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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성독(Lectio) - 식별을 위한 매일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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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8 ㅣ No.413

성독(Lectio) - 식별을 위한 매일의 양식1)


아우구스타 라아브(Angusta Raabe) 수녀는 American Benedictine Review 1972년 겨울호에 실린 “베네딕도 규칙에 나타난 영의 식별”에 관한 글에서 영의 식별이 규칙 전체에 배어 있는 영성임을 지적했다. 아우구스타 수녀는 식별이란 하느님 계시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믿음과 은총의 도움으로 내면의 충동과 동기를 식별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응답할 수 있다. 하느님을 만나는 인격을 지니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경험을 계속 성찰하면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된다. 달리 말해서, 진득히, 주의 깊게 귀 기울인다면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외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규칙 머리말 14-15). “이것이 네가 가야할 길”(이사 30,21)이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분부를 예언자와 더불어 듣게 된다.

아우구스타 수녀의 글에서는 이어 “왕국으로 가는 지름길을 착실히 걸어가는 것은 마음의 순결이나 목표를 향한 일편단심과 마찬가지로 식별의 은유”라고 지적한다(『그리스도교 영성사 제 1권』 400쪽).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영성』에서 루이 부이에(Louis Bouyer)는 이것을 반향하면서, 베네딕도 규칙에서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식별이란 “모든 존재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상호관계의 기초인 투명하고 이해성 있는 애덕을 낳는 끊임없는 배려”(p.518)라고 말한다. 부이에는 기도란 분명 이 모두의 얼이며, 성독(lectio)과 시편과 개인 신심으로 풍요로워진다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식별이란 단순히 중용이나 현명함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식별의 한 부분이다. 식별이란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면서”(규칙서 머리말 49)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에서 거룩하신 분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옛 수도승들은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는 수도승을 하느님께 이르는 확고한 단계로 인도하는 것을 식별이라고 성 안토니오와 모든 이들이 주장해왔다. 식별이 모든 덕의 수호자요 단속자일 뿐 아니라 어머니이기 때문이다(가시아노 2,4).


1. 오늘의 식별

우리의 옛 수도승들은 식별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모른다. 오늘날은 어떤가? 어쩌면 식별이 우리에게 전보다는 덜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수도생활의 미래에 대한 니그렌(Nygren)과 우케리티스(Ukeritis) 연구가 다시 생각난다. 1993년 비치 그로브(Beech Grove)에서 열린 우리 모임에서 미리암 우케리티스 수녀는 젊은 수도승들이 교회에서 해야 할 자신들의 역할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지적했다. 교회의 삶과 거룩함에 속해 있는 우리 수도승들이 교회를 위한 지혜로운 여인들이 되려 한다면, 하느님에 대한 감각, 하느님 체험을 얼마나 닦고 길러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는 개개인의 가치 있는 사목적 기여가 식별과 순종에 얼마나 맞는가? 이것을 어떻게 식별하고 있는가?

오늘날 미국 가톨릭교회의 위기는 미국 이민기 동안에 가톨릭교회를 지탱한 상징과 관습을 상실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다. 강한 상징 체제를 유지해온 수도 공동체들이 그렇지 못한 공동체들보다 좀 더 잘 하고 있다고들 한다. 베네딕도가 예상한 바와 같이 수도승 생활은 거룩해진 시간, 거룩해진 장소, 거룩해진 사람들에 대한 깊은 감각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잃어버렸는가? 그것을 다시 찾아 얻고 있는가? 어떻게 식별하는가?

죠앤 치티스터(Joan Chittister) 수녀는 오늘의 수도생활에 도전하고 휘저어 놓는 몇 가지 반성을 제시했다. 지난 1994년 2월 18일자 “내셔날 가톨릭 리포터”(National Catholic Reporter)에 실은 치티스터 수녀의 기사가 생각날 것이다. 이 기사에서 그녀는 우리가 적어도 우리 시대의 주요 관심사들 중의 하나에 깊이 빠져 있는지, 아니면 은퇴를 삶의 방식으로 삼아왔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과 연결하여 베아티스 브루토(Beatice Bruteau)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불에 닿은 적이 없다면 어떻게 불에 덴 고통을 당할 수 있겠는가?” 치티스터 수녀는 더 나아가 오늘 우리의 수도승 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영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들이 되도록 촉구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공동체로서 무엇을 대표하며 누가 그것을 아는가? 정말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치티스터 수녀는 우리가 하는 바를 함으로써 어떻게 우리가 수도회가 하고 있는 바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를 각자에게 묻고 싶어 한다. 치티스터 수녀는 우리의 시대가 해결의 시간이 아니라면 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 신앙으로 가득찬 질문의 시대를 살아 갈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 글을 맺는다.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그의 저서 『복된 단순성』(Blessed Simplicity)에서 식별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서술했다. 확실히 우리 주위의 체제들은 모두 깨어지고 있다. 사실 그 체제라는 것이 깨어지고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수도승생활은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파니카에 따르면 이 중심은 이제 더 이상 역사나 세상과 무관한 추상적이고 비시간적인 하느님일 수가 없다. 이것은 확실히 편애가 심하신,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리고 야곱(과 라켈)의 하느님이 아니다(p.107-8).

그보다 더 앞에서 파니카는 오늘의 수도승은 존재와 행위의 일치를 강조한다고 역설하면서, 존재와 소유 사이의 식별을 강조한다(p.46-7). 존재를 몹시 짓누르는 것은 소유다. 우리 수도승의 사명은 존재를 가볍게 띄워, 존재가 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를 소유로부터 구해내야한다. 존재는 소유와 동일하지 않다. 액세서리나 장식물 따위가 우리 존재의 부분일 수 없고 다만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관상의 행위를 못하게 방해하고 헝클어뜨릴 뿐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로 이 문제를 토론했는가?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많이 식별을 계속해야 하는가!

마침내 식별을 위한 매일의 자양분인 성독에 관해 성찰하기 위하여 경험적인 매개변수들을 설정해 놓았으니, 지난 1995년 1월호 Worship 48-9쪽을 인용하면서 오늘에 필요한 식별에 대한 이제까지의 숙고를 마치고자 한다. 저자 마이클 워른(Michael Warren)은 왜 성인(成人)이 된 가톨릭 신자들이 그토록 자주 종교적으로 똑똑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가를 묻는다. 그는 지방교회의 회중들이 말하고 듣는 세세한 조건들을 주시하고 훌륭한 이론이 실제로 실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말하는 바는, 우리 수도승 공동체에서 또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식별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회학 이론들을 인용하면서 워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상품 중의 하나는 사람들의 관심이다. 그 상품을 도매로 많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미국에서 넬슨(Neilsen) 평점 1점은 미국 텔레비전을 가진 9천만 세대의 1%를 말한다. 황금 시간대의 시청률 1%는 해마다 3천만 달러 이상의 소득 총액이 첨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맹목적으로 상품을 사도록 조작하는 현대 텔레비전 기술에 대하여 남녀노소 중 아무도 어떤 경험이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상품 중에는 인간에게 거의 소용이 안 되는 것도 많다.”

또 다른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 문화의 창조와는 거리가 먼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사진이 산업화한 오락의 광범위한 보급을 촉진해왔다. 그리하여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의 잠재력이 제한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되어야 한다고 워른은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영성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 공동체들이 쉽지는 않지만, 더 깊은 인간화를 향한 이들 영성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운동이 내세우는 이념의 소비자가 되고 대중 속에 함몰되기를 허용할 때 그들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식별해왔고, 식별하고 있는가? 우리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수도승 생활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이러한 대중 이념에 맞서는 문화 관리자로서 봉사하려 하는가? 그리고 성독에 대해서는 어떤가? 성독은 우리가 성찰하고 있는 식별을 얼마나 키워 주는가? 성독은 초기 수도승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성독의 뿌리

성독(lectio divina)은 유대 회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랍비들과 그 제자들이 했던 성서 묵상에 그 뿌리를 둔다. 정신과 마음에 거룩한 말씀을 박아 넣으려고 그들은 벌이 꿀을 빨아 먹을 때처럼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우리가 라틴어로 “lectio divina”로 알고 있는 희랍어 어휘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학자 오리게네스였던 것 같다. 그가 “lectio를 모든 수행과 모든 영성 이해, 모든 관상의 꼭 필요한 기초”로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마 유대인 스승에게서 그 방법을 배운 것 같다(Garcia Colombas in “Reading God: Lectio Divina”, BMH Publication). 이 점에 그는 초기 모든 교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성 치프리아누스는 “기도와 독서에 근면하여라. 기도에서 네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면,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네게 말씀하신다”고 썼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너의 기도는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네가 읽을 때 하느님께서 네게 말씀하시고, 기도할 때 네가 하느님께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수도승 교부들은 이를 반향해 준다. 빠코미오는 “수도원에는 글을 줄 모르거나, 성서의 어떤 것, 적어도 신약성서와 시편들을 암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빠코미오 규칙, 계명집 140)라고 명했다.

에바그리오는 “독서, 재지킴, 기도 - 이것들은 방황하는 마음에 정주를 부여해 준다”(Praktikos, 15)고 썼다. 까시아노는 “계속적인 명상이 너의 마음을 채우고 그 모습대로 너를 빚어낼 때까지 부지런히, 끊임없이 거룩한 독서에 몰두하여라”(14,10)고 말한다.

『스승의 규칙서』의 저자는 겨울철에 “제1시기도”부터 “제3시기도”까지의 시간에 “형제들은 서로 읽어주고 들을 것이며, 글과 시편을 모르는 이들을 순번에 따라 가르쳐줄 것이다. 이 세 시간 동안의 정신적인 일이 모두 끝나면, 서판과 책들을 두고 “제3시기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라고 규정해 놓았다(『스승의 규칙 50,10-17).

이보다 더 오래된 규칙서들, 예컨대 『사부들의 제3규칙』 같은 데에서는 수도승들이 “아침기도” 후부터 제2시까지 독서하도록 규정했다. 『동방 규칙서』에는 형제들이 제3시까지 독서할 수 있는 특전을 누린다고 서술되어 있다.

우리 시대의 수도승 학자 암브로시오 와튼(Ambrose Wathen)은 렉시오를 고찰하면서 “렉시오는 읽는(legendi) 행위를 표현하는 명사형이다. ‘읽다’(lego, legere) 동사는 기본적으로 수집하고 한데 모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읽다’(legere)는 어떤 면에서 정돈하는 과정이다.” 와튼은 이어 이동사에는 포괄적인 세 가지 개념이 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첫째, ‘모으다’를 뜻하고, 둘째, 더 깊이 함축성 있는 풍부한 의미에서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여럿 중에서 ‘골라내는 것’을 뜻하며, 셋째, 눈으로 모아들임, 특히 기록된 본문을 눈으로 빨리 훑어보면서 거기 있는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나 본문 자체나 본문 독서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베네딕도에게는 ‘legere’와 ‘lectio’가 파생된 의미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다(Monastic Lectio, in Monastic Studies, Number 12, 1976, p. 209). “본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와 사끄라 빠지나(sacra pagina)는 같은 뜻의 표현이다”(Jean Le-cler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Mentor Omega, 1962, p.77). 즉 때로는 본문 자체를 의미하고, 때로는 읽는 행위를 뜻한다.

성 베네딕도와 초기 수도승 저술가들에게 성독의 본문은 성서였다. 베네딕도 규칙 마지막 장인 제73장 3절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권위로 (씌어진) 신구약성서의 어느 면(面)이나 어느 말씀이 인간 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이 아니겠는가?” 베네딕도는 또한 바른 길로 나아가라고 소리치는 거룩한 가톨릭 교부들의 책을 읽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니까 우리 수도승 선조들에게는, ‘lectio divina’가 성서들 즉 성서의 본문 자체를 읽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아마도 하루의 4분의 1, 게다가 하루의 가장 좋은 시간을 이 거룩한 독서에 바쳤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말씀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하느님께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다(A. de Vogue, Reading St. Benedict, p.236).

이 독서는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 되새김(meditatio)으로 연장되었다. 렉시오 시간에 익힌 본문들을 작업 시간 동안 거듭 반복하고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드 보궤(De Vogue) 신부는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들의 모토가 “기도하고 일하라”라기보다는 “기도하고 일하고 읽으라”여야 한다고 주장한다(The Rule of St. Benedict, Cistercian Publication, 1983, p.241).


3. 명상하는 독서

렉시오의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초기 수도승들이 ‘메디타시오’(meditatio)란 말로 무엇을 뜻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약 34년 전에 출판되어 지금은 고전이 된 장르끌레르(Jean Le-clercq)의 『공부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라는 책에로 다시 돌아가 본다. 르끌레르는 성 베네딕도 시대와 그 후 중세까지 독서는 오늘날 주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입으로 소리를 내어 발음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책의 목소리를” 들었다. 참으로 청각적인 독서이다! 들은 것만 이해한 것이다(p.24).

베네딕도가 규칙서 제 48장 5절에서 “만일 누가 혼자 독서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침묵 독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 흔히 ‘렉시오’라는 말이 설명 없이 사용될 때, 그것은 노래 부르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을 모두 요구하는 활동을 뜻한다.

르끌레르에 따르면, “고대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걷기, 달리기, 공놀이와 같은 수준의 신체적 운동으로서 독서를 권고하곤 했다” (p.24). 가경자 베드로는 아주 심한 감기에 걸려서 더는 사람들 앞에서 말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렉시오조차 할 수 없었다. 끌레르보(Clairvaux)의 니콜라스는 무슨 병으로 출혈한 후 힘이 없어서 독서를 할 수 없었다.

그처럼 성독은 능동적인 독서였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시대에 되새긴다(meditatio) 함은 세속에서는 무엇을 하려는 지향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반성하는 것을 뜻했다. 묵상이란 외우고 익히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의미는 이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본문, 특히 성서와 성서 해설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으로 익히기’라고 부름직하다. 우리의 수도승 선조들은 입이 지혜를 중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입으로 익히기’라고 불렀다(p.25). 라틴어 노래를 기억할 만큼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교회학자 축일에 자주 사용되던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는 도다”(Os justi meditabitur sapientiam)라는 구절을 상기하리라.

성 베네딕도 시대의 수도승들과 중세기의 수도승들은 본문을 눈으로 보고, 입술에 올려서 듣고, 하루 종일 되새겼다. 맛이 다 우러나오도록 꼭꼭 씹듯이 읽었다(p.78). 이 되새김에서 그들은, 일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20세기 사람들과는 같지 않다고 드 보궤는 생각한다. 기도로 응답하면서 하는 하느님 말씀의 이러한 독서에는 옛 수도승의 기도 방법 전부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 경륜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이 먼저 시작하시기 때문에 이 순서는 거꾸로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느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앙드레 루프(Andre Louf)는 이에 동조하여, “선조들이 ‘meditatio’는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 마음 사이의 연결, 즉 같은 말씀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계속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라고 한다. 그는 이어서 “내가 독서하는 중에 무슨 말에 충격을 받는다면 내 마음이 상처를 입게 된다. 나는 그 말씀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말씀을 지켜보며 침묵 속에 마음으로 그것을 천천히 되풀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말씀을 내 내면에 있는 영에게 양보한다. 그러면 내 마음이 기도를 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중세 시토회 수도승 보헤리스(Boheriss)의 아르눌(Arnoul)은 이렇게 충고한다. “읽을 때, 학문이 아니라 구세주를 찾도록 하라. 성서는 야곱의 우물이다. 이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후에 기도에 붓게 될 것이다. 이처럼 기도를 시작하러 기도실에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서 그 자체의 의미는 기도와 관상에서 찾게 될 것이다.” 보헤리스의 아르눌보다 훨씬 전에 가시아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런 일들이 주의 깊게 이루어져서 영혼의 깊숙한 곳에 저장되어 나중에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고아한 사상과 오래 견뎌온 인내로 무르익어 굉장한 향기를 풍기게 되고, 네 마음의 항아리에서 퍼내게 될 것이다. 또 영원한 샘처럼 너의 혈관에서 콸콸 흘러나올 것이며… 마치 네 가슴에 깊은 샘이 있듯이 흥건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담화집 XIV, 13).

그러니까 초기 수도승들은 수도원에 입회할 때 문맹인이었다 하더라도 읽기를 배웠고, 여름 추수기를 제외하고는 족히 세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놀랄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일에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라! 『스승의 규칙』에서는 주일에 독서하는 것이 수도승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다. 성 베네딕도에게는 ‘주님의 날에는 주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아달베르 드 보궤의 『성 베네딕도를 읽기』 : 규칙에 관한 고찰, Cistercian Publications, 151).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주일에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독서에 전념할 것이다”(규칙 48, 22)라고 말한다.


4. 말씀에 잠김

그토록 감미롭게 규정된 이 독서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현대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성경말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찾고, 이 말씀에 잠기는 목표와 의도가 무엇인가? 성 베네딕도는 규칙 제73장에서 말씀은 우리가 “하늘의 고향을 향해 달려가도록”(73,8) 돕는 데 그 지향을 둔다고 밝힌다. 큰 규칙은 성서이므로 그의 규칙은 초보자를 위한 작은 규칙이라고 한다. 우리는 기도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하여 읽는다. 발전된 독서인 수도승적 성독은, 수도승 신학에 의하면, “신앙의 행위이며 인식의 행위이다”(르끌레르).

스콜라 신학이 진입로라면 수도승 신학은 거기에 들어감이다(ibi accessus, hic ingressus.). 반 젤러(Van Zeller)가 몇 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노래가 음악에서 나오듯이 기도는 독서에서 나온다. 독서는 기도에 가장 가까운 서곡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듯이 기도는 읽음에서 온다. 들음이 믿음의 일을 완성하지 않듯이 읽음도 기도의 일을 완성하지 않는다”(The Holy Rule: Notes on St. Benedict’s Legislation for Monks, New York, 1958, p.75).

앙드레 루프는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점을 이야기한다. 수도승에게는 성서를 읽는 영적 독서가 학문적 공부가 아니라, 거의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학문적 연구는 현재의 출발점에서 과거를 재건설한다. 그러나 수도승 독서자는, 이것이 과거에서 온 본문을 통해서 되지만, 영원한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알려 주시려는 바에 나날이 귀 기울여 듣는다. 확실히 수도승 독서자는 성서학이 본문을 해설하고 밝혀 준 모든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수도승에게 읽기와 기도는 하나의 연속체이다. 성독은 개념적 수준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만남을 지향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글에서, 암브로시오 와튼은 성독과 연결해서 베네딕도가 사용한 단어들을 매우 적절하게 관찰한다. 베네딕도는 착한 일의 도구들에 관한 장에서 처음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4, 55). 이와 같은 의향을 가지고 식사할 때, 끝기도를 바칠 때, 시간 전례 동안에도 독서를 하도록 요청한다. “수도승은 읽어 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며, 이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유래하게 해야 한다”(p.210).

외우는데 관한 용어도 많다고 와튼은 말한다. 그 대부분은 ‘하느님의 일’(opus Dei)에 관한 장들에 나오는데, 렉시오는 암송하거나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고 자주 반복한다. 규칙에서 ‘외우다’(memorare)는 언제나 성서와 연관해서 사용한다. 이처럼 읽기와 기억이 함께 가는 것 같다. “읽어서 하느님의 말씀은 기억에 깊이 박히게 되고 그래서 언제든지 마음에서 흘러나올 수 있게 된다”(p.211).

동사 ‘바카레’(vacare) 동사가 규칙서 제48장에 6번 나온다. 이 단어는 ‘비우다’를 뜻한다. 보통으로 ‘자유롭다’를 뜻하기도 하고 특히 ‘즐기다’를 뜻할 수도 있다. 근본 의미에는 공간, 자유, 압박 없음 등의 관념이 들어있다. 이것이 바로 베네딕도가 성독에서 바라는 바이다. 독서는 수도승이 원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p.214). RB 48,5에서 성 베네딕도는 “침대에서 … 쉴 것이지만, 만일 누가 혼자 독서하고자 한다면 … 하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낮잠처럼 독서도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

끝으로 사순절을 지킴에 관한 제49장에, 이 시기에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씻어”내야 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성 베네딕도는 우리가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RB 49,4)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베네딕도가 언제나 독서와 기도를 연결시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서는 전폭적인 투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성서 말씀을 실천하고 자신의 체험을 언어로 표현할 때에만 비로소 성서를 알 수 있다.


5. 수도승의 사다리

성독은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옛 전통에 우리를 인도한다. 수도승의 사다리는 마음이 감동되고 불꽃으로 튀어 오를 때까지 하느님의 눈 아래서 하는 독서라고 언젠가 마르미옹(Marmion) 아빠스가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12세기 카르투시오회 수도자 귀고(Guigo) 2세의 덕분으로 이 사다리의 가로장들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날 손으로 바삐 일하고 있을 때 우리의 영적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읽기, 되새김, 기도, 관상이라는 영성 수련의 네 단계가 떠올랐다. 이들은 수도승들이 땅에서 하늘까지 올라가게 되는 사다리가 된다”(“수도승의 사다리와 12명상”, Cistercian Studies 48, 67-68).

귀고는 설명을 계속한다. 읽기(lectio)란 성서를 주의 깊게 찬찬히 공부하는 것이고, 되새김(meditatio)은 우리 정신을 이 읽은 것에 쏟아서 그 진리를 찾는 것이다. 기도(oratio)는 하나의 결과로서 뜨거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며, 관상(contemplatio)은 마음이 드높여져서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좀더 요약하면, “읽기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고, 되새김은 그것을 지각하고, 기도는 그것을 바라고, 관상은 그것을 맛본다”(p.68-69).

귀고는 몇 쪽 뒤에 이 단계들이 서로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것과 동떨어져서 따로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주의 깊게 설명한다. “읽은 것을 씹고 소화시켜서 자양분을 뽑아내고 그 진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거룩한 사람들의 전기나 이야기들을 아무리 많이 읽고 뒤적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p.80).

이 “증언들의 구름”을 경청하고 나니 베네딕도가 영성 기술의 주요 도구들 중의 하나라 부른 것이 성독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성독에 충실하면 수도승의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만이 줄 수 있는 변화시키는 힘을 받게 된다. 제롬 아빠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Benedictines, vol 30:2, 1975, p.78), 이 말씀은 우선 씌어진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루가 복음의 유아기 설화에서 목동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 보세”(루가 2, 15)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서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지극하신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들과 만나시며, 그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고, 또한 이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에는 지주와 활력이 된다”(21항). 시간 전례와 성독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일련의 성사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수도승 생활이 점점 통일되고 단순해진다.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성독이 수도승다움(conversatio)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예에서 하느님께 자유롭고 인격적인 응답을 보게 된다. 또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시며 새로운 방법으로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성독을 통하여, 우리는 한동안 은총의 매개체가 되어왔던 방법이나 표징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고 과거가 미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데이빗 스탠리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성독은 추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복음서들의 특징들 중의 하나는 그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 복음서 저자들의 가장 주요한 목적이며 관심은 신앙의 삶을 구축하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맺는 내밀한 인격적 관계를 기르고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 성 베네딕도는 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니,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p.453, 455).


6. 공동 측면

우리의 성독에 대한 체험에 관해서 제공하고 싶은 결정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교회의 생명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사로운 활동”이란 결코 없다는 것이다(Consider Your Call, SPCK, 1978, p.265) 나는 언제나 계시헌장의 다음 말씀을 사랑해왔다: “전해진 사실이나 말에 관해서는 그것을 자기 마음에 간직한 믿는 이들의 관상과 연구에 의해서, 혹은 그들이 체험하는 영적 사실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의해서 그 이해가 깊어진다 … 교부들의 말씀은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실생활 가운데 풍부히 흐르고 있는 이 성전(聖傳)의 생생한 현존을 입증한다”(제8항).

수도승은 언제나 성독으로 공동체를 돕는다. 초기 아빠스들이 자기네 수도승들이 시편과 복음을 읽고 되새기는 것을 익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앞에서 말했다. 성 베네딕도는 “끝기도” 전에 다같이 교부들의 담화집을 읽도록 규정한다(규칙 42, 3). 독서는 수도승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와 공동체도 포함하는 하나의 사회적 경험이다. 수도승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대화를 파악하는 것은”(Consider your Call, p.267) 성서를 되새김하며 읽는 성독을 통해서였다. 규칙서 머리말에서 베네딕도가 성서를 얼마나 의인화하는지를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 외치시며 … 주께서 당신의 일꾼을 찾으시며 …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거든 … 주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를 기다리신다.” 이처럼 읽기는 대화가 되고, 계속 이어지는 담화가 된다. 루이 부이예는 그의 저서 『수도승 생활의 의미』에서 영성수련이 예수회원을 위한 것이듯이 성독은 수도승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p.168).

이와 관련해서 제롬 코델 아빠스는 성서 읽기에 대하여 좋은 충고를 해주었다. 성서에 제멋대로 접근하는 방식에 반발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중의 많은 이는 나름대로 해로운 잘못에 즉 안전하나 생명이 없는, 메마르고 과학적인 성서 접근 방법에 떨어져 있다. 성서 본문을 친구나 가족처럼 자유롭고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 성서를 ‘차가운 해부용 시체’ 같은 방식으로 해설하는 것에 대해 오늘날 반발이 있다. … 성서 본문은 의미의 창고 같은 것이 아니라 의미의 매개체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 본문을 통하여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전에 말씀하신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전에 사람들이 깨달았던 것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표준이 되는 가능성이다. 악보로부터 여러 가지 재능에 따라 음악이 연주될 수 있다. 거룩한 말씀인 성서본문은 남용되거나 왜곡되지만 않는다면, 사람에 따라 제나름의 중대성을 지니고 영향력을 지니는 힘과 의미를 풀어낼 수 있다”(Lectio Divina and the Prayer Journal, Review for Religious, vol. 39 : 4, 1980, p.590).

24년 전에 윌리엄 존스톤(William Jonston)이 쓴 글(“The Mystical Reading of Scripture : Some Suggestions from Buddhism”, CistercianStudies vol 6:1, 1971)은 나에게 흥미로운 가능성을 시사해왔다. 존스톤은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비추임을 받을 것이라고 언젠가 불교의 어느 승려가 말했다고 썼다(p.57). 성서가 전하려는 체험을 함께 하려면 주석을 훨씬 넘어서야 한다.

이것은 제롬 아빠스도 믿는 바이다. 불자(佛者)들에게는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역설적인 문제” 와 같은 화두수행이 있다. 그것은 마침내 논리를 넘어 사는 데로 건너가는 해탈이 올 때까지 그 문제를 깊히 숙고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이라면 추리를 넘어 지혜를 얻을 때까지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존스톤은 화두수행이 신비로운 능력을 여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을 잇는다.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은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과 일치하여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다”(p.61). 초기 수도승들이 한 ‘메디타시오’(meditatio)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의‘만트라’(mantra), ‘화두’(koan)가 될 때까지 하루 종일 어떤 성서 구절을 계속 되뇌이곤 했다. 이런 수행은 그들을 성서의 바로 핵심으로, 그 체험으로, 비추임으로 인도했다. 또는 까시아노가 쓴 바와 같이 “수도승은 시편의 모든 사상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것을 노래로 부르기 시작할 것이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가장 깊은 마음의 감정으로 그것을 표현할 것이다. 마치 그것이 시편 작가의 것인 듯이 아니라, 마치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경우에 실현되고 실천되는 자신의 표현이며 기도이듯이 할 것이다”(10:11, p.408).


7. 성독을 위한 시간

끝으로, 결론을 맺으면서, 이 글은 하나의 이상적인 성독을 제시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성서 독서에 집중해 왔다. 나는 성독을 위해 성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 그리고 아니다! 성서는 언제나 성독의 첫째가는 원천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책이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천천히 되새김하면서 읽을거리라면 배제할 필요가 없다. 성 베네딕도는 승인된 독서 목록에 “거룩한 가톨릭 교부들”의 책들을 첨가했다. 우리는 그 후대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저술가들의 책들을 덧붙일 수 있다. 그런 책들은 사람 따라 서로 다르겠지만 그 나름대로 우리를 기도로 인도한다.

성독을 위한 시간은 많은 이에게 주요한 문제가 된다. 아마도 우리는 죠앤 치티스터(Joan Chittister) 수녀가 『일상에서 걸러내는 지혜』(Wisdom Distilled from the Daily, Harper and Row, 1990, p.31)라는 책에서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지 말고, 시간을 내라”고 한 바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독은 시간 배당에서 콩쥐처럼 무시당해 왔다. 우리는 일을 한다. 우리는 시간 전례에 으뜸가는 시간을 할당한다. 이제 우리는 성독에 필요한 시간을 배당하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공동체의 지도자는 이 점에 특별한 책임이 있다. 성독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동기 같은 것을 마련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수도자들의 성독을 확인하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가 성독에 열중한다고 보는가? 우리 수련자와 유기 서원자들에게 성독을 위해 가르쳤는가?

우리 수도원에서는 성독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있다. 확실히 모든 수녀가 그 시간에 독서를 할 수는 없지만, 이 시간이 특별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 시간에는 불필요한 소리를 내거나 이름을 불러 찾거나 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우리 수도원에는 성독에 참여하는 성독 모임도 둘 있다. 낮기도 때 그 날의 복음을 읽고 그 복음에 관해 간단한 나누기를 한다.

성독에는 시간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생활이 바쁘고 분주하다는 것도 문제다.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도 않는 성독에 시간을 쓴다는 것이 사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고찰해 본 것은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평생토록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기를 바랄 따름이다. 또한 최신간이나 베스트 셀러만을 계속 출판하는 추세도 문제다. 확실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이 평생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함양하는 선택임을 확신해야 한다.

잘, 깊이 읽는 것이 식별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수도승의 길에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뿌리가 뽑히고 흩어진 사회에 다시 희망을 주고 닻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관상가 중에 한 사람인 대그 함마숄드(Dag Hammarskjold)는 『표지』(Markings)에 이렇게 썼다: “귀 기울여 듣기를 당신이 결코 원하지 않을 때, 어떻게 당신의 청력을 보존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당신이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당신을 위해 내셔야 할 시간도 꼭 같다” (12쪽). 우리의 독서는 듣는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보다 더 반가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 하느님은 새벽처럼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다. 그분은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이를 비추시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 존재에 무서운 무게를 미치는 것은 소유이다. 존재를 가볍게 하고 존재가 참으로 존재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수도승의 사명이다.

- 성 베네딕도의 시대와 중세 수도승들은 본문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듣고, 온종일 되새겼다.

- 독서는 수도승들이 원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 낮잠처럼 독서는 우리에게 원기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 우리 복음의 가장 뛰어난 특징의 하나는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가 명백히 없다는 것이다. … 그들 저자들의 으뜸가는 목표와 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맺는 내면 관계를 기르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신앙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다. …

- 교회의 생명과 성덕에 속해 있는 우리가 교회를 위해 지혜로운 여인이 되려면,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하느님 체험을, 우리 수도승들이 얼마나 닦고 길러야 하겠는가.

-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의 마음과 정신을 비추기를!


참고문헌


- Dom Cuthbert Butler, Benedictine Monasticism, Cambridge, 1961
- Raimundo Panikkar, Blessed Simplicity, Seabury Press, 1982
- Daniel Rees et al, Consider Your Call, SPCK, London. 1978
- Documents of Vatican Ⅱ, Guild Press, 1966
- Louis Bouyer, History of Spirituality, Seabury Press, 1982
- The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Guigo Ⅱ, Cistercian Publications, 1981
- Dom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Desire for God, Mentor Omega, 1962
-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Vol. 11, 2nd Series, Wm. Eerdmans Publishing Co., 1973
- Armand Veilleux (trans), Pachomian Koinonia Ⅱ, Cistercian Publications, 1981
- Dom Garcia Colombas, Reading God: Lectio Divina, BMH Publications, Schuyler, 1993
- Adalbert de Vogue, Reading St. Benedict: Reflections on the Rule, Cistercian Publications, 1994
- Timothy Fry OSB (ed.), RB 80, Liturgical Press, 1981
- Adalbert de Vogue Rule of St. Benedict: Doctrinal and Spiritual Reflections, Cistercian Publications. 1983
- Andre Louf, Teach Us to Pray, Franciscan Herald Press. 1975
- Joan Chittister, OSB, Wisdom Distilled from the Daily, Harper and Row, San Francisco, 1990
- Hubert Van Zeller, The Holy Rule: Notes on St. Benedict’s Legislationfor Monks, Sheed and Ward, 1958
- Luke Eberle (trans), Rule of the Master, Cistercian Publications, 1977

잡지
- American Benediction Review, Vol. 23:4, 1972
- Benedictines, Vol. 30:2, 1975
- Cistercian Studies, Vol 6:1, 1971
- Monastic Studies, #12, 1976
- National Catholic Reporter, Feb. 18, 1994
- Review for Religious, Vol. 39:4, 1980
- Worship, Vol. 69:1, 1995

(코이노니아 제24집 제100쪽, Dolores Dowling, O.S.B, 김의자 마리로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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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식별의 뿌리를 성서와 교부들의 문헌에서 검토해 보려고 1995년 2월 2일 캐나다 위니펙에서 열린 미주 베네딕도 수녀원 원장들의 회의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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