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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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형제애로 놓는 연대의 길: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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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1785

[경향 돋보기 – 형제애로 놓는 연대의 길]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0-41). 예수님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대접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

 

십자가의 길 제6처의,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를 떠올립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고 싶으십니까? 우리가 착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었으니까 베로니카가 그렇게 했을 거야.’라며 자신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만난 예수님은 사형수였습니다. 로마 군대가 지키고 있었고, 예수님의 동조자들을 색출하려고 원로들과 대사제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로니카는 그런 상황에서 나선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예수님을 ‘아는 체’ 했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대접했던 것입니다.

 

우리라면 베로니카처럼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를 진 사람이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나설 생각조차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예수님임을 알았더라도 선뜻 나설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보시고 아는 체 하실까 봐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을까요? 로마 군대가, 원로들과 대사제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를 볼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진 죄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대접한 베로니카는 그에 합당한 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고 고백한 우도(右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의 모습에서 로마에 대항하여 반역을 꿈꾸다가 결국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처량한 죄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임금님으로 대합니다. 조롱받고 고난당하는 분을 보면서 그분께서 하느님의 영광 속에 오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분을 조롱하고 아무도 주님을 고백하지 않았는데도 그랬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루카 복음 주해」, 153). 그런 그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당연하게 받게 될 의인의 몫이었습니다.

 

사실 “기적을 일으켜 어떤 사람을 당신 제자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진리를 조롱하던 죄수가 당신을 공경하게 하는 더욱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네 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 20,23).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린 것’(마태 25,40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에서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형제애는 결코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만 비롯되지 않고,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새로운 길(사도 9,2 참조)입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26).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전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던 이름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름이었을까요?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사도 9,1-2).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걸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해 줍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2.34).

 

 

교만과 사랑

 

그러나 한마음 한뜻이 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길을 방해하는 감정이 있으니 바로 시기와 질투 그리고 교만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저해하는 주된 요인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또는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욕구, 곧 교만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만이란 존중받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교만과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랑이 서로 다른 두 도시를 세운다고 설명했습니다.

 

“순수한 사랑과 타락한 사랑, 두 가지 사랑이 있답니다. 하나는 공동체적이지만, 다른 하나는 개인적입니다. 하나는 천상 도시를 지향하며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하도록 재촉하지만, 다른 하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동선을 위한 것조차도 자기 자신의 권위 앞에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하나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위하지만, 다른 하나는 이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고자 합니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이웃을 다스리지만, 다른 하나는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웃을 다스립니다”(「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미완성 작품」, 11,15,20).

 

또한, 성령강림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바벨탑을 건설할 때, 인간의 교만은 언어를 시로 다르게 만들었지만, 그리스도의 겸손은 서로 다른 언어들을 일치 안으로 모아들였습니다. 바벨탑이 분열시킨 것을 교회가 다시 일치시켰습니다. 단 하나의 언어에서 여러 언어가 갈라져 나왔다면, ‘고만’이 그런 일을 했음에 놀라지 마십시오. 서로 다른 여러 언어가 단 하나의 언어를 이루었다면, ‘사랑’이 그런 일을 했음에 놀라지 마십시오”(「요한 복음 강해」, 6,10). 바벨탑을 쌓으면서 인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4). 바벨탑의 기초는 ‘이름을 날리는 것’ 곧,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탑을 무너뜨리신 것은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심’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랑의 언어로써 일치된 공동체의 모습을 마태 9,1-9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십니다(2절). 중풍 병자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름도 없이 그냥 ‘사람들’이라고만 언급되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평화의 인사 전에,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의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나의 죄’를 보지 마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시라고 기도합니다. 비록 우리 각자는 나약하고 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통해 너희를 지켜 주신다?”(「규칙서」, 4,6).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보호하심이 흘러 내려오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나를 살려 주는 너, 나를 지켜 주는 너’인 것입니다.

 

‘불감어수 감어인’(不鑑於水 鑑於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춰 보라.”는 뜻입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나의 내면까지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는 내 상처만 보이지만, 사람을 거울삼아 비춰 보면 상대방의 상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모습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새로운 길입니다. 잊고 있었던, 하지만 다시 걸어야 할 오래된 길입니다.

 

반면에 교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형제들과 평등하게 지내기를 싫어합니다. “교만에 빠져 우월함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똑같은 학식, 지위 또는 권력 등을 지닌 이들을 시기합니다.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시기합니다. 그들이 자기와 같은 위치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시기합니다. 자신이 그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미완성 작품」, 9,14,18).

 

 

우리는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 끝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근길의 목적지는 회사이고 등굣길의 목적지는 학교이듯, 우리가 걷는 새로운 길, 곧 신앙의 길은 하늘나라가 목적지입니다. ‘도를 닦다’ 할 때도 ‘길 도(道)’를 씁니다. ‘득도(得道)했다’ 하는 뜻은, 가야 할 길을 다 간 것, 그 길의 끝에 이르러 진리를 깨달은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이웃의 모습에서 나의 부족함을 발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걷겠노라고 다짐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

 

* 김현웅 바오로 –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신부로 착한의견의성모수도원 수련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교부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김현웅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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