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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형제애로 놓는 연대의 길: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형제애의 의미와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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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1783

[경향 돋보기 – 형제애로 놓는 연대의 길]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형제애의 의미와 필요성

 

 

프란치스코 교황과 형제애

 

산 에지디오(Sant’Egidio) 공동체의 창설자인 안드레아 리카르디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간 보여 왔던 교황직의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이가 형제이기를 원합니다.” 사실 ‘형제’ 또는 ‘형제애’라는 용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 안에 늘 자리 잡은 핵심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한 뒤 맞은 첫 세계 평화의 날에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이기에, 형제애를 인간 삶의 본질적인 특성이라 규정한다.

 

더불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형제자매임을 선포한다. 말하자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각각 똑같은 본성과 존엄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서로를 ‘적이나 경쟁 상대’가 아니라, 상호 간에 돌보아 주고 끌어안아 주는 ‘형제자매’라는 것이다(2014.1.1.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참조).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형제애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벽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다시 세우면서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형제적 관계의 삶을 열어 주고, 초대해 주셨다. 교황은 형제애를 우리가 삶을 누리는 새로운 방식이요, 타자와의 사귐과 친교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는 영혼으로 본다(2018.4.2. 부활 대축일 삼종 훈화 참조).

 

물론 이 형제애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강요된 획일성이나 타협하는 혼합주의와는 거리가 멀다(2019 2.1. 아부다비 담화 참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형제애 실천 대상은 다만 가톨릭 교회 구성원만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타 종교인과 무신론자 등 전 인류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범위 또한 종교적인 영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위기나 난민 등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까지 열려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말처럼 ‘만남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가톨릭 교회 울타리는 넘어서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이미 여러 차례 만나 대화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방 정교회 지도자들과의 만남은 늘 형제적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교황은 한 인터뷰에서 정교회 지도자들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에게 그들 모두는 형제들입니다”(2016.11.17. 이탈리아의 바티칸 전문 언론인 스테파니아 팔라스카와의 인터뷰 중에서). 특히나 약 천 년 만에 열렸던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역사적 만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키릴 총대주교에게 건넨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마침내! 형제여, 우리는 형제입니다”(2016.11.30., 담화).

 

단연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그 어떤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혼자가 될 수 없으며, 모두가 그분 안에서 형제자매였다. 그러니 그는 강한 확신 속에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입니다”(2019.2.20. 수요 일반알현).

 

 

왜 형제애를 말하는가

 

“교황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교회 위에 있을 수도 없다. 그는 세례받은 이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 안에 존재한다”(2015.10.17.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사목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그는 교회가 조직적이고 서열이 분명한 피라미드식 형태의 구조나 일부 소수에 움직여지는, 배타적인 엘리트 모델을 단호히 거부한다.

 

오히려 비록 직무와 역할은 다르겠지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모든 이가 형제애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를 원한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신앙생활은 서로 간에 사랑과 어려움을 나누면서 신앙을 실천해 나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서로의 약한 믿음을 북돋아 줌으로써 영적 성장과 성숙의 길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64항;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1항 참조).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문헌 곳곳에서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인 삶의 형태이자 형제애의 원수인 개인주의를 극복하도록 초대한다(「복음의 기쁨」, 87항; 「찬미받으소서」, 208항;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63-164항). 자기 자신 안에 고립되어 갇혀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이 이기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는 무너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고통과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무감각해짐으로써 결국 인류 전체에게 큰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 모든 문제 해결의 핵심 열쇠로 형제애를 제시하며 이렇게 선포한다. “형제애는 우리 이웃의 거룩한 위대함을 볼 줄 알고,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줄 알며, …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할 줄 압니다.”(「복음의 기쁨」, 92항).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이의 행복을 추구”(「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63항)할 줄 아는 형제애만이 지금 우리가 짊어진 크고 작은 어려움을 해결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류를 향해 계속해서 더 강한 어조로 형제애를 호소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 시대에 형제애가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고, 동시에 그만큼 우리 사회에 형제애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말해 준다. 그 때문에 교황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의 근본 원인을 형제애 결여로 보고, ‘이미’ 모든 이 안에 담겨 있지만, ‘아직’ 많은 이 안에서 잠자는 형제애 정신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일깨우고자 한다.

 

 

형제애, 코로나19 이후 걸어야 할 길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되었다가 약 6개월 만에 다시 열린 수요 일반 알현에서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우리가 지향하고,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은 ‘연대성’임을 확언한다. 이 중대한 위기의 극복은 혼자의 힘으로 결코 이루어 낼 수 없으며, 오직 모두가 함께하는 연대의 길을 추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2020.9.2. 수요 일반 알현 참조).

 

물론 이 연대성은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 행위” 그 이상을 넘어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가짐”(「복음의 기쁨」, 188항)을 뜻한다.

 

특별히 교황은 코로나19 사태로 말미암아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삶을 위협받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커다란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놓인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지원이 먼지 모이기를 촉구한다(2020.8.19, 수요 일반 알현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날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연대를 표하고, 온 인류에게 형제애의 길을 걸어갈 것을 선포하는 이유는 유명하다.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어 주셨던 주님은 일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당신 자비와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기를”(「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77항) 원하시며, 무엇보다 형제애의 실천이 “가장 멀리 있고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봉사”(2014.1.1. 세계 평화의 날 담화)로 이어지기를 비라시기 때문이다.

 

이 점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혀끝이 아니라 몸소 이미 여러 차례 보여 주었다. 그는 교황 착좌 이후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람페두사섬을 찾아가 전 세계를 향해 이민자들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며, 이웃의 고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또 2014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그 당시 민감한 국내 정치 상황에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고, 그들과 연대한다는 의미로 노란 리본을 제의에 달고 미사를 집전했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2014.8.18. 기내 인터뷰)라는 형제애의 기본 정신 때문이다.

 

작금의 힘겨운 상황을 잘 대처하고 이겨 내려면 뉴 노멀 시대에 맞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사태로 확인된 것 가운데 하나는 이제 고통은 어느 한 개인이나 일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인류가 공동 운명체로서 함께 겪고, 풀어내야 할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적으로 여겼던 이들이 ‘내일’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 온 세계가 전례 없는 참혹한 시기를 맞고 있는 이 상황에서 형제애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절박하고도 애절한 호소에 우리 모두의 응답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이 고통과 비극의 시기에 우리를 하나로 결합하는 형제애 안에서 하나 된 형제들입니다”(2020.5.14. 산타 마르타의 집 강론). “형제애를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67항).

 

* 윤태종 토마스 – 전주교구 팔봉성당 주임신부.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에서 교의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윤태종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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