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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형제애로 놓는 연대의 길: 모릅니다. 제가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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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1784

[경향 돋보기 – 형제애로 놓는 연대의 길] “모릅니다. 제가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레위 19,18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신명 10,19은 이 사랑을 이방인에게도 실천하라고 명합니다. 신명기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 계명을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느님의 속성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신명 10,17-18 참조). 둘째 이유는 그들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19절).

 

굳이 이런 계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의 체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사랑하며 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일까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지옥을 체험하는 것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미움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원인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형제들 간의 불목을 다룬 이야기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보여 주는 인간의 본질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형제들은 카인과 아벨입니다. 이들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상품 경제체제 아래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무상의 선물로 이해하는 선물 경제와 대조되는 상품 경제에서는 개인의 지위가 그가 획득한 상품에 대한 소유권을 통해 결정됩니다.

 

여기에서 상품이란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나 용역을 말하며, 개인은 자신이 획득한 상품에 대한 소유권을 갖습니다. 이 상품은 결코 모는 이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더 많이 차지하면, 나머지 사람에게 돌아가는 양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따라서 상품 경제체제는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품 경제가 아니라 선물 경제체제를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을 무상으로 주시며, 개인은 필요한 것을 사용하지만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왜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일 만큼 미워했을까요? 카인의 분노의 원인은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신 까닭이었습니다(창세 4,5). 하느님께서는 분노한 그에게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사전 경고를 주셨지만 카인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여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경쟁자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자기 몫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창세 4장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재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불공평해 보이는 일이 많이 일어남을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 따져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이야기하려 한 것 같습니다.

 

왜 카인은 하느님께 직접 자신의 제물을 굽어보시지 않은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요? 그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거나 그런 하느님을 믿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정작 질문을 던져야 할 하느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을 죽이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카인의 선택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 나보다 더 잘난 이들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대신에 질투하고 시기하며, 괴롭히는 못살게 굴지는 않는지요? 그렇게 한다고 우리의 몫이 커질까요?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인생의 결말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를 죽인 카인을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구약성경은 카인이 부인한 그 말을 통하여 인간을 정의합니다. 인간은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곧 우리는 형제의 안위와 무관하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형제가 불행하면, 더군다나 나 때문에 그가 불행하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은 상품을 서로 차지하려 경쟁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만큼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함께 누리는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어떤 형제도 예외 없이 이 선물을 누리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경쟁을 넘어 화해를 이룬 형제들

 

경쟁은 쌍둥이인 야곱과 에사우 사이에서도 반복됩니다. 에사우는 살갗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으며, 자라서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살갗이 매끈하였고(창세 27,11)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수렵과 유목을 하던 환경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에사우가 훨씬 나은 조건을 타고났다고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장자인 에사우는 당시의 상속법에 따라 전 재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불리한 처지였던 야곱은 갖은 꾀와 속임수로 형의 장자권과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도 차지하지만 분노한 형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에 의존하여 열등한 조건을 벗어나려 했던 야곱은 베텔에서 돌봄과 보호를 약속하신 하느님을 뵙고 그 하느님께 의존하여 사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화됩니다. 하란에서의 삶은 외삼촌의 계속되는 속임수로 말미암아 고달팠지만, 그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넉넉해졌습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형을 만나 사죄하며 자신이 속임수로 빼앗았던 축복을 고스란히 되돌려 줍니다.

 

한때 동생을 죽이려고 했던 에사우도 야곱의 염려와는 달리 동생을 우호적으로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그도 또한 하느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33,9). 그들의 결정은 제한된 재화를 서로 차지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의 축복을 풍성히 체험하고 나자 더는 경쟁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 안에서 또 다른 형제들 간의 불목을 발견합니다. 이 불화는 끔찍한 결과를 낳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던 동생 요셉을 질투하였던 형들은 그를 이방인들에게 팔아넘겼고, 아버지에게는 그가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동생 요셉을 잃었고, 상실감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온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형제들은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파라오의 재상이 되어 이집트의 곡물을 관리하던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벤야민과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형들에게 화해의 입맞춤을 합니다.

 

그가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비극 뒤에 감추어진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계획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인식한 이들은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형제애를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알며,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똑같이 다른 이들을 향함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형제애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과 인식 없이는 완성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내가 가진 바와 무관하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면 다른 이들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소중하고 귀하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환대와 차별 사이에서 돌아보는 우리

 

성경은 이런 체험이 없을 때 우리가 동료 인간을 향하여 얼마만큼 적대적이 될 수 있는지도 보여 줍니다. 창세 19장은 환대를 필요로 하는 낯선 나그네를 향한 소돔 사람들의 배척과 적대 행위를 고발합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환대법은 나그네를 위한 기본적인 안전장치로 기능하였습니다.

 

창세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극진히 환대함으로써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찾았던 손님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을 듣고 그 죄악을 확인하려고 내려온 천사들이었습니다.

 

소돔 땅에서 살던 롯은 저녁 때 성문에서 두 나그네를 발견하고 엎드려 절하며 환대를 제의합니다. 광장에서 밤을 지새우려는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누룩 안 든 빵으로 대접을 합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이 보여 주었던 환대와 함께 롯의 환대는 소돔 사람들의 적대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소돔의 남자들은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사방에서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싸고는 롯의 집에 든 손님들을 집단 강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는 나그네를 업신여기고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태도입니다. 나그네가 다만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또 힘없는 소수라는 이유로 다수의 힘으로 내리누르려 합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 성읍은 이 적대 행위로 인하여 유황과 불로 멸망하게 됩니다.

 

창세 19장의 이야기는 피부색과 문화, 종족, 사고방식이나 취향이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특히 그들이 소수일 때 아무 의식 없이 다수의 횡포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 우리의 대답이 카인과는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 김영선 루치아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구약성경을 강의한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김영선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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