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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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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5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이해

 


머리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현대가 겪는 분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속에 뿌리박힌 보다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는 수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불화도 생겨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겪는 분열감이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 속에서 인간은 점차 사랑의 절대적 가치를 선택하려는 의지를 잃어간다. 사랑하겠다는 결심은 점차 식어가고, 사랑하기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실존적인 위기를 자아낸다. 이와같은 정체성의 위기와 더불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일어난 여러 쇄신운동을 통해 많은 이들은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를 돈독히 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를 원하면서 ‘영신식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수도회들은 현대 세계가 당면하는 여러 도전들에 대응해서 창립자의 본래의 정신을 되돌아 보면서, 어떻게 수도생활을 쇄신할 수 있을까하며 ‘공동식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몇가지 도움되는 요소를 다루어 보겠다.

 

 

영신식별의 배경

 

사도적 영성의 원천이며 그 대명사인 이냐시오 영성(혹은 예수회 영성)의 핵심 주제는 영신식별이다. 과거 사백여년 동안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온 [영신수련]에 실려있는 두 묶음의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313-327, 328-336]은 영신식별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어왔다. 그래서 영신식별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이 규범들을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이 그 주된 과제였다. 특별히 [영신수련]에 담긴 ‘선택과정’[169-189]과 더불어 연구되고 적용되면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당면하는 여러가지 도전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각 수도회의 총회나 관구회의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식별하고 결정하는 방법으로 이 규범들이 응용되어 왔다. 이렇게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모든 이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향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영신식별의 실천적 지혜와 기술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어왔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서 많은 이들은 영신식별에 관한 이해를 성 이냐시오의 영신식별의 범주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영신식별의 전통과 의미는 훨씬 깊고 폭넓은 배경을 가진다. 간단히 말해서 영신식별은 악의 영향을 떨쳐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따라 올바른 생활양식을 찾아내고,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찾아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다. 희랍어로 ‘영신식별’(diacrisis pneumaton)이라는 말은 마음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의 원천을 밝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움직임을 따라가도록 결정하는 과정을 뜻한다. 희랍어 diacrisis 와 라틴어 discernere 혹은 discretio는 원래 ‘구분하다’, ‘가르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영신식별은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르침에 합당한 어떤 구체적인 행동양식을 찾고 선택하는 결정과정을 의미한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도 ‘식별’이라는 단어는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에서 사용되고, ‘선택’은 이 식별규범들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냐시오가 작성한 예수회의 [회헌]에서 영신식별의 의미와 방법은 더 폭넓게 적용되고 응용된다. 

 

영신식별의 의미, 과정, 실천적인 적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개별적인 차원이거나 공동체의 차원이거나 영신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기에 그 근본 배경이 기도임에는 틀림없고, 기도와 더불어 진행되는 식별이야말로 참다운 영신식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기도와 삶을 구분해서 이해한다. 어떤 문제에 관해 특별히 기도하고 식별해보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에 옮길 때는 식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린다.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영혼에게 밝혀 주시는 길이 인간 이성의 현명한 판단과는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영신식별이란 결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신식별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숙고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찾아서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찾으려는 근본적 열망이 없이, 그분의 현존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구현하려는 의지가 없이, 영신식별을 운운한다면 그것은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기도가 일상 중에 익숙해진 신앙행위라면, 영신식별 역시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신앙행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신식별은 매우 단순한 작업일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일치를 기도로써 더욱 심화시키고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 일치를 구현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일 수도 있다. 영신식별은 인내심, 꾸준함, 그리고 기꺼이 시간과 힘을 바치겠다는 관대한 마음을 요구한다. 필요할 때 수도꼭지를 열거나 혹은 필요 없을 때 잠그는 그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현존을 찾으려는 참을성있는 신앙심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뜻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의도, 혹은 어떤 뜻을 지니고 계실까? 물론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도 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고, 제자들에게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하고 기도하라고 일러 주셨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는 두 가지 범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해해 왔다.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고, 개별적인 하느님의 뜻은 물론 한 개인에게나 한 공동체에 국한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어떠한 뜻을 지니고 계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모두가 그 본연의 모습에 맞갖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 인간 본연의 모습에 합당한가를 살펴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 이성을 잘 활용해야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면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교 안?밖의 여러 합법적 권위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도록 원하신다. 요약하면 하느님의 보편적인 뜻은 인간 이성, 신적 계시, 그리고 정당하게 구성된 합법적 권위을 통해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을 다루면서 관심을 두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보편적인 뜻을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개개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개별적인 뜻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부르심’ 혹은 ‘성소’라는 단어가 개별적인 하느님의 뜻과 연관되어 사용되어 왔다. 왜 하느님께서는 누구는 사제로, 누구는 수도자로, 누구는 결혼생활로, 또 누구는 독신생활로 부르시는가?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요구하신 이야기, 부자 청년을 부르시는 이야기, 등 다양한 복음서의 증언들을 토대로 전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즉, 하느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과는 달리 특수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몇몇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관점에서 ‘성소’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소’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한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48) 하시었다. 사실 주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지력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마르 12,30 참조),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였음같이 서로 사랑하도록(요한 13,34; 15,12 참조) 내적으로 움직여 주실 성신을 그들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  라서 신분과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 여러 생활 양식과 여러 직책의 모든 사람들이 닦고 있는 성덕은 동일한 것이니, 그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성부의 음성을 따르며 성신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흠숭하고,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수도생활이나 사제직, 결혼생활이나 독신생활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부르심이기에 그 자체로서 거룩하다. 인간 모두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각 개인이 받은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개개인이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도록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방법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부르심을 거부했다고해서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다고해서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나라에서 추방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제시하신 소명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각 사람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기에, 바로 그 길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가장 커다란 유익이 되는 길이며, 개인적인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거나 불행해지거나 좌절된 삶을 살아간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하느님의 뜻은 단지 개개인의 일반적인 부르심 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삶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아주 구체적인 그 무엇이 있는가? 이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필자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가 구체적인 선택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어떤 중요한 기여를 하도록 이끄신다고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애써 일하는 것을 통해서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한다. 성령께서는 각자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해주고 이끌어 주도록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셨다. 식별하고 선택해야하는 범주가 때로는 사도직 자체를 바꾸는 것과 같은 중대한 결정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이미 주어진 사도직에서 세세한 몇 가지를 바꾸는 작은 결정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직이나 전문 분야를 바꾸는 중요한 경우에서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가? 아니면 기존의 사도직과 전문 분야에서 몇 가지를 바꾸는 작은 결정들에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가? 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그 경우가 어떠한 경우이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봉사에 의미를 지니는 그만큼 사도직과 전문 분야에서 직접적으로 하느님께서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영신식별과 회심의 내적 체험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의미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보다 더 밀접히 활동하실 수 있도록 어떤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어떤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과정에서 여러 방해 요소들이 등장한다. 이 방해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향한 개방성이 부족하거나, 이 뜻을 향해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가는 내적 체험에 대한 인식 능력이 부족할 때 생긴다. 우리는 선택된 결정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썼음을 상기한다면 위안이 되기도 할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는 개개인이 자신의 내적 체험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성찰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실천적인 지혜로서 영신식별의 기술은 회심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즉 각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들을 이해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의도를 알게 된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내면의 체험들)을 관찰하면서 영혼의 내부 현상을 배웠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 세계에 관심하도록 자극시킨 주 요인은 그 모든 움직임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호기심이었다. 현실적인 적응력과 박동감이 넘치는 이냐시오 영성의 한 가지 특징은 지성적으로 이해된 내부세계에 대한 확신이 모든 영적 성숙의 기반이 된다는 점이다. 이 지성적 확신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표현되는데, 첫째는 지적 호기심이고, 둘째는 이 지적 호기심이 충족될 때 형성되는 진리를 향한 단호한 투신이다. 즉 영혼의 내부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영혼의 여러 현상에 대해 이해하도록 촉구하고, 지성적으로 이해할 때 얻는 확신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영신수련]은 엄밀한 의미에서 회심을 위한 체계적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방법’이란 단지 어떤 기계나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넓은 의미에서 “영신수련”의 체험은 피정자를 하느님을 향해 회심하도록 유도하고, 더 나아가서 이 회심의 체험이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하나의 통합된 과정으로 형성되도록 이끈다. 회심이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바꾸는 결단을 의미하지만, 요즘의 심리학과 종교 교육학의 도움으로 이 회심의 내적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회심의 과정을 한 개인의 신앙 생활의 성숙 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좀더 세세한 반응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학과 회심의 관계를 심도있게 밝힌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의 분석에 의하면 회심의 과정은 네 차원으로 구분해서 살펴 볼 수있다. 지성적 차원의 회심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하느님과 연관해서 이해하게 되는 지성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윤리적 차원의 회심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행동하게 되는 윤리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감성적 차원의 회심은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이 움직여서 이에 응답하면서 이웃을 위해 삶을 영위하려는 행동양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회심은 하느님의 빛에 따라 자신과 이웃들, 그리고 하느님을 진정 존경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는 신앙양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회심은 어느 한 차원, 혹은 두 가지 차원, 혹은 네 차원 모두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이 회심이 단번에 급작스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회심의 본질과 과정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해왔지만, 최근들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심의 공동체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회심의 사회적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뮐러(J.J. Mueller)는 전?후?내?외의 네 방향으로 회심의 사회적 차원을 묘사한다. 회심의 사회적 차원은 과거의 전통을 의식하면서(후), 이에 담긴 가치들을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 다시 적용해 볼 때(전), 우리 자신에게 요구되는 변화(내부) 뿐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요구되는 변화(외부)도 의식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회심이란 삶의 여정에서 단 한 번 결정적으로 일어나는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도전하시면서, 우리가 진정 마음을 바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점차로 더 깊어지고, 높아지거나, 더 풍부해지는 과정이다. [영신수련]이 이끌어 가는 회심의 과정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존재와 삶의 다양한 차원들 사이에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원추꼴의 나선 운동과 같은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움직임이란 마음 속에 일어나는 내적 충동들이 갖는 방향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영신식별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에 관심한다. 기도와 마음의 정화, 그리고 영적지도의 도움으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 중에서 어떤 것이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움직임인가를 따져보면서 이 움직임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지적인 호기심은 내부의 느낌에 관심을 두고 관찰하게 한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성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부의 느낌과 떠오르는 생각들이 단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즉, 내부의 움직임들에 대한 현실감이 없다. 둘째, 자신에게 불안을 일으키는 느낌들과 생각들을 관찰하며,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응해보면서 내적 행동 양식을 배운다. 셋째, 이렇게 내부의 느낌과 생각들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내부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남을 발견한다. 넷째, 이 때 자신의 내부 세계의 움직임들(위안과 불안의 변화)을 현실로써 인식하게 된다. 다섯째, 이러한 내부 세계의 여러 움직임들에 대한 현실감은 그 움직임들의 내용 그 너머에서 이러한 움직임들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원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한다. 여섯째, 이 다양한 원천들 사이의 대립된 양상을 파악한다. 일곱째, 인간이 지닌 다양한 열망들과 생각들의 역할을 파악한다. 즉 우리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미치는 영향들을 파악한다. 예를 들어, 서로 상반된 두 가지의 열망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구체적 행동 양식에 영향을 끼친다. 여덟째, 이러한 파악과 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적 경험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역으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올바른 열망을 지녀야하는가를 알게된다. 아홉째, 모든 실천적 결심과 현실감의 핵심적 경험은 바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안, 혹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적 깨달음의 경험이다. 마지막으로 열째, 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안’이야말로 실천적 결정에 대해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확인이다.

 

 

식별의 세 가지 단계

 

이제 마지막으로, 위의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기본 구조를 세 단계로 나누어 제시해 보겠다. 하느님으로 부터 빛을 구하는 첫째 단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성부로부터 파견되셔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빛에 비추어 식별하고자 하는 주제를 살펴보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방향을 감지하는 단계이다. 영신식별이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 안에서 진행되기 위해서 기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개개인의 사리사욕, 편견, 내적 불안에 의해 형성되는 고정 관념 등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감겨져 있던 영적 눈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뜨이기 위해서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개방되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반자로서 사도직에 헌신하기 위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도 기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강조하는 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써 이제 식별하고 결정하려는 문제에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신적 계시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뜻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하느님 말씀의 빛에 비추어 수집한 여러 정보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고 살펴볼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올바른 식별을 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체험하는 신앙 체험은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비추시는 생명의 말씀이심을 인식하게 한다. 즉,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이 새롭게 조명되도록 성령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이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고 행하신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뜻을 찾고 있는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통해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는 빛은 자신의 깊숙한 내부에 비치는 빛으로서 내면 속에 숨겨진 여러 동기들을 환히 비추셔서 여러 다양한 생각들과 느낌들의 움직이는 방향을 들추어 주시도록 구하는 빛이다. 

 

둘째 단계는 식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는 단계로서, 수집된 정보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눈으로 주의깊게 고려해 보며, 동시에 관계된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문제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식별의 마지막 단계에서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중에 성찰하면서 필요한 정보들과 지식, 그리고 상황의 징표들을 올바로 읽어야 한다. 특별히 공동식별인 경우에는 이 정보들이 합당한 경로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어야 한다. 즉 당면한 문제에 개입된 상황과 인물 모두에 대한 정보들이 충분히 나누어져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과 관대함이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성실하고 솔직한 대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셋째는 결정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도록 구하는 단계이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여러 확인들을 찾아보는 것은 식별의 마지막 단계에서 뿐아니라 전체 과정이 진행되는 각 단계에서도 필요하다. 각 개인이 영적위안을 체험하거나, 공동체 전체에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내적 평화 등은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확인들이다. 식별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정과 함께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해도 다시 식별해야할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결정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목, 1993년 5월호,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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