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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9) 우석 장발 루도비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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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30 ㅣ No.341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9) 우석 장발(루도비코) 화백


20세기 한국 가톨릭 미술 빛낸 '선구자'

 

 

- 한국 가톨릭미술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꼽히는 장발 전 서울대 미대 학장.

 

 

우석(雨石) 장발(루도비코) 화백. 한국 성화사에서 그는 개척자와도 같은 인물이다.

 

1797년 김건순(요사팟)의 전교로 입교한 이희영(루카, 1756~1801)이 성화와 상본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의 성화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장발 화백은 한국 교회미술의 선구자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완당(阮堂, 김정희)이 있어 조선의 19세기가 빛났다'면, 똑같이 '우석이 있어 20세기 한국 가톨릭 미술이 빛났다'. 그는 한국의 첫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에게서 서양화를 배워 한국 교회미술의 선구적 인물이 됐고, 해방과 건국기 서울대를 통해 전해진 그의 미술론은 한국 교회미술은 물론 한국미술에서도 빛나는 시금석이 됐다.

 

그렇지만 5ㆍ16쿠데타로 형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총리가 실각하는 정치적 파란을 겪으며 1964년 사실상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우석, 그가 걸어간 예술의 여정으로 들어가본다.

 

 

1923년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

 

초기 한국 서양화단에서 손꼽히는 작가이자 교회미술의 선구자인 장발 화백은 190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대째 가톨릭 신자였던 장기빈과 황 루치아 사이 3남 4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었다. 장면 전 총리가 그의 형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항공공학계의 세계적 석학으로 「유동의 박리(flow separation)」를 저술한 장극 박사는 동생이었다.

 

처음부터 그림에 뜻을 둔 장발 화백은 휘문고보에 다니면서 고희동을 만나 서양화를 접한다. 그에게서 유화와 데생을 배우면서 화가로서 기반을 다진 그는 1920년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 기초를 거듭 다졌다. 중도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1922년 컬럼비아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유학생활은 동시에 재속 프란치스코회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1921년 8월 한국인 최초로 입회하고 이듬해 9월 서약함으로써 첫 재속 프란치스칸이 된 형 장면 전 총리를 따라 그는 1923년 뉴욕 요한 세례자성당에서 서약하고 재속 프란치스칸이 됐다. 그의 삶을 관통한 정신의 초석은 바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이었던 셈이다.

 

1958년 제4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한 장발 화백이 서울대 미대 교수들과 졸업생들,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25년 귀국 후 그는 한국의 미술교육 내지 미술행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다. 또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전과 작품생활, 미술교육에 전념함으로써 가톨릭 미술의 토대를 다졌으며, 해방 이후엔 여러 작가와 함께 첫 성미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때 그는 친일미술단체로 분류되는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평의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다른 친일화가에 비해 적극적으로 일제를 미화하는 작품을 남겼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참여치 않았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서화협회전(약칭 협전)에만 출품했다. 또 자주적 서양화운동을 내세운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해 그룹 활동을 했다.

 

해방 뒤에는 한국미술가협회 등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서구 미술에 대한 이해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6년에는 서울대 미술대를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취임해 1961년까지 재직하며 대한민국 미술계와 미술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후학들에게 실기뿐 아니라 미술이론을 가르침으로써 근대 미술교육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혜화동성당 설계, 조각 총지휘

 

그의 화풍은 독일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수도원풍 미술과 상징주의 화가 그룹인 나비파(Nabis)의 영향을 받은 구상적 표현 시기(1920~40년대)→서체적 추상표현주의 시기(1964년 도미 이후~1970년대)→독창적 성화 세계(1980년대 이후~2001년)라는 흐름을 보인다.

 

그가 19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유화 반신상 '김대건 신부'(서울대교구 소장)는 현존하는 국내 첫 성화다. 서울 명동성당 제대 뒤에 그려진 유명한 벽화 '14사도상'(1925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주위 요청으로 그렸다는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도 그렸다.

 

그는 여러 성당에서 거듭해 성화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때 그린 작품 중 평양교구 신의주성당 벽화 '성령강림'(1928년)과 비현본당 '예수성심상'(1935년), 서울 가르멜수도원 제단화 '예수탄생예고(성모영보)'(1945년) 등이 그의 대표적 역작이지만 광복 뒤 분단과 북녘 공산화, 6ㆍ25전쟁의 참화로 '예수탄생예고'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 장발 작 '칠락의 묵주기도 성모', 88×128㎝, 유화, 1963년.

 

 

이외에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평양 서포 수도원에 있던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1940년께), 서울 가르멜수도원 성당 '성모대관'(1945년)도 있지만 역시 기록뿐이다. 1941년 매우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소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서울 가르멜수녀원에 보존돼 있다.

 

그는 1960년 서울 혜화동성당 신축 공사 때에도 제자들을 참여시켜 설계와 조각 제작 등을 총지휘했다. 건축미가 빼어난 혜화동성당은 서양 선교사들 도움 없이 한국인 건축가와 미술가 손으로 지은 첫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100수 기념 전시회 앞두고 선종

 

최근엔 그의 유화 '칠락의 묵주기도 성모'(1963년 작)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우석의 화풍상 구상 표현의 마지막 시기에 제작한 이 작품은 완숙도가 뛰어난 데다 구성과 형태, 토착화 등 여러 측면에서 화단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국교회에 '토착화'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그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한복으로 갈아입혔을 뿐 아니라 전통 채색기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이콘 기법까지 도입함으로써 한국적 성화의 길을 제시했다.

 

이 작품은 특히 예수 잉태부터 승천에 이르는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을 되새기는 프란치스칸 고유의 묵주기도를 표현했다. 칠락 묵주기도는 1442년 성모께서 작은 형제회 한 수련자에게 성모로서 누린 일곱 가지 기쁨을 일러주고 "성모송으로 화관을 엮으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장 화백은 하늘에 올라 천상 모후의 면류관을 쓴 성모 마리아(제7락)를 가운데에 두고 예수 잉태, 엘리사벳 방문, 출산, 부활한 예수를 만남 등 나머지 기쁨의 순간을 좌우 양측에 형상화했다. 1965년 서울 정동 작은 형제회 수도원 축복식 때 봉헌된 이 작품은 줄곧 수도원 봉쇄구역 계단 벽에 걸려있다가 지금은 복원작업을 거쳐 수도회 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말년엔 미국에 머물며 동양적 정서가 강하게 풍기는 비구상 회화에 전념한 그는 1976년 서울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1984년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가톨릭미술 특별전에 출품했고, 그해 5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에는 1925년 7월 순교복자 79위 시복식에 참례한 생존자로서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됐고, 교내에 그의 흉상이 설치됐다. 서울대 미대 갤러리 '우석홀'은 그의 호를 딴 것이다. 2001년 5월 뉴욕 한국문화원 갤러리에서 100수 기념 전시회를 준비하던 그는 전시를 불과 한달 앞두고 4월 8일 피츠버그 자택에서 숙환으로 선종, 하느님 품에 안겼다.

 

[평화신문, 2011년 4월 24일,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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