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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종교철학ㅣ사상

인문학 강좌: 순교영성과 천주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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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3 ㅣ No.281

[인문학 강좌] 순교영성과 천주가사



“천주학쟁이들을 모조리 결박하라!”

 

순식간에 포도군사들이 안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나이든 포도군사가 방 가운에 놓인 상을 발로 걷어찼다. 상이 허공에 떴다가 방바닥에 떨어져 와지끈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위에 놓였던 등잔과 나무로 만든 십자고상이 벽에 부딪쳐 튕겨져 나갔다.

 

뒤따른 포도군사들이 육모방망이로 중년 사내들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비명과 신음소리가 뒤엉켰다.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바닥은 금세 피로 흥건해졌다. 평온한 성전이 한 순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피범벅이 된 중년 사내들이 붉은 오랏줄에 묶여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부녀자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북풍에 사시나무 떨듯 했다.

 

(중략)

 

포도군관이 중년 사내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군주도 어버이도 모르는 사악한 난신적자들이다. 또한 타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조정을 뒤집어엎으려 획책한 역적들이다. 대역죄인인 너희들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될 것이다. 할 말이 있는가?”

 

최인호 야고보가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눈이 부어 왼쪽 눈으로만 앞을 볼 수 있었다. 상투마저 풀어져 긴 머리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

 

“우리가 왜 난신적자란 말이오? 천주님께서 태초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어찌 임금 중의 임금이 아니라 할 수 있소? 또한 천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만드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으니 어찌 어버이가 아니란 말이오? 그런 분을 주인으로, 아버지로 공경하는 게 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포도군관이 발을 굴렀다.

 

“저런 괘씸한…….”

 

최인호가 급히 말을 이었다.

 

“또한 우리가 역적이라는 말도 틀렸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서로 친애하며 평온하게 살길 원하오. 그게 왜 나라님의 뜻에 거역하는 일이란 말이오? 나라님은 백성들이 복되게 살길 바라지 않는단 말이오?”

 

- 김문태의 <세 신학생 이야기> 중에서(바오로딸, 2012)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50주년이 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 베이징의 베이탕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전교함으로써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손으로 자발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1790년에 북경에 있던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조상제사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당시의 지도이념이었던 유교와 크게 부딪치게 되었다. 유교식 제사가 우상숭배의 소지가 있다는 교황청의 결정에 따른 일이었다. 결국 1791년에 천주교 신자인 전라도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한 뒤 사촌 권상연과 더불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소위 신해진산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이 폐제분주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유학자들로부터 어버이도 없고 군주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난적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조선말 천주교와 유교의 만남은 종교 · 사상의 이질성에 따른 문화적 충격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천주교는 백여 년간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의 4대 박해를 거치며 만여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던 것이다.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떠난 조상을 살아있을 때처럼 모시고자 하는 제사를 오해함으로써 이 땅의 전통적인 풍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셈이었다. 반면 유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추원보본의 의례를 부인한 천주교를 서양의 사악한 이단으로 규정하고 척결한 셈이었다. 하나의 종교 · 사상이 다른 종교 · 사상을 만나 서로 절충하고자 하는 습합(習合)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야기된 비극이었다. 자신의 이념으로써 상대를 누르고자 하는 압승(壓勝) 형태를 띠었던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794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드린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의금부에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그 뒤 1836년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첫 방인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는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인 1846년에 체포되어 역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였다. 그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가 1849년에 귀국하여 11년간이나 숨어 다니며 사목하였다. 앞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를 제외하고 박해시기에 사목 활동한 유일한 방인사제였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우리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통해 이 땅의 신자들을 위한 토착화된 교리교육을 계획하였다. 그는 교화적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의 말과 글로 천주교 교리를 읊은 일련의 천주가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 땅의 민중에게 널리 알려진 익숙한 시가 장르인 가사에 우리의 말과 글로 된 천주교 교리를 실어 신자들이 더욱 용이하게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의 도리에 눈뜰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천주가사는 오늘날 200여 편 남짓 전해오고 있다. 특히 천주교 박해시기에 창작된 천주가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이 시기의 천주가사에는 외부의 압박에 대응하여 비신자들에 대한 선교를 염두에 두는 한편,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신자들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 천주교의 가르침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사말교리(四末敎理)와 관련한 천주가사는 순교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마지막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하고, 현세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사말교리는 신앙선조들이 용감하게 순교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과 더불어 천주교의 사대교리 중의 하나인 상선벌악을 기반으로 하여 작품화한 것이 바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천당강론>, <지옥강론>이다.

 

이 천주가사들은 현세가 잠시 잠깐 지나가는 풍진세계로서 눈물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하는 곳이므로 현세의 즐거움을 탐할 것이 아니라, 사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선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참 도리를 몰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세속사람들과 달리, 고향인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생각하며 신자답게 살아야 천주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서의 다양한 가르침 중에서 현세보다는 죽음 이후의 내세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당시의 순교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글을 모르는 이들까지도 천주가사를 암송함으로써 진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고, 온갖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모진 수난을 당하고 치명하면서 천주를 증거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가 설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다졌다. 그들의 굳은 믿음과 결연한 의지가 한국 천주교회를 자발적으로 세우고 키웠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가 2014년 말 현재 인구의 10.8%인 5,560,971명이고, 성인의 수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03위이며, 복자의 수가 124위나 된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 비해 오늘날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20.7퍼센트에 불과한 실정이다. 문만 나서면 성당이 있고, 손만 뻗으면 사제를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절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글을 몰라 천주가사를 외우며 천주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였던 신앙선조들의 삶, 그 가르침에 따라 목숨도 초개처럼 버렸던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8천 명이 넘는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 150주년이니 더욱 그러하다.

 

[평신도, 2016년 봄(계간 51호),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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