1인의 소수의견으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서 2심 법원은 내란선동 부분은 유죄, 내란음모 부분은 무죄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대법원의 판단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신속한 이 결정으로 통합진보당 당원 10만여 명과 통합진보당을 투표로 지지했던 시민들은 이제 북한에 동조하는 악의 세력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히고 만 셈이다.

통합진보당의 과오에 대하여 선거라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더라면 훨씬 부작용과 후유증이 덜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에서 법적 판단과 심판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유럽에서 벌어졌던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을 소재로 해서 교회의 태도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유럽에서의 마녀사냥과 마녀재판 이야기

1486년 독일에서 「마녀 잡는 망치」(MalleusMaleficarum ; 영역 제목으로는 ‘The Hammer of Witches’이고, 독역 제목으로는 ‘Hexenhammer’)라는 책이 출간된다. 두 명의 저자 중 한 사람은 쾰른대학교 신학과 학장이자 1481년 라인란트(Rheinland) 지방의 이단심문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던 야코프 슈프렝거(Jakob Sprenger : 1436?-1495년)였고, 다른 사람은 남독일 지역 교황 직속 이단심문관(Inquisitor)이었던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 : 1430?-1505년)였다. 이 둘 모두 도미니코 수도회에 속했다.

이 책은 마법과 마녀에 관하여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이단에 대한 교회의 교리와 결합시킨 후 마녀 식별 및 색출의 기준과 방법, 마녀재판에 관한 절차를 부가하여 더 없이 가혹한 규정집으로 구체화했는데, 이후 대규모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을 낳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저자들의 환상과 광기가 독단적인 신학적 믿음과 결합된 이 책은 1520년까지 무려 13판을 찍었고 1574년에서 1669년 사이 다시 16판을 찍어낼 정도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마녀 잡는 망치」가 당대의 비슷한 저술들과 비교해서 독보적인 권위와 명성을 누리게 된 까닭을 세 개만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자로서, 그리고 이단심문관으로서 저자들이 가졌던 명성 때문이었다. 둘째, 재판관들이 마녀를 심문하고 판단하고 양형을 내리는 방법을 손쉽게 익힐 수 있도록 세세하게 제시된 마녀 심문과 재판의 기법 때문이었다. 셋째, 마녀사냥에 대한 반대론을 침묵시키려고, 저자들이 인노첸시오 8세 교황으로부터 얻어내고 자신들의 책 앞에 당당하게 실었던 교황 교서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더없이 깊은 우려로 바라건대, 1484. 12. 5.) 때문이었다.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의 출발점이 되는 성경의 근거는 “너희는 주술쟁이 여자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탈출 22,17 : 영역은 “Thou shalt not suffer awitch to live.”)는 문장이다. 그 이전까지는 이단의 한 유형으로만 취급되어 처벌되었던 마녀(witch ; Hexen)는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마귀의 추종자이기 때문에 사악한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이단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마녀는 사악한 마귀추종자로 분류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대역죄인이자 범죄집단으로 공인되었고, 철저히 색출되고 박멸되어야 할 존재라는 대의명분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강경한 마녀 박멸론자들이 대거 참석한 바젤 공의회(1431-1437년)에서 정립된 마녀의 상, 곧 하느님에 대적하려는 마귀의 부하라는 상은 그 이후에 이루어진 마녀재판에서 수용되고 유럽 전역으로 널리 전파된다. 바젤 공의회 이후 마녀에 관한 저술들이 대거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이 공의회에 참석했던 인물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유럽 각 지역에서 마녀 색출과 박멸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 대표적 문헌이 「마녀 잡는 망치」이며, 대표적 인물이 그 저자들 중 하나인 이단심문관 크라머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로써 마녀사냥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의 교서였다.

이후 300년에 걸쳐 신학자와 법학자들에게 마귀와의 전쟁을 촉구하고 마귀의 졸개들로부터 하느님의 왕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했던 이 교서는, 마녀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단심문관들이 그 어떠한 장애도 없이 마음껏 마녀사냥을 할 수 있는 법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크라머의 간청에 의해 내려진 이 교서에서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은, 자신이 임명한 이단심문관 크라머와 슈프렝거의 마법사와 마녀에 대한 박멸 전쟁이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또한, 그렇게 된 것은 독일의 사제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마녀집단이 얼마나 대규모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을 위협하는 마귀의 졸개인 마녀의 행위가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이 마녀 색출과 박멸 작업을 지원해야 함을 선포하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분노가 떨어질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2년 후 1486년 저 악명 높은 「마녀 잡는 망치」가 출간되었고, 마녀사냥 광풍의 서곡이 울려퍼지게 된다.

그 이후 유럽 전 지역에서 최소한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무고하게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으로 체포되어 무지막지한 고문을 받고는, 마녀라고 자백하고 타인을 마녀로 지목한 후 화형에 처해졌다. 지역 공동체의 아웃사이더가 마녀라는 풍문, 자신의 가축이나 가족이 병들었거나 죽은 것이 그 이웃의 사악한 마법 때문이라는 밀고, 그에 따른 체포, 잔혹한 고문, 자백, 공개 화형 등으로 이어지는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상호 불신과 증오를 키웠다.

생각을 달리하거나 태도가 유별나면 마녀로 지목되었으며, 사제나 지역의 유지까지도 마녀 혐의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마녀들이 조직을 구성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붕괴시키고 마귀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는 대규모 조직 사건으로까지 발전하여, 오로지 고문에 의한 자백들에 기초해서 마녀 조직들이 조작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처벌되기도 하였다. 가히 광풍이라 할 만하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마녀사냥 광풍’이 발생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14세기의 흑사병 이후 유럽 사람들은 각종 전염병을 겪으면서, 기상 이변이 계속되고 농작물 생산이 악화되자, 생존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세속적 · 종교적 권력자들은 가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과 반란에, 프로테스탄트의 발흥에 효과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또한 막 생기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세속적 · 종교적 권력자들은 여전히 불안한 권력을 보호하고 유지하고자, 대중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해야 했다. 마녀 박멸에 열심이었던 신학자들과 법학자들은 마녀론을 통해 자신들의 신념을 실현하고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였고, 이른바 ‘도덕적 다수’는 꼴 보기 싫은 소수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세속적 · 종교적 권력자들은 대중을 자기 입맛에 맞게 통제할 수 있었다.

대중의 공포와 세속적 종교적 지배층의 권력욕에 편승하여 ‘마녀 사냥꾼’을 자처하며 마녀 광풍을 불러일으키려는 인물과 추종자들도 나타난다. 이들은 마녀사냥을 통해 자신들의 광기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세속적 이득도 챙겼으며, 권력자들은 이들을 이용하여 대중을 통제하려 하였다. 생존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공포, 권력을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지배층의 필요, 그 사이에 편승한 광기에 사로잡힌 선동꾼들의 출세욕 등이 어우러지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마녀라는 존재가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재앙은 이제 마귀의 지휘를 받은 마녀의 탓으로 돌려졌다.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을 담당한 심문관과 재판관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수호한다는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신중함, 절제, 공평무사함, 심문받고 재판받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라는 덕목이었다.

마녀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마녀의 위험을 과장한다거나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이 가혹하다거나 불충분한 법적인 증거에 기초해 판결을 내린다는 등의 비판을 하는 사람도 마귀 추종자로 몰아 마녀 혐의를 덧씌워 처벌하였으니, 당대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증거채택의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독선과 잔혹함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였던 그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이었고,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로마 2,1-3)라는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유럽에서 벌어졌던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을 재판의 형식을 빌린 살인이라는 의미에서 사법살인(司法殺人)으로 부르고 있는데,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의 태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유럽 전역, 영국, 스코틀랜드, 식민지 시절의 미국 등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국가이건 프로테스탄트 국가이건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의 광풍이 수그러들기 시작한 것은, 대중의 공포가 가라앉은 것에도, 권력층의 통치방식이 변화한 것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소수의 용기 있는 지식인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특히 두 사람의 책이 교회와 이단재판소의 입장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녀사냥 광풍이 기승을 부리던 1631년 독일의 린텔른(Rinteln) 지방에서 익명으로 Cautio Criminalis(‘신중한 형법 사용’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라는 책이 ‘마녀재판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되었다. 16세기말 17세기 초 출간된 대부분의 문헌은 세속 권력자들에게 마녀를 색출하고 심판하고 화형에 처하라고 촉구하며, 이단심문관과 재판관에게 마녀를 식별하는 방법과 마녀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마녀란 존재는 마녀재판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마녀재판을 엄밀하게 감독하고, 고문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나아가서는 마녀재판 자체를 종식시킬 것을 조목조목 주장한다.

저자는 40세의 예수회 사제이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프리드리히 슈페에(Friedrich Spee, 1591-1635년) 교수로 밝혀졌다. 극성을 부리던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의 폐해를 목도한 슈페에는 엄격한 증거에 입각하여 마녀재판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책은 판을 거듭하면서 출간되었고,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을 종식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슈페에의 책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또 한 사람은 교회법 학자로서 스페인에서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법률가 알론소 데 살라자르 프리아스(Alonso de Salazar Frias, 1564-1636년)이다.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마녀재판에 관여했던 살라자르는 1612년, 마녀재판에 핵심증거로 활용되는 자백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고 신빙성이 없는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밝히는 보고서를 교회에 제출하였다.

법률가로서의 직업적 양심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 이후로 스페인에서는 마녀재판이 엄격한 증거채택 절차에 입각하여 진행되었기에 마녀 혐의자가 고문을 당하거나 처벌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마녀들의 집회나 축제라는 것은 없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붕괴시킬 내란음모를 꾸미고 감행하는 단체인 마녀조직이란 것도 없다는 견해가 교회 신학자들과 법학자들 사이에서 확립되는 데에는 살라자르의 보고서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을 넘어서 로마 교황청 이단재판소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그의 견해는 마녀재판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 견해를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공동선의 실현과 정치권력

교회는 과거의 많은 과오를 반성하면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 일치, 자유, 평등에 기반을 둔  사회교리를 확립하고 발전시켜 왔다. 국가는 “공정한 법,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과 올바른 이성의 요구에 부응하는 법을 실행하여야 하며”, 이에 어긋나는 법과 권위의 행사는 “더 이상 법이 아니며 하나의 폭력행위에 불과하다.”(「간추린 사회교리」, 398항)는 진리, 그리고 국가권력은 “언제나 도덕질서의 한계 안에서 정당하게 제정되었거나 제정될 법질서에 따라, 공동선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할 때에 국민들은 양심에 따라 복종할 의무를 지닌다.”(「간추린 사회교리」, 394항)는 진리에 서서, 2015년에는 우리 국가도 공동선과 민주주의 가치를 지향하고 구현하는 쪽으로 운영되고, 국가권력의 행사도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나 그 후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가, 1484년 12월 5일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의 교서 선포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대규모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의 전철로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김도균 대건 안드레아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킬(Kiel)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김도균 대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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