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심포지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종합토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9 ㅣ No.672

[2008년도 심포지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종합토론

 

 

* 초기 교회 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경기도 마재의 나주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 (차기진) 

* 19세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방상근) 

*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본당 및 공소와 신자 수 변화를 중심으로 - (양인성) 

* 黃嗣永과 朝鮮後期의 社會變化 

- 경기 북부 지역 敎會 史蹟의 기초적 검토 一例 - (이장우)

 

종합토론 

 

사회자 

김수태 교수 (충남대학교) 

 

토론자 

원재연 박사 (수원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 (호남교회사연구소) 

노용필 박사 (전북대학교 인문한국연구원) 

최성우 신부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 

 

 

김수태 : 지금부터 종합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성우 신부님께서는 이번 학술회의가 자료정리 수준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아까 주교님도 말씀하셨지만 아주 의미가 있는 학술회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의정부교구가 만들어진 지 4년 만에 이런 교회사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는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발표해주신 분이라든지 또 토론하신 분들이 모두 다 이 부분의 권위자이기 때문에 그 또한 대단한 의미를 지니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아까 최성우 신부님도 앞으로 세 차례 정도 계속할 거라 이야기하셨지만, 꾸준히 계속적으로 교회사 연구에 대한 발표가 있고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희망을 바라고 싶습니다. 저한테 주어진 시간이 원래 1시간 10분이었는데, 4시 50분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데 지금 5시 10분입니다. 어쨌든 1시간 10분에서 조금 더 갈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토론 진행 방법은 네 분의 발표에 대해서 지정 토론자가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약정 토론을 듣고, 그 다음에 오늘 발표를 들으신 많은 분들의 질문을 2~3분 정도 듣는 그런 진행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토론자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옆에 있는 순서대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차기진 선생님에 대해서는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원재연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박수). 두 번째 발표인 방상근 선생님에 대해서는 호남교회사연구소의 서종태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박수). 세 번째 발표인 양인성 선생님에 대해서는 전북대학교의 노용필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박수). 마지막으로 이장우 선생님에 대해서는 최성우 신부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박수). 

 

교회에서 하는 학술회의를 보면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1시간 내지, 1시간 10분 정도 하는데, 앞으로는 토론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가 대신 사과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토론 요지문이 1개만 복사가 되고, 나머지는 못 드렸다는 점입니다. 질문해 주시는 분들이 잘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원재연 선생님부터 해주시지요. 

 

원재연 : 조금 전에 소개를 받은 원재연 하상 바오로입니다. 제가 차기진 교수님의 발표를 보면서 전체적으로 느낀 소감이라고 할까요? 그것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발표문은 초기 교회 시대의 경기 북부 지방 천주교 신앙에 관한 자료들을 마재 정씨 형제들의 활동 중심으로 엮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마재 정씨 집안에 복음이 들어온 과정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다산 형제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천주교 신앙 수용 계기와 형태, 교회 활동의 내용, 박해의 따른 배교 또는 귀교의 과정, 신앙의 복귀, 그리고 다음 세대로의 신앙의 전승 등에 대해서 폭넓게 다루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초기 교회 시대를 주된 대상 시기로 다루었습니다. 그동안 일부 본당이나 성지에서는 본격적인 교회사 연구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다산 일가와 관련된 교회사 지식을 다소 부정확하고 또 불충분하게 산발적으로 교회 내에 홍보함으로써 신자들에게 다소의 혼란을 초래하는 문제점을 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발표문을 통해서 다산 형제들 및 마재 정씨 가문의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집안 문제를 비교적 객관적 · 구체적으로 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줌으로써 신자들에게 정확한 교회사 지식에 입각한 올바른 성지순례를 통해서 순교 신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이 발표문을 읽으면서 오류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논평문 작성이 대단히 어렵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은 논평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제가 여러 번 발표문을 읽고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몇몇 부분과 의견이 저와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발표자의 답변을 경청하면서 제가 이해가 미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아까 발표자께서도 질문하셨지만은 다산 일가가 정착한 마재 일대의 행정 구역, 그리고 정약종 순교자가 나중에 이거한 분원, 마재와 분원은 한강 지금 팔당댐을 가운데 두고 있는 양쪽에 대치된 지점인데, 광주에 속하기도 하고 양근에 속하기도 했던 그런 지역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광주 마재, 양근 마재, 광주 분원, 양근 분원 이런 용어들이 여러 가지 자료에 섞여서 나오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시기적인 정리를 한 번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냐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두 번째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 삼형제가 정씨 가문과 이 마재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복음화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주시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각각의 역할을 언급하셨으니까, 집안 내에서 3형제가 취했던 복음화의 역할들을 한 사람씩 역할 분담 형식 내지는 또는 복음화에 있어서의 담당한 역할들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보시는 것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이 삼형제가 신앙에 들어가고 신앙에서 나가는 시점들은 모두 다르지만은 1801년 신유박해 전까지 끊임없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는 사건이 있다하면은, 그것은 제가 봤을 때 매년 거의 한 번씩 했던 천진암 소풍이라고 할까요. 이것이 《여유당전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천진암을 같은 집안 형제들이 모여서 정조 시대 박해기 동안에도 같이 다녔던 의미, 이런 것들을 교회사적인 신앙적인 측면에서 해석을 해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정약종이 마재에서 분원으로 이거를 했다 하는데 여러 가지 시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1791년이냐 1793년이냐 1795년이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알려주시면 좋겠고요. 그 다음에 일반적으로 가성직단의 오류를 지적한 사람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로 알려진 측면이 있는데 정약전으로 말씀하신 분명한 어떤 증거자료가 있는지, 만일에 있다면 기존의 유항검설에 대해서는 무엇이 오류라고 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지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정하상 성인의 공경과 관련해서 마재에서 정하상 성인의 출생지라고 해서 책자를 돌리고 있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거기도 그렇게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저도 차 선생님과 의견을 같이 해서, 분원에서 출생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쳐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재에서 정하상 성인의 공경을 포기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유박해 이후에 정하상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과 유 세실리아 이 세 분의 성인이 마재에 와서 10~20년 정도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정하상 성인이 가장 먼저 서울로 가고 그 다음에 세실리아와 엘리사벳이 따라가는 형태가 되지만은 그동안의 신앙생활이 마재에 미친 영향 같은 것들을 잘 정리해서 홍보를 한다면 마재에서도 충분히 정하상 성인을 공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원 선생님께서 3장에 걸쳐 아주 자세하게 질문을 하셨는데, 지금 말씀은 간단히 하셨습니다. 차 선생님 말씀해 주시지요. 

 

차기진 :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원재연 선생님께서 원래 질문하신 것이 한 20가지가 넘는데,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다 알지는 못하고요. 말씀드려야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 그 당시에 보면은 마재는 광주가 분명합니다. 제가 1872년 지도를 예시하였는데요. 그 이전에 나온 〈해동지도〉, 그리고 제가 병기한 지도와 비슷한 〈대동여지도〉에는 경계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해동지도〉하고 〈대동여지도〉에는 광주군, 양주군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재는 광주가 분명합니다. 지금 현재와는 다른 것이지요. 그 당시 한강하고 지금 현재의 한강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그 당시는 가물을 때는 걸어다녔으니까요. 지금 팔당댐이 생기고 나서 굉장히 넓어지고 깊어진 것이고요. 그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고요. 

 

그 다음에 정약종 3형제의 신앙은 지금 현재 부분별로다가 개별적으로 연구는 되어 왔습니다. 저도 이쪽에 대해서 정약종 따로 썼고, 정약용 따로 썼고, 정약전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분되어 있고요. 여기서는 시간상이나 분야상에서 언급을 못했을 뿐이지요. 그런 것을 다 언급하면 분량이 엄청 많이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만 설명을 드리겠고, 앞으로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추가적으로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약종이 마재에서 분원으로 이주한 것은 1791년에서 진짜 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정약종의 맏이인 정철상이가 포도청에서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고향에 갔더니 “주 신부님이 어딨느냐?” 송곳으로 찌르면서 대라고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제사 때 고향에 가면요. 그러니까 최소한도 1791년에서 1793년 그 언간에 이주한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래서 제사 문제와 관련해서 1791년 이후로만 설명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하상, 정정혜 엘리사벳의 신앙 탄생은 분명히 분원이 맞아요.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 신앙을 앞에서 발표하면서 설명 드린 것처럼, 그 뿌리를 가지고 일반적인 역사가 아니고 일반 복음사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마재까지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 탄생지가 분원이라서 마재하고는 상관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중에 정하상이 성장을 하고 나서 마재를 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달레의 교회사에 나오는데, 다블뤼 비망기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가서 핍박을 받았다 하는데, 왔다 갔다 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를 안 갔겠습니까? 정하상 성인이 북경에만 16번 왔다 갔다 한 사람인데 발길 안 닿는 곳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발자욱을 찾는 것보다는 신앙의 맥락에서 설명을 하면 마재까지 끌어 들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 다음에 가성직단 문제인 정약전. 중국어를 갖다가 불어식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뭐라고 쓰여 있냐 하면 ‘훤전’이라고 나와요.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낸 것 중에 가성직단의 오류를 지적한 사람이 조선인 훤전이라고 나옵니다. 훤전이 유항검의 호의 중국어 역이라 그러는데, 중국의 역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정약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다른 사람한테 편지를 쓸 때 자기 호를 쓰지는 않습니다. 자를 씁니다. 자를 쓰는데 정약전의 자가 천전입니다. 天專이라고 써요. 그것을 가지고 중국식 발음으로 한다면 훤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 훤전은 조선인 약전으로 봐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지적했다고 썼고. 그렇기 때문에 이승훈의 회답에 그렇게 나와요. 가성직단의 일원의 한 명이 나한테 오류를 지적해줬다 그렇게 나와요. 그렇기 때문에 훤전이 정약전이라면 약전은 가성직단의 사제 중에 한 명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고요. 그래서 설명을 드린거고요. 

 

아주 지적을 꼼꼼히 잘해주셔서요. 저도 이것을 가지고 가서 배워야할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나머지는요. 토론자인 원 선생님과 서로 얘기해서 제가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추가 연구할 것은 추가 연구하기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논문집이 나올테니까요. 왜냐하면 이것이 스물 몇 가지가 되요. 그래서 핵심적인 것을 말씀해 주셨고, 핵심적인 것만 말씀드렸습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쓰셨어요. 조금 아쉽기도 해서 오늘 참석한 한 두 분께 더 여쭤보고 싶은데요. 방 선생님께서 양근, 마재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방상근 : 어느 시점의 광주냐 양근이냐는 부분은 차 선생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 같고요. 제가 지금 이 말씀 들으면서 잠깐 생각났던 게 뭐냐하면 정약종이 마재를 떠난 시점, 분원으로 이거한 시점하고 정하상 성인이 마재에서 낳았는냐, 분원에서 낳았느냐 이런 부분인데, 지금 차기진 선생님이나 원재연 선생님은 분원 쪽 말씀하시는데, 정하상 추국에 보면 본인이 자기가 마현 태생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건 어떻게 봐야 할지 궁금하네요. 그런 자료가 있거든요. 추국에 정하상 성인이 자기가 심문 받으면서 얘기할 때, 그때 광주로 나오는지 그건 제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마현 태생이라고 나오는데 그건 참고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차기진 : 그건 예전에 얘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선대, 아버님대의 고향을 얘기하기 때문에, 그것을 얘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몇 차례 얘기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기록은 분명히 나옵니다. 

 

김수태 : 노용필 선생님께 마이크를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 이 부분과 관련해서 노용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뭐냐하면 정씨 형제들의 천주교 신앙 활동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을 해야 될까요. 

 

노용필 : 지금 사회자의 요청에는 부흥하기 어려울 것 같고요. 그것은 기회가 되면 말씀을 드리고요. 아까 두 분 발표자하고 토론자 말씀 중에 마재 쪽하고 분원 쪽에 대한 지역적인 차이, 한강을 끼고 뚝 떨어져 있는 것 그 부분에 차 선생님은 지도까지 제시하면서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은데, 그것이 너무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대목에서 잠깐 말씀을 드릴까 하고 나섰습니다. 사실 저도 그게 의문이였어요. 아마 누구나 다 그런 의문을 가질 겁니다. 왜 나중에 분원으로 이사를 갔을까 하는 문제도 거기에 결부가 된다고 생각이 드는데 또 하나는 차 선생님 처음 발표 때도 그러셨습니다만, 마재의 나주 정씨들이 결국 분원 쪽에 이씨 성 가진 분들하고 혼맥이 많이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저도 그것이 굉장히 궁금했는데, 어느 날 집에서 명절 때였어요. 가만히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는 것이 있어서 제 손위 매형한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가정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 같아서 엉뚱한 이야기라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고향이 바로 마재, 능내입니다. 마재에 있는 능내리. 그래서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매형한테 “형님의 어머니는 내가 분명히 아는데, 이씨 성이신데 어디 태생이시냐?” 그러니까 바로 분원리 쪽 태생이시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가는 이쪽이신데, 어떻게 연결이 됐냐. 그랬더니, 저보고 웃으면서 하는 얘기가, 그것이 확실히 옛날 분들은 다르더라고요. 하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한강이 겨울이 되면 얼지요. 그때 보통 혼인들을 많이 한다는 겁니까. 얼음판을 지치면서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에 청춘남녀들 사이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한강이라는 것이 지도상에는 분명히 있어서 이쪽 저쪽이 다른 것 같지만 겨우내에는 특히 많은 왕래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특히 그 지역 분들의 혼인이 겨울에 많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너무 마재와 분원을 갈라 가지고 보는 것은 너무 현재적인 관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약간 사족을 달았습니다. 

 

김수태 : 서 선생님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서종태 : 제가 《추안급국안》 바로 기해박해 부분을 번역을 했었는데요. 지금 정하상 결안 부분은 제가 정확히 기억을 못하겠어요. 그런데 결안이 어떻게 구성이 되냐 하면, 어디에서 태어나서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그러니까 부모가 어디에서 나를 낳아서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거기에서 살고 또 어디로 이사를 가서 호적에 올리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결안을 보면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태어나고 또 살았는지 좀 더 밝혀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수태 : 그럼 첫 번째 발표에 대해서는 토론을 이 정도로 마치겠고요. 두 번째 방상근 선생님에 대해서는 서종태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서종태 : 서종태입니다. 〈박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라는 논문을 발표해 주신 방상근 선생은 주로 박해기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전공해 오고 계십니다. 2006년에는 박사학위논문을 보완해서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상근 선생은 해당 주제를 누구보다도 잘 다룰 수 있는 적임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적임자답게 방 선생님은 그동안의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박해기에 천주교가 경기 북부 지역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를 19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깔끔하게 잘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논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점도 있는 것 같아서 몇 가지 지적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발표자는 19세기 중반기에 이르러 경기 북부 지역의 교세가 광적으로 더욱 확대되어 갔음을 밝히면서, 고양리, 포천 지역인데요, 격장리, 솥다리, 나무골, 연평 등 당시 신자들의 출신지와 거주지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명들이 오늘날 지명과 꼭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지도에서 찾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각기 오늘날 지명을 확인하여 밝혀준다면 교세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는지, 양적인 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밝혀준다면 글을 읽는 사람한테 많은 이해를 돕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둘째, 발표자는 19세기 중반기에 양주에 복음이 새롭게 전파되었음을 밝히면서 포천과의 관계 속에서 양주의 신자들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성원, 홍몽노, 홍성국 〈표3〉에 보면 나온 사람들인데요. 홍성선, 홍 다니슬라오 등의 세거지인 양주 일담리는 발표자가 밝히고 있듯이 오늘날 동두천읍인 일담면 - 그것을 이담면이라고도 하나 봐요 - 으로 생각되는데, 이곳은 산간 지역이 아니라 평지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면은 일담리를 세거지로 살아서 삼았던 사람이니까, 대대로 일담리에 살았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다들 각각 거주지가 달라져요. 이렇게 달라지는 것을 보면 각기 다른 지역에 가서 신앙을 따로따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일담리에서 일단 신앙을 받아들여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다른 지역으로 피해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붙잡힌 것이 아닌가 그런 판단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홍성원 등은 일담리에서 살며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포천 고양리, 광주 정임 새말, 공주 적바위 등으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체포를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천 고양리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확인을 못해봤지만, 박해가 격화되던 1868년에 홍성원, 홍몽노, 백양선 등이 그곳에서 체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박해를 피해 모여 살던 산간 교우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러한 해석이 맞는다면은 양주 일담리는 박해가 완화되던 때에 평지 교우촌으로 성장했던 곳으로 보이고요. 포천 고양리는 박해가 격화되면서 즉, 병인양요 이후에 박해가 격화되면서 평지 교우촌에서 피신하여 온 교우들로 형성된 산간 교우촌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양평 지역의 교우촌 연구를 할 때 보니까 이런 식이었거든요. 박해가 완화되었을 때는 평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가 병인양요 이후에 박해가 격화되면서 산 쪽으로 교우촌이 옮아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째 발표자는 19세기 중반기에 송도 지역이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신앙 중심지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밝히면서, 그렇게 발돋움하게 되는 배경을 송도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즉 서울과 함께 조선 시대 최대의 상업 도시였던 송도 지역은 서울처럼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했으며 아울러 지역적으로 서울과 가까웠던 점도 송도 교회의 발전에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8〉과 〈표9〉에 제시되어 있는 송도 치명자들은 거의 송도 두문동 거주자들이거나 송도 두미울 거주자들입니다. 여기서 두문동은 고려가 멸망 할 때에, 고려 신하들이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두문동에 들어가서 살았던 곳이거든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있는 곳인데 깊은 산골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두미울도 정확한 위치는 확인을 못해봤지만, 이름으로 보아서 역시 깊은 산골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상업 도시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정치도, 손성즉 등이 내포, 광주 등지에서 두문동과 두미울로 이주한 점을 보아서, 박해를 피해 그곳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맞는다면 송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상업도시 분위기와 달리 박해를 피해서 이주한 신자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되고, 신자들이 거주한 지역도 상업이 발달한 도시가 아니라 산간 지역이 아니였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방 선생님 바로 답변해 주십시오. 

 

방상근 : 선생님께서 꼼꼼하게 글을 읽고 좋은 지적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세 가지 질문을 하셨는데, 두 가지가 하나는 포천, 하나는 송도라서 실질적으로 따지고 보면 의정부 관할 구역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도 발표할 때 말씀드렸지만 제가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의 존재, 교우촌의 존재를 살펴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송도하고 포천하고 다 다루지만, 아무래도 교구 분할 밖이라서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정리하는 데 소홀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제 불찰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본 논문에 보충해 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말씀하신게 지명 부분인데, 포천 지역입니다. 본문에 보면 29쪽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고양리, 격장리, 솟다리, 나미골, 영평. 현재의 지명을 같이 알려주면 이해하는 데 편하지 않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고요. 이 중에 먼저 영평 같은 경우에는요. 예전에 영평현이었는데, 지금은 합쳐져서 포천군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포천군 영중면 영평리로 규정이 되고요. 솟다리. 이게 교회 측 기록에는 소에다가 ㅅ이렇게 나오는데요. 이것을 찾아보니까 포천군 가산면 정교리. 아까 양인성 선생님 발표할 때 1930년대 공소, 정교리 공소가 나오던데, 鼎에 橋를 씁니다. 이것이 아마 솟다리가 그 솟다리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 아마 정교리 쪽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고양리, 여기서 신자들이 체포돼서 순교하시는데, 고양리하고 격장리, 나미골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추정이 가능한 것이 뭔가 하면 고양리 같은 경우는 포천시 남쪽 그러니까 정교리와 같은 가산면 지역에, 우금리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금리 지역 중에 ‘괴기’라고 하는 지명이 있는데 ‘괴기’라고 하는 지명이 다른 말로는 ‘괴야리’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양리와 관계해서 교회 측 자료에 나오는 것이 ‘고약리’하고 ‘괴양리’라고 표기가 되는데 고양리, 괴양리가 ‘괴기’ 또는 ‘괴야리’하고 유사해서 이쪽 지역으로 비정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추정 단계에서 말씀 드리고. 그 괴기 밑에 ‘넘말’ 또는 ‘너머말’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이게 아까 찾기 힘들었던 ‘나미골’과 연결시켜서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왜냐하면 괴기하고 나미골이 굉장히 가깝습니다 그런데 제가 . 발표문에서 얘기했듯이 백양선 같은 경우 치명일기 316에 나오는데, 이 양반의 치명일기 기록 보면 ‘포천 나미골 사람인데 고양리로 우거했다’, 그러니까 옮겨가서 살았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렇게 봤을 때 나미골하고 고양리가 가까운 지역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것을 토대로 괴기하고 넘골이라는 것이 또는 넘말이라 하는 우금리 쪽이 그 당시 괴양리 또는 고양리 또는 나미골이 아니였을까 하고 추정을 해보는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추정 불가하다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는 역시 관련된 부분인데요. 저는 볼 때, 양주의 신앙 공동체, 신자의 존재 자체는 포천의 영향 속에서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는데, 서종태 선생님은 반대로 양주의 일담리에 세거지인들이 고양리도 가고 광주 쪽으로 가고 이렇게 퍼져나가더라. 공주 쪽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니까, 원래 신앙을 갖고 있다가 박해로 인해서 타지로 분산된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고, 또 일리가 있는 추정이라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고양리의 위치가 문제인데, 만일에 고양리라는 것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금리 쪽이라고 그러면, 우금리 쪽 지도를 보니까요. 뒤에 산이 있지만, 포천 쪽에서 쭉 내려오는 평야 지대입니다. 평지지요. 그래서 산간 교우촌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완전히 박해를 피해서 숨어 사는 산간 지역은 아니고요. 포천 쪽에서 쭉 내려오는 평야 지역이기 때문에 만약에 괴양리가 ‘괴기’ 또는 ‘괴야리’라고 규정이 된다면 여기는 산간 교우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 같고, 역으로 제가 지금 양주 쪽이 포천의 영향을 받았다고 비정을 한, 또는 이야기를 한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 교세적인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발표문에서 얘기했을 때 포천 같은 경우는 창설기 교회부터 쭉 신자가 존재했고, 교우촌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특별한 예가 1836년 1월에 제시된 모방 신부에게 보고된 내용이죠. 교우촌 숫자인데, 거기 포천 같은 경우에는 90~95명 정도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거기 양주 얘기는 없거든요. 그 전에도 양주 얘기는 없었고, 이것을 봤을 때는 실질적으로 포천 지역의 신앙 전통이 계속해서 쭉 내려오는데, 양주는 그렇지 못했고 나타나는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나는데, 그것도 소수의 신자 정도가 나타납니다. 이런 교세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도 양주 쪽에서 포천보다는 포천 쪽에서 양주 쪽으로의 영향으로 생각하는게 좀 더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글을 서술했는데요. 서종태 선생님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송도 문제 말씀해주셨는데요. 이것도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의정부 교구 관할 밖이라서 상세하게 정리 못한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8〉, 〈표9〉, 32~33쪽에 있는 내용인데요. 거기에 보면 송도 신자 해놓고, 다 거주지가 두문동, 두미울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발표문에 제시한 송도 신자들 명단들은 치명자들만 일단 제시를 했습니다. 송도에서 돌아가신 분, 장단에서 돌아가신 분,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가 두문동, 두미울로 나오는데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두문동이라는 것이 송도 서쪽, 광덕산 기슭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지역에 사는 분들이 거의 내포나 광주 이쪽에서 이주한 분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또 한 가지는 두문동하고 두미울에 살았던 분들의 관계를 봤을 때, 거의 가족관계라고 했을 때 이 두문동하고 두미울은 같은 곳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서종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발표문에 적기한 내용은 치명자들만 적기했는데, 명단의 제시는 안 했지만 송도 지역의 교세가 가장 크다 그러면서 64명 정도의 신자가 보여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64명의 거주지를 분석해보니까요. 개성 도성 내에 예전에 우리 한양, 즉 서울을 동 · 서 · 남 · 북 · 중 5부로 나누듯이 개성도 그런 식으로 나누는데 도성 안에 북부니, 송도 북부니, 송도 동부니, 송도 남부니, 이렇게 개성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도 드러나고요. 지금 요새 얘기하면 서울의 남대문 근처 같은 지역에 덕암동 · 덕바위 이런 지역인데, 거기도 많은 신자들이 사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밖으로 나가면 정확한 거리 개념은 없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용산 정도라고 할 곳에 팔자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도 신자들이 살고요. 그 앞에 새말, 그 다음에 개성 가면 태조 왕릉, 왕건의 능이 있는 그 근처에도 신자가 살았던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도성 가까이 있었던 덕암리는 송도 회장인 이문홍 회장이 살았던 곳이고요. 당연히 여기는 베르뇌 주교님이 오셔서 성사를 주셨습니다. 덕암리에서 조금 나가는 팔자동에 사시는 박의영이라는 분의 집에도 베르뇌 주교님이 오셔서 성사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봤을 때는 송도 내에서의 교회 중심지는 덕암리, 덕바위 하고 팔자동 쪽이라고 생각이 되고, 그 지역 지금 제가 말씀 드린 지역의 신자들을 보니 송도 출신들이 많다. 다만 외부에서 온 분들은 굳이 두문동에 많이 거주하시는 측면이 보이는데, 글에는 두문동 얘기만 했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송도 교회의 형성은 박해로 피신해 온 신자들에 의해서 생긴 것보다는 송도 지역 자체 내에서 송도의 도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최성우 신부님께 마이크를 드리려고 했는데요. 송도 부분부터 말씀해 주시고요. 

 

최성우 : 송도 부분은 그 쪽은 제가 다음에 질문을 해야 할 것 같고요. 광주 일담리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수태 : 그것하고 방 선생님 논문을 보면 경기 북부만이 아니라, 경기 동부 지역도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고, 학술회의 제목을 봤을 때 경기 북부 지역이 들어가는데, 왜 북부 지역이라고 썼는가? 또 자료집 뒤의 끝에 보면 동서남북의 남부는 없어요. 북동서만 있는데, 앞으로 학술회의 제목을 잡을 때 북부 지역, 동부 지역, 서부 지역 이런 것이 타당할 것인가? 이런 부분도 같이 말씀해 주십시오. 

 

최성우 : 뒷부분은 조금 더 논의를 해보고 말씀을 드리고요. 지금 서 선생님께서 제기하신대로 동두천 쪽 지역인 양주 일담리가 어디냐. 이것 때문에 저도 꽤 오랜 세월 많은 지도를 찾고 다녀봤었는데요. 굉장히 고민스러운 지역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제가 최종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지역은 경기도에 가면은 동두천, 경원선 끝 쪽입니다. 동두천 원래 역의 후문이 있었던 자리에 마차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 자리, 그 근처가 양주 일담리가 아니였을까 제가 추정을 하고 있는 장소인데요. 왜 그렇게 추정을 하냐 하면은 양주 일담리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 집안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 갑자기 생뚱맞게 신앙 공동체가 나오고 이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홍성까지 내려가서 순교와 치명을 하게 되는가가 궁금했습니다. 이것이 어떤 역사적인 연원도 없고, 버섯처럼 쑥 자라난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 지도들을 찾아보면요. 우선 그 지역에 뭐가 있었냐면요. 동두천 장이 있었습니다. 예전 조선 10대 길 중에 하나인 관북대로로 해서 함흥부터해서 물자를 내려오는 길의 중심에 있었고요. 그 중에 하나가 내려오다가 동두천 장이라고 하는데서 물건들이 좀 팔리고요. 그런 다음에 쭉 내려오면 창동 지역에 장이 서고 서울로 들어갑니다. 그때 당시 장 이름이 동두천장이었습니다. 장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제법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고, 5일장이었는지, 며칠 장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장 자체가 그쪽에서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리고 지금 있는 동두천 장은 미군 부대가 들어오면서 밀려난 장이거든요. 그러니까 동두천 큰 시장이라는 것은 밀려난 장이고, 원래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장은 지금 미군 부대가 있는 그쪽 지역입니다. 거기에 아마 장사를 하러 온 홍씨 집안이 신앙을 가지고 그쪽에 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고요. 그 장을 중심으로 해서 일담리라고 하는 동네는 실질적으로 지도 상이나 역사 상이나 나오는 이름은 교회사 쪽이 제일 많이 쓰고 있고요. 대부분은 이담면으로 나옵니다. 이담리하고 일담리하고 다른 동네인가 하고 찾아봤는데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일담리와 이담리가 혼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동일한 동네 같다는 느낌이고요. 그렇게 만일 일담리를 마차산이라고 하는 그 지역 중심으로 해서 바라보면 그쪽이 산간 지역이거든요. 산세도 험하고, 그쪽에서 신암리하고 갈곡리로 넘어가기도 좋고요. 또 그쪽에서 옛날 산길로 타고 넘어가면 마찬가지로 포천을 넘어가기도 좋습니다. 사실 느낌에는 북쪽으로 넘어가는 쪽이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고, 장이 열리던 곳이다. 그것 때문에도 일담리는 마차산 그쪽 지역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요. 

 

두 번째로는 그쪽 지역의 마차산 안쪽으로 들어가면요. 전의 이씨들이 400년 넘게 그곳에서 살고 있으면서, 아직도 붕괴되지 않은 씨족 공동체를 갖고 있습니다. 종손들에게도 찾아가서 조상들에 대해서 물어봤거든요. 양주 일담리를 찾아야겠는데, 고양리나 이쪽은 저희 교구가 아니라서 조금 관심의 도를 적게 했고요. 양주 일담리만큼은 어떻게든 찾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많이 찾아 다녀봤는데요.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아까 서종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쪽이 평야 지대였다고 본다 하면은 마차산 쪽 제가 지금 얘기해 드리는 동두천 장에서 좀 안쪽으로 들어간 지역은 산간 지역으로 험한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가막산, 마차산, 소요산들이 연결되는 지맥에서 험한 산들이 연결되는 그 중심에 있고요.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는 지형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숨어 살기에는 괜찮았고 또 왔던 이유로 찾아보면 동두천 장이라는 장이 있었기 때문에 함흥 위쪽으로부터 물건들이 내려오고 물자들이 교류되는 지역이었으니까 아마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왔다가 신앙 생활을 하고, 혹시 박해를 받고 전멸을 하고, 그런 다음에 후손들이 남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되는 그런 동네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공동체적인 측면에서 자생적으로 있었던 양주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포천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공동체가 아니라 독립적인 공동체가 아닐까. 저는 개인적으로는 제가 한 4년 찾아본 결과 양주 일담리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수태 : 방 선생님 주제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논의하고 싶은데요. 지금 계속 송도하고 내포하고 언급이 되는데 방 선생님은 상업도시 부분을 이야기했고, 박해로 인해서 내포에서 이주해서 왔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내포하고 송도 이 지역은 해상 교통로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내포와 관련해서 더 말씀해 주실 것은 없으신가요? 

 

방상근 : 지금 내포 얘기를 하셨는데 원래 정치도의 가족이 내포 출신입니다. 내포 살았다가 서울 잠깐 살았다가 다시 내포 갔다가 내포에서 다시 송도 두문동 쪽으로 오는데요. 이 사람들이 왜 이리로 오는지, 거기에 대한 이유가 자료상으로 나타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도의 기록을 보면 이 사람을 비롯한 가족들이 내포에 있다가 서울에서 삽니다. 1년을 사는데, 집안에서 외아들이어서 집에 돌아와서 살아라 해서, 살다가 하는 말이 ‘신앙 생활하는 것이 좀 어려운 것 같아서 송도로 갔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거든요. 결국은 신앙생활이 매개가 돼서 이주한 것으로 현재 나와 있는 자료는 그렇습니다. 

 

김수태 : 차기진 선생님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차기진 :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니까, 그런 정도고요. 서해안을 통해서 하는 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경기도 서해안서부터 송도 지역까지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저도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일담리 세거지, 참 많이 나오는 말이에요. 세거지인인데 세거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여서 계속해서 세거 했느냐, 아니면 세거지인인데, 후에 신앙을 받아들이냐는 구분이 돼야 돼요. 만약에 오랫동안 신앙을 받아들이고 생활을 했다는 신자들이라면 선교를 했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단순히 세거지인이니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세거지인인지, 세거지인인데 후에 신앙을 받아들인건지 구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방상근 : 그것과 관련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보시는 분들에 따라 입장이 다르실 수 있습니다. 서종태 선생님이나 최성우 신부님이나, 저나, 차 선생님 말씀하셨듯이, 이분들이 실질적으로 만일 양주로 이동한 시점이 입교 후에 갔느냐, 아니냐 이것도 따져야 할 부분이고요. 모릅니다. 사실. 그것이 꼭 박해를 피해서 이주했다 하는 부분은 더 검토를 해봐야겠지만 이 부분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 견해와 같이 검토해 봐야 할 사항이지, 지금 현재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 같습니다. 

 

김수태 : 저같이 무지한 사람들은 논문을 읽을 때, 방 선생님께서는 포천을 강조하면서 출신지는 양주를 훨씬 많게 그려났습니다. 왜 양주를 강조하지 않고 포천을 강조했는지 궁금함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세 번째 토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토론은 노용필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노용필 : 감사합니다. 저도 토론 요지문 2장을 준비했는데, 어제 미리 양 선생님께 보내드렸기 때문에 아마 제가 무슨 얘기를 할지도 알고 계셔서 효율적으로 답변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막연한 흐름이지만 조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잘 밝혀져 있지 않았던 개화기 및 일제시대 경기 북부의 천주교회사에 대해서 양인성 선생님께서 주목을 해 가지고 정리를 시도한 것은 대단히 값지고 빛나는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치밀한 연구가 더욱더 기대된다고 하겠으며, 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소 비판적인 지적들을 서너가지 드릴까 합니다. 

 

크게 보면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연구의 범위와 방법에 관한 것인데, 세부적으로 약간 거론하자면 애초부터 고양, 양주, 연천, 파주 지역을 중심으로 논의한다고 설정을 해가지고, 현재의 춘천교구 관할로 되어 있는 가평, 포천 지역 제외했고, 또 오늘날 수원교구에서 관할하는 양평 지역도 역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약간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 지역까지도 전반적으로 보면서 연결성을 염두에 두면 더 입체적인 연구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까 특히 바로 앞의 방상근 선생은 그런 방법을 취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양 선생님께서도 그런 방법을 취하면 좀 더 입체적인 연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고요. 

 

또 하나는 여러 개의 표를 6개 정도를 제시하신 것 같은데, 표를 작성해 가지고 제시해 줌으로써 대단히 의욕적인 분석이 행해진 것으로 판단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다만 〈표5〉와 〈표6〉의 제목이 동일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내용상으로는 다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표5〉을 바꾸든, 〈표6〉을 바꾸든 제목을 약간 손을 대야 되지 않겠나 하는 조금 소소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지적을 드리고 싶고요. 앞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도와 그래프도 곁들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신자들의 수적인 변화는 막대 그래프 같은 것으로 시기적으로 놔두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소들의 위치나 이동 관계, 변동 같은 것은 지도에 표시하면서 화살표 같은 것으로 제시해 주면, 훨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큰 두 번째로 자료의 활용과 관련해서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개항기 및 일제시대에 관한 정리를 함에 있어서 누구나 일단은 교회사를 연구하니까 당연히 교회 측 자료에 치중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을 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이 갖는 고충이기 때문에 저도 공감을 하는데, 그 중에 보면 인용된 것 중에 ‘최문식 신부 1928년 연말 보고’ 이렇게 주를 달았는데요. 저도 사실은 이것을 하나하나 다 체크를 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자료들은 굉장히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려내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상당히 많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걸 좀 더 치밀하게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또 하나 제목 자체가 개화기, 일제시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만은 1901년부터 이런 일들이 주로 되기 때문에 - 1891년부터도 그렇습니다만 - 이것이 일제가 우리나라를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때 먼저 통감부 설치하고 10년 넘어서 총독부 만들고 그러는데 일제가 남겨 놓은 그 조사보고서나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살 떨릴 정도로 종교 분야에 대해서 아주 집요하게 샅샅이 조사해서 매년 자료집을 내고 있거든요. 아마 지금 국회 도서관 같은 데는 그런 것을 다 취합해서 갖고 있는 것으로 저도 알고 있는데, 그런 자료들을 원용하면 교세 통계표에 없다고 할지라도 메꿔 줄 수 있는 방안이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용 자료의 범주를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좀 더 넓혀 볼 필요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까 선생님께서 앞으로 많은 시간을 가지고 심층적인 접근을 하신다고 하니까 이런 것도 아마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감안을 해두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또 하나 조금 무리해서 언급하는 것이 용납이 된다면 당시 일본인들이 보는 일본 신문, 물론 나중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생기고 난 다음에야 그건 뒷시기니까 그렇습니다만, 그 이전에 〈時事新報〉나 일본인 기자들이 들어와서 일본 신문에 보도하고 있는 내용들이 있거든요. 그런 내용이나 아니면 일본인이 남긴 회고록 같은데 언뜻언뜻 이런 얘기들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좀 보면, 저도 최근에 1900년대 무렵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농장 경영을 하고 이럴 때 만났던 한국인들에 대한 품평 같은 것을 하는 대목들을 봤거든요. 그런데 보면 제가 자세히 체크를 해놓고 정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얼핏얼핏 천주교에 대해 얘기들이 나오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것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하나는 일제가 집요하게 조사해서 정리해 놓은 인문 지리학 자료집들이 있습니다. 지금 수백권짜리가 영인돼서 나온 것이 있는데 그런 속에도 보면 일본인들이 종교에 대해서 관심이 많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서 이런 저런 써놓은 것들이 있고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저도 최근에 보다가 알게 된 것입니다만, 이 당시에 개신교 목사들이 들어와서 많이 활동하지 않습니까. 특히 외국인 개신교 목사들이 고국에 있는 자기 자식들이나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낸 책들 요즘 항간에 번역 나온 것이 있는데, 그 속에 보면 의외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 부러움을 느끼는 대목들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 지역에 누가 김 서방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천주교 신자인데 아주 성실하고 열심히 살기 때문에 오히려 목사인 내 입장에서 볼 때도 굉장히 귀감이 된다’ 뭐 이런 얘기를 써놓은 것도 있기 때문에 양 선생님께서는 교세 통계표를 가지고 이것 하시느라고 애를 많이 쓰셨는데, 통계 내는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 통계를 말하자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까지도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하면 더 값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큰 세 번째로 각주에 인용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건 세부적인 것입니다만 몇 가지 지적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각주 3번을 보면 특정 인물을 거론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 장동하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분께서 최근에 당신의 논문들을 묶어서 단행본을 내셨거든요. 2003년에 나온 〈개항기 교회 재건운동과 선교 정책〉이 글을 나중에 《개항기 한국 사회와 천주교회》라는 책으로 냈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해 드리는 게 마땅할 것이라는 말을 드리고 싶고, 눈꼽만한 이야기입니다만 완성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각주 24번 같은 경우에 보면 ‘두블레 신부 문서 4월 17일’ 이렇게 날짜만 쓰여져 있는데 그런 주다는 방법이 여러 개가 있거든요. 이 안에 보면.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이 나오는지 적어 주면 저를 비롯해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많은 신뢰성을 더욱더 가질 수 있게 해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적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각주 37번을 보게 되면 의외로 평강 본당 이야기가 불쑥 나오거든요. 아마 평강이라는 것은 북쪽에 있는 평강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평강 본당과 덕정리를 연결시키고 있는데, 평강 지역과 덕정리 공소를 연결시키는 것은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덕정리라는 것이 경기도일텐데요 평강이라면 너무 먼 지역과 연결시키는 것 같아서, 재고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고요. 

 

또 하나 아주 사소한 겁니다만 네 번째로 각주 41번에 보면 광장리 - 광장동이 되어 있습니다만 - 광나루 공소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광장동 주민 센터 홈페이지를 참고하라고 달아낪는데 요즘 와서는 많은 분들 젊은 분들이 이렇게 하시니까 좋습니다만 광장동 주민 센터 홈페이지를 참고하라고만 쓸 게 아니라 친절하게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까지 달아주는 것이 사회과학에서는 학례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렇게 달아주시면 좋겠고, 아니면 광장동 주민 센터 홈페이지를 참고하라는 주를 달기보다는 관련된 문헌을 찾아서 달아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여기 내용에 보면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져서 광장리가 고양으로 편입됐다고 했는데 그 내용상에 보면 구분을 그렇게 지어 놓지를 않으셨거든요. 이 부분은 조그만한 것이지만 재고가 요망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큰 세 가지 말하자면 연구의 범위와 방법에 관한 것, 또 자료 활용에 관련해서, 또 각주 인용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상의 충분치 못한 논평이 양 선생님의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양 선생님께서 바로 답변해 주십시오. 

 

양인성 : 노용필 선생님의 논평 감사드리고요. 지금 노용필 선생님께서 연구 범위 방법, 그리고 자료의 활용, 그리고 주석 인용된 글과 관련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자료의 인용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많은 부분 참고하도록 하겠고요. 저는 2~3가지로 답변을 드리는 것으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해 주신 것이 지금 의정부교구 관할인 고양, 양주, 연천, 파주 지역을 중심으로 제 연구가 이루어졌다 가평과 부천 지역과의 관계도 입체적인 연구를 위하여 필요하다 말씀하셨는데 맞는 말씀이시고요. 그리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포천 서면 탑동이라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동두천 지역인데, 이 지역에 탑동 공소, 왕방리 공소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지역이 설정되게 된 배경이 당시에 송도 지역에 있는 신자들이 이동해 가면서 탑동 공소가 설정이 됐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사례와 같이 가평이나 포천 지역의 신자들이 지금의 양주나 연천 지역에 가서 신앙을 전파하고 공소를 설정했을 경우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저의 능력이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거기까지 연구가 진행되지 못해서 이 연구에는 그런 것을 다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가평이나 포천 지역 그리고 양평 지역의 자료도 참조해서 경기 북부 지역, 지금 의정부교구 관할 구역의 공소의 변화라든지 이런 연구에 많은 참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해 주신 대로 일제의 통감부나 총독부 관련된 기록 부분도 중점적으로 찾아보도록 하겠고요. 

 

선생님께서 주석 부분에 ‘루블레 신부 문서 1910년 4월 17일’ 예를 들어서 이런 부분에 내용이 없고,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문서 타이틀만 각주에 들어가 있다고 지적을 해주셨는데 지금 제 논문이 요약문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논문은 《교회사연구》에 수록이 되거든요. 그때 문서의 자세한 내용을 주석에다가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주 37번의 평강 본당 교세 통계표와 관련된 내용을 지적해 주셨는데, 그에 관해서 설명을 드리면요. 신암리 본당이 1932년에 폐지가 됩니다. 폐지가 된 이후에 행주 본당 같은 경우에 행주 본당이 지금 신암리 본당 나중에 신암리 공소로 격하되지만, 신암리 공소 지역까지 관할 구역으로 설정을 합니다. 덕정리 본당이 설정되는 1934년까지요. 그리고 상대적으로 평강 본당과 가까웠던 덕정 공소는 평강 본당의 관할 구역으로 1933년의 교세 통계표에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평강 본당이라는 것은 지금 침묵의 본당인데요. 정확한 위치는 강원도 지역인데, 지금 북한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 평강 본당의 관할 지역으로 덕정 공소가 관할되어 있다가 1934년 덕정 공소가 덕정리 본당으로 승격이 되면서 다시 그 지역 연천과 그리고 파주, 양주 지역의 관할 구역이 다시 재조정이 되게 됩니다. 이게 선생님께서는 시간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착오가 있는게 아닐까라고 보셨는데, 어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봤고요. 이 내용은 맞습니다. 나머지 지적해주신 부분은 제가 좀 더 참고해서 다음에 《교회사연구》에 수록할 때는 많은 부분 보충해서 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용필 : 자세한 답변해주셔서 고마운데요. 그 다음에 제가 오늘 와서 발표하는 동안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40쪽과 41쪽에 〈표3〉 있지 않습니까. 그 〈표3〉에서 조금 더 읽어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까 발표하시는 도중에 봤는데, 표 위에 밑에서 5번째 줄에 보면 ‘이 가운데 양주 와부면 진중리, 파주 철연면 금곡리, 연천 적성면 묵언리에는 같은 시기에 각각 두 곳 이상의 공소가 있었다’라고만 하고 넘어가셨는데, 이것을 가만히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가령 양주 외부면 진중리의 경우에는 조곡 공소가 1895년에 생겨 있었는데, 1916년에 같은 와부면 진중리에 진말 공소가 또 들어서거든요. 이런 것의 의미. 또 하나는 비슷한 것입니다만 연천 묵언리에 있던 묵언리 공소가 1913년인데 감곡에 1922년 또 생기는, 동일한 지역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진데 또 하나 더더욱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파주 지역에 보면 말이에요. 쇠골이라는 공소가 1914년에 있었는데 철연면 금곡리에, 2년 뒤인 1916년에 감옥리에 공소가 하나 더 생기고 4년 뒤인 1920년에 은골에 똑같은 금곡리에 공소가 3개가 생긴다는 얘기거든요. 앞에 있던 것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그죠? 그렇게 보면 이 지역이 신앙 공동체의 중심 지역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것을 좀 더 표를 정치하게 읽어 들어가면 조금 더 얻어낼 수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고요. 

 

두 번째는 아까 서종태 선생님도 옆에서 잠깐 그 얘기를 하시던데 지명들에 관한 것은 현지 조사, 발로 뛰는 연구가 최고일 수 있습니다. 저도 최근에 들은 건데 광적면 우곡리 공소 이름을 가라비라고 했잖습니까. 여기서 발표문만 보면 가라비라는 지명을 안 쓰는 것처럼 생각되기 쉬운데, 지금도 가라비라고 쓰거든요. 다 가라비, 가라비 그래요. 저도 학회의 간사가 있었는데 “집이 어디냐?”하니까 “가라비에요” 그러니까 제가 못알아들으니까 광적면 우곡리라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그런 것은 사실 좀 더 염두를 두고 보면 좋겠다 싶은데 왜 그러냐하면 46쪽에 표시된 〈표6〉에 보면 여기에는 공소 이름이 우거리로 되어 있거든요. 교세 통계표를 만들 때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공소의 이름이 가라비에서 우라비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염두에 두고 보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길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요. 양 선생님의 공부 그리고 또 귀중한 자리에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앞에 발표했던 딴 선생님의 경우에도 그렇긴 하지만 46쪽에 보면 제가 밑줄을 그었는데 ‘파주 지역에 신자들이 급감한 이유는 신자들의 경제적인 곤궁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신자들의 경제적인 곤궁도 원인이다’ 앞에 보면 딴 요인은 안 나와요. 이걸 보면서 생각하기를 가령 공소가 한 지역에 몇 년 차이를 두고 집중적으로 생기는 것도 그렇고, 없어지는 것도 그렇고 이 요인이 뭘까 하는 사회적으로 의미 부여를 하는 작업이 양 선생님에게는 절실하다고 여겨지는데, 이것은 아마도 1930년대 특히 일제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산업구조가 급격히 개편되거던요.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일제가 그렇게 바꿔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울 지역도 넓어지지만 그 파급 효과 때문에 경기도 북부 지역에도 분명히 곧바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가령 산업구조의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 당시에 교통이 만주를 들어가기 위해서 신작로라는 것이 사실 그 때 만들어지는 말이니까요. 그런 새로운 도로들을 내면서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헌 속에서 보는 상황하고는 사뭇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조금 힘드시겠지만 밝혀주면 이 논문이 더 힘을 가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김수태 : ‘힘들지만’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지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지금 주문하고 있는 건데요. (서종태를 향하여) 간단하게 말씀해주시지요. 

 

서종태 : 예. 노용필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공소가 한 지역에 여러 개가 될 수 있다 말씀하셨는데, 또 다르게도 볼 수 있거든요. 박해가 완화되면서 박해가 심할 때는 신자들이 주로 살기 어려운 산 속 골짜기에서 살아요. 그런데 박해가 완화되면서 신자들이 자꾸 밑으로 내려오거든요. 그럼 공소가 저 산 위에 있던 것이 중턱으로 내려오고 다시 평지로 내려오고 공소가 계속 이동하는 것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방상근 선생님도 그렇고 양 선생님도 그렇고 공소나 교우촌을 언급할 때, 그 교우촌이 평지에 있는지 산간에 있는지 그런 입지적인 조건들을 같이 보면은 그런 변화들도 보이고, 그 시대적인 의미도 더 들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수태 : (차기진을 향해) 선생님도 간단하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차기진 : 다 말씀해 주셨는데요. 저도 뭐 하다 보니까. 공소 있지요. 지금 현재 한 군데, 두 군데 생겼다 세 군데 생겼다 이러시는데, 거의 같은 공소일겁니다. 나중에 정리해 보십시오. 용머리 공소 나중에 없어지잖아요. 없어진 것 아니에요. 딴 데로 이전되는 것이지. 통합 이전되고 수시로 생겨납니다. 지금 거의 같은 맥락인데요. 나중에 생기잖아요? 왜냐하면 통합된 공소가 그게 없어지고 용머리가 다시 부활하는 거에요. 그런 것도 구분하셔야 되고. 저희들은 일단 사회적인 측면의 변화하고는 상당히 틀려요. 연구해 보면은요. 이쪽에 옹기촌 공소 많습니다. 옹기촌 공소 1920~1930년대 다 없어져요. 왜 일제 시대의 산림령 때문에 나무가 없으면 옹기 못 굽잖아요. 그래서 폐지되는 것이에요. 그런 측면도 고려를 해 주셔야 될 것 같아요. 

 

김수태 : 제가 얘기할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좀 더 정치하게 사회적 조건들 고려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장우 선생님에 대해서 최성우 신부님의 토론이 있겠습니다. 토론 요지가 있으니까 참고하십시오. 

 

최성우 : 제가 제일 늦게 내가지고 복사 다 끝났을 것 같아서 급하게 오늘 아침에 제가 복사를 해왔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저만 나눠드리게 됐습니다. 제4 주제 토론 요지라고 쓸까 논평으로 쓸까 고민을 굉장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1면 하단에 보면 ‘하지만’ 하고 패러그러프가 넘어갑니다. 황사영 묘소를 중심으로 경기 북부 지역의 교회 사적에 관한 기초적 검토라는 주제로 황사영 순교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철저하고 비중있는 발표자의 연구 발표에도 불구하고 제 관심이 이 부제이기보다는 본 주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보니까 토론 아니면 논평, 이것과 관련 없이 질문이라는 이름이 제일 어울리겠다 해서 사실은 이름 자체를 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질문을 조금 드리게 되는데요. 

 

첫 번째로는 경기 북부 지역이라는 게 지금은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춘천교구 이렇게 교구가 갈려있다 보니까 지역을 놓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고 사실은 또 서울교구도 포함되어 있지요. 만약에 장단하고, 개풍하고, 개성시를 서울 교구로 본다 하면은 거기는 또 거기입니다. 국토분단 이후에 장단 치명터라든지 개성 성당을 포함해서 경기도 이북 지역의 천주교 신앙 및 활동에 관한 연구는 거의 백지 상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게 어느 교구의 관할 지역인가에 관한 문제를 떠나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온전히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라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지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현재 평양교구사에 대해서는 평양교구 출신의 신부님들을 포함해서 적지 않은 분들의 관심이 지속되고 있고, 미흡하기는 해도 황해도는 황해도 감목 대리가 지정되는 등 관심이 좀 표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기도 이북 지역이라고 하는 개성, 개풍, 장단 지역은 완전히 관심권 밖인 것 같습니다. 아까 제언을 통해서 발표자께서도 말씀하시는 경기 북부 지역을 보면 이 부분들이 빠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들은 경기 북부 측면이라고 만약에 지역을 언급한다하면, 같이 복원을 해서 그 부분도 포천이나 가평까지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 경기도 이북 쪽에 있는 그리고 장단은 사실은 파주시 장단으로 귀속된 지역도 있고, 이북 지역에 있는 장단도 있거든요. 그러므로 그 부분들을 온전하게 같이 보면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첫 번째 질문이었고요. 경기 북부에 관한 부분들이었고요. 

 

두 번째 질문은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은 성지라고 불리는 장소가 한국에 200여 곳이 넘고 제가 들은 얘기로는 앞으로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곳도 150여 곳에 가깝다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대한민국 전체가 성지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요. 조금은 용어들을 적합히 써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의정부교구에 지금 사적지라고 이렇게 이름을 편리하게 분류를 해주셨는데, 적합하게 이쪽 부분들을 성지 내지 성소 아니면 성역 어떤 단어들로 통일하든지. 이 부분들은 성지라는 용어가 어울릴 것 같고, 이쪽 부분들은 교회 사적지, 어떤 부분들은 교회 기념지, 순교자 김대건 신부 생가터 아니면 순교자 김대건 신부 유택지 이런 식으로 국보도 있고, 보물도 있고, 지방 문화재도 있고, 다 똑같이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이니까 성지라고 해서 다 올려놓지는 말고 조금 구분을 해갖고 봤으면 어떻겠냐 하는 것이 두 번째 의견이고요. 이것에 대한 의정부교구 지역에 대한 분류가 어떤지 발표자의 의견이 어떠신지 제가 좀 듣고 싶고요. 

 

세 번째로는 6 · 25 전쟁 이후에 한수 이북에 생긴 성당들은 참 특이합니다. 의정부교구 지역만 보면 의정부 주교좌 성당 내 사적지 성당이라는 것이 있고, 옛날 동두천 성당, 옛날 전곡 성당, 갈곡리 공소 다 석조 건물입니다. 또 여기에 붙어 있었던 50~60년대 성당들 서울교구 성당들 돈암동 성당, 제기동 성당도 똑같은 모양입니다. 석조입니다. 그리고 춘천교구에 속한 옛날 포천 성당, 횡성 성당, 홍천 성당. 하여튼 이 시기에 한수 이북이라는 지역, 교구는 3개 교구로 섞여 있지만, 전부 다 석조 건물입니다. 시대가 험난해서인지는 몰라도 군대의 원조를 받거나 군이 직접 지은 종교 건물들이 대부분이긴 하죠. 어쩌다보니까 동두천 성당이나 전곡 성당은 새 성전 건립한다고 옛날 성당 허물어 버렸고, 이 중에 포천 성당 같은 경우에는 불이 나서 다행이었지만 등록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치지를 않았거든요. 그리고 의정부 주교좌 성당 내 사적지 성당 같은 경우는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등록되어 있는데요. 이런 성당들과 현재 남아 있는 성당만이라도 한국근대문화사적 내지 아니면 교회 사적지로 보호가 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이런 성당들과 형식을 달리하지만, 의정부교구 최초의 성당인 행주 성당 건물 역시 보존을 해야 하는데, 보존 방안으로 제가 생각할 때는 국가 등록문화재나 지방 사적지로 등록하는 방안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불편해하는 분들이 꽤 많은데 그것도 제가 생각할 때는 하나의 좋은 방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어서 질문을 드리게 됐습니다. 

 

이장우 : 감사합니다. 신부님. 세 가지를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야기의 전개상 우선 첫 번째, 세 번째 말씀을 하나로 묶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쉽게 말해서 휴전선 이북 지역의 옛 경기도 지역을 왜 빠뜨렸느냐! 물론 포함시켜야지요. 다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없다 보니까 오늘 이 발표에서는 그리고 또 지도에서 표기하는 데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 미흡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것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입장에서 예를 들어 양주 치명터나 행주 성당을 언급했을 뿐이지, 예를 들어 송도라든지 장단을 무시해서는 아닙니다. 앞으로 변화를 고려하면 당연히 포함시켜서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차근차근 특히 순교자공경위원회가 주도가 되어가지고 구체적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되지 않나 생각입니다. 신부님의 지적에 대해서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밖에 세 번째로 말씀하신 예를 들어서 교회 사적의 사적 지정 문제와 관련해서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선 당장에 걸려 있는 곳이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행주 본당 같은 경우에는 아마 저 정도되면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도 흠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만은 본당 내부의 사정하고 외부의 사정, 현실적인 문제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한시바삐 사적으로 지정되는 것이 앞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말씀하신 쉽게 말을 하자면, 순교자나 성인의 묘나 치명터가 성소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왜 지도나 이런 데서는 사적지로 분류 표기했느냐 하는데, 물론 Hollyland 성지 Hollyplace 보통 성소 또는 성령, 또는 址자를 써서 성지라고, 아마 처음에는 성역이나 성소라는 표현 대신에 성지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순교자 현양 운동 초기에 새남터에 가면 址자를 쓴 성지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한글 전용이 널리 보급되다 보니까 Hollyland로서의 성지와 Hollyplace로서의 성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보니까, 성소 내지 성역으로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지나 성소와는 달리 사적 내지는 사적지라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Hollyland나 Hollyplace의 경우에는 적어도 교회 내의 또는 교계 내의 일정한 동의 과정을 거쳐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생각에서 저로서는 우선 이 곳들을 사적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 자체가 성지가 될 수 없다거나 성역이 될 수 없다는 그런 뜻에서 사적지를 쓴 것이 아니라, 우선 일단계로서 제일 안전하게 사적지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이런 것입니다. 사실 아까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국내의 최소한 우리가 말하는 Hollyland로서의 성지로 지정된 것들 가운데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검정 과정이나 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곳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지가 지금 현재 국내에서는 한국 내에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는지 성지 난립과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교회 내부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어떻게 보면 신앙심, 순교 영성의 남용이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지나 성소를 설정할 때는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친 다음에 해야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와 덧붙여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보통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성지 개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대단히 부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지라는 것은 보존, 관리되는 대상이지, 없는 것을 새롭게 개발하는, 있는 것을 변질시켜서 좀 더 삐까뻔쩍하게 만든다든지 이런 개발은 대단히 교회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 점은 우리가 조심해서 앞으로 의식 자체를 바꿔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까 토론 과정에서도 초기의 사적지나 공소의 위치를 둘러싸고 지명의 고증에 관해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해서 대체로 지역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지역의 신앙 문화도 해당 지역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역사 문화 연구자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교회 사적에 관한 기초적이고도 기본적인 자료를 찾아내고 그것을 고증하는 작업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내부의 인력만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 사회와 긴밀한 유대가 있어야 된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고 그래서 오늘 제가 황사영과 그 묘소를 사례로 선택했던 이유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이곳을 성지로 지정하기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먼저 황사영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또는 신학적 위상이 정확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는 생각 하에서 사례를 연구하였고, 앞으로 의정부 교구 내에서 성지나 성소의 후보지에 관한 작업은 이러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들어야지, 급하게 설정부터 하고 보자 하면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초래하게 되지 않나 그런 우려에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이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 원 선생님 한 말씀 해주시지요. 

 

원재연 : (황사영의 백서 내용은 아무리 변호한다 해도 국가 또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분명한 한계점이 있습니다.)1) 저는 쉬는 시간에 이장우 선생님하고 잠깐 얘기하다가 말았는데 황사영 순교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황사영 순교자가 당시에 있어서는 분명히 체제전복을 꾀했다, 더군다나 외세를 끌어들여서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대역무도한 죄인이고, 반역자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평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이제 조금 평가를 달리할 시점이 오지 않았나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조선 왕조의 체제를 부정해서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왕조 입장에서는 반역자이지만은 그 백성들이 왕조의 지배층처럼 똑같이 생각했겠느냐. 백성들은 그럼 과연 어떻게 생각하였느냐 당시의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조선 왕조의 지배 세력들을 몰아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거죠. 그것은 조선 후기 19세기의 민란과 동학 혁명 이후의 무수한 움직임들로 충분히 증명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은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 될 것이냐. 그것은 국가의 체제나 아니면은 집권 세력이 누구냐 이런 측면에서 그들을 몰아내려 했다 또는 그 편을 들었다 이런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백성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주고 그들의 인권을 찾아주려 했던가. 이런 것들을 오늘날의 시점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런 시점에서 평가를 해야 되지 않을까. 잘못하면 주권과 인권의 충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조선후기에 있어서 체제 전복을 꾀한 사람들은 정감록이나, 동학이나 무수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반역자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황사영의 경우에는 거기에 한 가지 덧붙힌 게 외세를 끌어들여서 외국 근대까지 끌어들여서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려 했다. 여기에 특별히 부과된 중요한 점이 있는데, 이 점도 오늘날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1970년대 유신 시절에 유신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미국의 도움을 청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럼 미국의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역이고 우리나라를 엎어트리는 나쁜 행위인가.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제가 좀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은 황사영에 대한 가치판단이 변화할 시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성당 안에서 오늘 학술 행사를 했는데요. 오늘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최 신부님께서 개회사에서 제일 강조한 부분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의정부교구에서 최 신부님 이외의 다른 신부님들이라든지, 수녀님이라든지, 평신도라든지 많이 많이 나오셔서 앞으로 이런 학술 행사가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1) 괄호 안의 내용은 이후에 발언자가 첨부 요청한 내용. 

 

[교회사 연구 제31집, 200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파일첨부

2,58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