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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하느님, 자연, 인간: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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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3 ㅣ No.1274

[경향 돋보기 - 하느님, 자연, 인간]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마 전 텔레비전에서 환경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알려져 있으며 환경다큐멘터리 진행자이자 박물학자인 데이비드 에튼버러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내용도 더없이 좋았지만 그중 에튼버러의 질문에 대해 오바마가 밝힌 입장이 마음에 와 닿았다. 환경이 파괴된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놓고 10년쯤 지나니까 다시 자연이 회복되더라는 것이다. 자연의 회복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뜻이겠다. 오바마는 국가 정책 입안자로서 거시적 차원에서 환경문제를 바라보았고, 환경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힘이나 몇몇 단체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을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음을 알려주었다.

환경문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그렇게 얻은 메시지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제 소개하려는 두 편의 영화는 언뜻 환경영화처럼 보이지 않지만, 영화에 함축된 의미를 꼼꼼히 챙겨보면 환경문제에 관해 소중한 암시를 얻어낼 수 있다.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마루 밑 아리에티’(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애니메이션, 일본, 2010년, 94분)는 2010년 여름 일본에서 대단한 흥행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단순히 상상력으로 건설한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기억에 남을만한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의 깊이가 더해졌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영국 출신의 작가 메리 노튼의 소설 The Borrowers(빌리는 이들)를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도 심각한 주제를 찾아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향으로 재탄생해 생각할 거리를 듬뿍 전달받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자체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소인(小人)족의 생활에 대한 세부적 설명이라든가, 그들이 인간세계로 넘나들 때 겪는 규모 차이의 묘사라든가, 첫 장면에서 끔찍할 정도로 광포했던 고양이가 아리에티의 다정한 길잡이로 바뀌는 설정 등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표현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역시 하야오의 혼이 깃든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그의 조수 역할을 했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하다는데 앞으로 기억해 둘만한 이름이다.

어린이들은 곧잘 상상의 세계에 빠져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다. 이를테면 ‘마루 밑에 무엇인가 작은 게 살고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발전시키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마루 밑에서 뛰어다니는 작은 사람들을 실제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어른들은 ‘난감한 녀석!’이라며 고개를 흔들 테고, 어떤 어른들은 ‘네가 본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어느 쪽일지 모르겠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훌륭한 우화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실벵 쇼메 감독, 극영화 · 코미디, 프랑스, 2013년, 107분)도 ‘마루 밑 아리에티’에 못지않은 특이한 영화, 곧 아주 별난 프랑스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 묘사와 변화무쌍한 화면들의 이어붙임이 눈과 귀를 얼마나 즐겁게 만드는지 모른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프루스트는 그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과연 우리의 기억은 우리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만들 수 있는가? 영화에 따르면,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독약이나 진정제를 먹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주인공 폴(귀욤 고믹스)은 한심한 남자다. 서른세 살의 노총각에 이모들과 같은 집에 살고,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려는 목적에 열심히 연습하지만 준우승만 한 두 차례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이모들의 댄스 교실에서 재미없는 반주나 해주는 처지다. 그의 삶 가운데 가장 대책 없는 부분은 입을 도통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 때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그의 말문을 막아버린 까닭이다.

그렇다면 폴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는 게 과연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심리학자들은 괜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내다가 자칫 상처를 건드려 심각한 외상 장애를 입게 될지 걱정한다. 또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모들의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벵 쇼메 감독은 모든 우려를 거슬러 단언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억을 회복해야 하고, 왜 오늘의 내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만일 겁이 나서 지금 이대로 덮어두고 산다면 오늘의 나는 공허한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 환경영화인가

앞에서 두 영화가 환경영화의 범주에 드는지 선뜻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가 지닌 함축성을 간과해서 나온 말일 뿐이다. 실제로 ‘마루 밑 아리에티’의 경우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에서 인간들 사이에 숨어사는 소인들의 생활방식을 아기자기한 만화언어로 보여준다는 면을 강조했다. 그리고 영국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사실도 곁다리로 알려주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폴의 인생을 프루스트의 사상으로 풀어낸 것도 가상하고, 인간심리의 원초적인 차원을 건드린 것도 상업영화로는 쉽지 않았을 텐데 아주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다는 점을 높이 샀다. 또한 두 영화 모두 환경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처음에 아리에티가 정원에서 월계수 잎사귀를 따다가 자기 방에 가져오는 장면이 나온다. 아리에티의 방은 꽃과 잎사귀들이 이미 들어차 있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정원을 유지하고 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프루스트 부인(앤르니)이 자신의 아파트에 꾸며놓은 정원과 흡사한 설정이다. 그곳 개인의 은밀한 정원에서 이 두 사람은 온갖 필수품을 공급받는다. 아리에티의 엄마는 월계수 잎사귀 한 장을 손에 들고 방을 나가며 이 정도면 일 년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기까지 한다. 자연의 생산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다음으로 아리에티와 프루스트는 자연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프루스트 부인은 아파트의 개인정원에서 온갖 약초를 제조하여 사람들의 치료에 사용한다, 최소한의 대가를 받으면서. 말하자면, 그녀의 안식처이자 연구실인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원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연이 제공하는 치유를 맛보게 해준다. 또한 얼마나 은밀하게 정원을 관리했던지 아파트 관리인은 부인이 죽은 뒤 집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정도였다.

아리에티 가족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물건을 빌린다(사실 훔친다는 표현이 맞다). 하지만 꼭 필요한 만큼만 빌린다. 그 과정은 언제나 아슬아슬해 일촉즉발의 위기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들 소인족이 깊숙이 숨어있으면서 물건을 빌리는 이유는 바로 인간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도시는 소인족이 사는 곳을 진즉에 빼앗아 그들을 한적한 시골로 내몰고, 이제는 시골까지 찾아와 인간 문명을 퍼뜨린다. 소인족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작은 정원뿐인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참혹한 현실은 아리에티와 심장이 약한 소년 쇼우의 만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소년은 공기가 오염되고 환경이 열악한 도시에서 살지 못하고 시골에 요양을 와 있다. 채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소녀와 며칠 뒤에 있을 심장병 수술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14세 소년이 풀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달려들려는 고양이를 열심히 제지하는 중이다.

소년은 소녀에게 예언한다.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수많은 존재가 이미 멸종되었고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는 67억의 인간은 마침내 ‘소인’ 종족마저 멸망시키고 말 것이다. 소년의 말대로 몇 명 남지 않은 소인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의 당연한 예측을 온몸으로 항변한다, 자기 종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또한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라도 쓸 것이라고, 그러니 소년이 반드시 소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다시 자연이 되려면

이 장면이 던져주는 메시지에 필자는 완전히 정신을 뺏기고 말았다. 67억에 달하는 인간은 그저 자신들이 쾌적하게 살려고 자연을 유린하고 파괴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에게 겨누었던 칼은 결국 방향을 돌려 인간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의 내부 저 아래쪽 마루 밑에 살고 있는 소녀 아리에티를 겨냥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인족의 멸종은 곧 인간 자신의 멸종인 셈이다. 만일 인간 소년 쇼우가 소인 소녀 아리에티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인간도 스스로 파괴되고 말 것이다.

쇼우는 아리에티의 가족을 돌보아 주었고, 그들은 무사히 위험에서 빠져나간다. 아리에티는 쇼우와 작별하면서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며 담장 위에 올라서서 자기 몸보다 더 큰 쇼우의 검지를 껴안는다. 그리고 아리에티가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남기며 담장 밑으로 훌쩍 뛰어내릴 때 눈물이 공중으로 잠시 흩날린다.

실개천에 주전자를 타고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는 아리에티의 가족 옆으로 큰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이를 두고 북극 바다 한복판에서 향유고래를 만나는 감동에 비길 수 있을까?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음.” 쇼우와 아리에티의 만남처럼 폴과 프루스트 부인의 만남도 우연히 이루어진다. 어느 날인가 폴의 책상에 쪽지가 놓여있다. 말이 좋아 책상이지 죽은 엄마 사진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모빌 아래 어린 시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괴상한 책상이다. 뒤집어 말해 폴의 책상은 무엇인가에 가로 막혀있던 기억을 되살리고자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해 보는 공간인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은 매 번 헛수고에 머물렀지만 말이다.

폴의 엄마는 과연 어디 있을까? 대답은 간단한데, 폴의 저 깊은 기억 속 어딘가에 어머니가 숨어있었다. 사실 그곳에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있고 심지어 비극적인 부모의 죽음까지 들어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곳까지 찾아가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폐 청년 폴에게 마담 프루스트의 등장은 축복이다. 그녀가 자신의 정원에서 딴 약초로 특별하게 제조한 차를 한 잔 얻어 마신 뒤 폴은 과거로 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매번 부인을 찾아갈 때마다 폴은 점점 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가까워지고 마침내 한 장면을 기억해 낸다. 거대한 그랜드 캐니언 벽화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더니 온 인상을 찌푸리며 폴에게 큰소리를 내질렀다. 당시 폴은 겨우 유모차에 실려 있던 아기 신세였는데 말이다. 그 잔인했던 기억 이후, 폴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프루스트 부인은 아파트에 불법으로 정원을 가꾸며 사람들에게 정체불명의 약초를 제공해 생계를 유지하는 자유분방한 여인이다. 어느 날 시내 공원 한복판에 심긴 나무 한 그루를 지키려고 그 나무에 자신을 묶기까지 하는데, 그녀가 얼마나 자연 친화적인 사람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무 한 그루를 지키는 게 곧 지구를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목숨을 건 것이다. 부인이 죽기 전에 폴에게 던지는 충고는 간단하다. “네 인생을 살거라!(Vis ta vie!)” 프루스트 부인은 폴이 진실과 대면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로써 영화에서 주어진 그녀의 임무를 다하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정원에서 얻는 지혜는 폴을 통해 건강하게 이어지리라. 감독의 용기 있는 선언에 한 표를 추가한다!

인간은 자신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만 자연은 더 큰 생명력으로 인간을 감싸 안아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할 기회를 준다. 문제는 그 사실을 깨달아 인간이 자연을 다시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만일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인류는 조만간 멸망할 테고, 백만 년쯤 뒤에 다시 한 번 바다에서 생명이 시작될 것이다. 인류가 그만큼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여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리는 시절이 도래한 셈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마태 3,10)

환경에 관한 영화 세 편을 더 소개한다. ‘와일드’(장 마크 발레 감독, 극영화, 미국, 2014년, 119분)와 ‘러브 인 아프리카’(카롤리네 링크 감독, 극영화, 독일, 2001년, 140분)와 ‘원령공주’(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 일본, 1997년, 135분)인데 틀림없이 소중한 메시지를 얻을 것이다.

* 박태식 - 대한성공회 신부로 성공회 대학교 교수이다. 영화평론가이자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 세상’ 원장을 맡고 있다. 「나자렛 예수」, 「다르소의 바오로」 등을 펴냈다.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11월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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