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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 새 회칙 모든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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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6 ㅣ No.1782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 새 회칙 「모든 형제들」 (1)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미국의 가톨릭 자선단체 신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도 나눔을 통해 사회적 우애를 발휘하는 모습. [CNS]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3일 새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발표했다. 회칙의 부제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으로, 교황은 지구촌의 대화와 협력, 사랑을 통해 인류의 진정한 사회적 우애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교황이 강조하는 새 회칙의 뜻과 의미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특별기고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모든 형제들」’을 5회에 걸쳐 싣는다.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한국 교회 신자들에게 건네는 선물이기도 하다.

 

 

도입

 

프란치스코 교종은 오늘 사람들 사이가 갈수록 단절되고 닫힌 사회로 조각나고 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거리를 좁혀가고자 이번 교서를 펴내셨다. 사람이 만나는 상대가 누구든, 어떤 집안 출신이고, 어떤 일을 하고, 어느 지역에서 살든, 그런 속성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를 형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어디를 가나 평화의 씨앗을 심고,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고 쫓겨난 이들을 자신의 형제자매로 여기고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러한 형제애가 이 교서의 핵심적인 주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십자군 전쟁으로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에, 이집트의 술탄(임금) 말리크엘 카밀을 찾아가셨다. 성인은 온갖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슬람 임금을 찾아가셨지만, 토론이나 논쟁으로 상대를 설복시키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을 하느님이 빚으신 같은 피조물로서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취하셨다. 비록 다른 신앙을 가진 상대라도 그에게 적의나 증오로 맞서기보다는 스스로를 낮추며 형제적인 겸손으로 다가가셨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적 유산을 계승하며 아부다비에서 이슬람의 영도자 아흐메드 알 타예브(Ahmad Al-Tayyeb)를 만나고 그와 함께 공동 문서를 채택하며 선언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똑같은 권리와 의무와 품위를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고, 서로 모두 형제자매로 살아가도록 부르셨다.”

 

 

1장


닫힌 세상을 뒤덮은 먹구름

 

최근 세계에 근시안적, 공격적, 적대적인 국가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며 역사가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갈수록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의 단위나 규모는 커지지만 모두 개인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다 보니 공동체적 시선은 사라지고 모두가 더욱 외로움의 포로가 되고 있다.

 

세계화 현상은 힘 있는 이들의 입장과 권리는 지켜주지만,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힘없는 이들의 입장은 조금도 대변해 주지 못하고 갈수록 더 상처받고 지배당하는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존경과 돌봄의 대상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이를 망각하고 가난한 이들, 별 쓸모가 없는 장애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 필요하지 않은 이들, 노인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한없이 소비하고 버리는데 익숙한 오늘의 사회는 인간도 효용성이 사라지면 버리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국제 공동체는 그동안 인간을 노예화하는 다양한 사례를 끝내기 위해 많은 협약을 채택하고 전략을 펼쳤으나, 아직 지구 상에는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몇백만이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당하고 소유물 취급을 당하고 있다. 범죄조직들은 사람들을 납치, 인신매매, 윤락, 낙태, 장기 매매의 수단으로 유린하고 있다. 전쟁, 테러, 인종차별과 종교 박해 등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짓밟는 수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오늘의 극단적 무질서와 불안한 상황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 다른 문화, 다른 인종에 대해 갈수록 높고 두꺼운 벽을 쌓게 한다. 물리적인 벽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벽, 심리적인 벽을 쌓게 한다.

 

선진국들은 과학, 기술, 의약, 산업, 복지 분야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이룩하기는 했으나, 그 성과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이면에는 윤리적인 퇴보가 진행되어 영성적 가치와 책임감이 상실되고 국제적 연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많은 이들이 좌절감에 빠져들고 있다.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추종하는 이들은 이주민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올 때 자국의 경제에 다양한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임을 논증하며 이주민의 행렬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가족과 함께 전쟁과 자연재앙과 박해를 피하여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사람들이다. 인신매매 조직, 마약 조직, 무기밀수업자들은 집과 고향을 떠나 무방비 상태인 이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이윤을 추구한다.

 

현대의 디지털 문화가 인간의 소통을 기계적으로 원활하게 하는 기능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사이에 미움과 파괴를 쉽게 확산시키고 중독과 고립을 심화시키거나 인격적 관계의 심화를 저해하기도 한다. 디지털 연결성은 인간관계의 진정한 다리를 놓아주지도 못하고 인류를 하나로 엮어주지도 못한다.

 

이런 가지가지의 구름 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우리는 아직 다양한 희망의 징조를 발견할 수 있다. 최근의 팬데믹 상황에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여 있어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 많이 있었다. 의사, 간호사, 약사, 슈퍼 주인, 미화원, 공공운송 종사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노동자, 공공안전요원, 자원봉사자, 사제, 수도자 등 이런 이들의 도움 없이 아무도 혼자서 스스로 위험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25일,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 새 회칙 「모든 형제들」 (2)


병든 세상 치유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연대

 

 

미국의 가톨릭 자선단체 신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도 나눔을 통해 사회적 우애를 발휘하는 모습. [CNS]

 

 

2장 길 위의 이방인

 

프란치스코 교종은 슬픔과 고뇌, 기쁨과 희망이 교차하는 세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 안에서 한 가닥의 빛을 발견하며 전진하기 위하여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들려주신 이야기 하나에 집중하도록 초대하신다. 그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카 15,11-32)다.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쓰려져 있는데, 여러 사람이 그 앞을 지나지만 대부분 길 반대쪽으로 지나쳐 버린다. 유다인이 평소에 가장 멸시하고 상종하기도 꺼리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그 상처를 돌보고 여관까지 데려갔다. 그 길에 여러 사람이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자기 돈까지 내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그를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주었다.

 

이 이야기는 상처투성이의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가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결단을 아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한 행동을 그대로 본받는 결단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길 위에 상처받고 쓰러져 있는 이를 내 삶에 포함시킬 것인지 제외시킬 것인지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결단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서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지나쳐버리는 방관자가 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고, 방관자도 되기 싫다면, 우리는 상처받아 쓰러진 사람이거나, 아니면 상처 입은 사람을 어깨에 들쳐업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에서 방관자들의 특징은 그들이 하느님 예배를 전문으로 하는 종교인들, 즉 사제와 레위인이었다는 점이다. 이 종교인들이 취한 선택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배하는 일만으로는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강도들과 지나쳐 가버리는 방관자들 사이에는 은밀한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세상을 조작하고 기만하는 세력과 겉으로는 공명정대함을 코에 걸지만 실제로는 그 체제의 단물을 빨아 먹고 공생하는 세력과의 사이에 맺어진 동맹관계다.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소아적인 발상이다.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변화를 이루어갈 공동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일부터 하나씩, 사마리아인이 한 것처럼 당장 필요한 행동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더 넓은 지역으로, 국가로, 그리고 세계로 확산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는 어렵다.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을 협력자로 끌어들인 것처럼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을 끌어모아 힘 있는 가족을 만들어가야 한다.

 

 

3장 열린 세상 만들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을 만들어가고 발전시키고 완성에 이른다. 우리는 다른 인격과의 만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온전하게 인지하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과 참된 인격적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을 알 수도 없다.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상대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자라난다. 여럿이 모인 집단도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경우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 보호적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사막 교부들도, 관상 수도승들도 여행객이나 순례자들에게 최대의 환대와 친절을 베푸는 것이 거룩한 의무였고, 자신들의 영적 정체성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방편이었다. 사랑은 보편적인 통공(universal communion)을 압박하며,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을 성숙시키고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숨겨진 유배지가 있다. 장애인들은 아직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사회나 교회 안에서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참여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낀다. 노인들도 자신들의 풍성한 경험으로 공동선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자신들을 짐으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이 시대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그룹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그룹은 자신들의 폐쇄적인 정체성을 저해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이들을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고 쓸모 있는 범위 안에 있을 때에만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람들의 이웃은 이웃이라기보다는 동업자이고, 특정한 이익만을 공유하는 파트너일 뿐이다.

 

형제애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뛰어넘는 더 높은 가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절대화하는 개인주의는 우리를 온전히 자유롭게도 평등하게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를 형제애에서 멀어지게 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도 막아버린다. 개인이 자신의 좁은 세계를 뛰어넘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연대’를 알아야 한다.

 

‘연대’의 가치는 학습과 양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연대’를 학습하는 가장 기초적인 현장은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가정이다. 또 가정을 넘어서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과 만나고 윤리적, 영성적, 사회적 연대를 양성하는 일은 학교의 교사들의 몫이다. 연대는 어쩌다 마음이 내킬 때 공감하거나 동참하는 정도가 아니다. 연대는 가난의 구조적 원인, 불평등, 일자리 부족과 싸우고, 주택, 노동 등 다양한 사회적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일,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 새 회칙 「모든 형제들」 (3)


이주민 환대하고 차별 없이 함께하는 형제애

 

 

-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인근 야영지에서 한 로힝야족 어린이가 아이를 안고 서 있다. [CNS 자료 사진]

 

 

4장 온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세상의 모든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 확신은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 확신은 구체적으로 꼴을 갖추어야 한다. 그 확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문제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게 할 것이다.

 

우리 이웃에 이주민이 이주해 들어왔다면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바람직하기로는 불필요한 이주가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이 이주에 나서지 않도록 본고향에서 인간다운 품위를 누리는 생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런 여건이 갖추어지기까지는 사회가 이주에 나선 이들의 인간적인 권리를 존중하고 그 가족들의 기본적인 필요에 부응해 주어야 한다. 이주민을 맞이하는 데에는 네 가지 기본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환대, 보호, 증진, 통합이다. 이주민을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시혜적인 복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위의 네 가지 방법으로 함께 가는 동반자가 되고, 형제적 우애의 정신으로 그들의 문화, 종교적인 정체성과 차이를 보존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주민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걸림돌을 제거하도록 여러 단계로 안배해야 한다. 비자의 허용과 수속의 단순화, 가장 열악한 난민들의 인도적 통관 개방, 합당하고 품위 있는 주거확보, 개인의 안전, 영사업무 보조, 신분증명서 소지 허용, 합당한 법적 보호, 은행계좌 접근 허용, 최저생활 보장, 이동 자유와 취업, 어린이 보호와 교육, 임시 보호자 프로그램 운영, 종교자유 보장, 가족의 재회 지원 등이다.

 

이주 후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하고 사회적응의 과정을 거친 이들에 대해서는 내국인과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지는 ‘시민권’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고립과 열등감을 초래하는 ‘소수민족’이라는 차별적 개념의 사용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런 용어는 적대감과 불화를 초래할 뿐이다. 이러한 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주민의 도착 국가에서 임기응변의 조처가 아니라 중장기 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다른 문화와 국가 출신 이주민들의 도래는 도착 국가 시민들에게는 새로운 만남과 선물이 될 수 있다. 이주민들을 통하여 도착 국가 시민들은 더 온전한 인간 발전과 풍요로워지는 기회를 얻게 된다. 새로이 도착한 이주민을 자국민에게 위협으로 보거나 모든 인간이 갖는 불가침의 권리를 갖지 못한 2등 시민으로 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랜 기간 발전해온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은 서로의 교류와 만남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고 새로운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더 소통하고 서로가 지닌 재능과 선물을 발견하며 일치를 이루고 상호 차이를 상호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주민이 도착 국가에서 잘 받아들여지면 이들은 그곳에 축복과 선물이 된다.

 

오늘 우리는 모두가 함께 구원을 받아야지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인식을 깨달아야 한다. 지구촌 어느 한구석의 가난, 퇴폐, 고통은 결국 이 행성 전체를 멍들게 하는 상처의 못자리가 되고 만다. 부유한 국가는 가난한 국가를 지원함으로써 지구촌 전체의 온전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보는 세계화적 시각과 지역 고유의 특성과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지역화적 시각을 고루 갖추어야 온전한 인간 발전을 이룰 수가 있다. 지역을 고려하지 않는 세계화는 뿌리가 뻗지 않고 줄기만 커진 나무와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가지를 뻗지 못하는 뿌리가 햇빛을 받지 못해 더 이상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지역에만 매몰되는 지역화는 다른 지역과 유리되어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고 협소한 민족주의, 국가주의로 오그라들고 만다. 다른 지역의 문화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물리쳐야 하는 적이 아니고, 인류문화가 품고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고 풍요로운 자산이다. 건전한 개방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위협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의 고유한 정체성은 다른 문화와의 대화를 통하여 강화되고 풍요로워진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8일,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 새 회칙 「모든 형제들」 (4)


공동선 추구하는 정치, 가장 높은 애덕의 구현

 

 

-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무너진 모스크를 지나가고 있다. [CNS 자료 사진]

 

 

5장 좋은 정치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적 공동체는 공동선에 봉사하고자 하는 좋은 정치 지도력이 선행되어야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에는 이러한 통 큰 정치 지도력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는 지금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이 정치판을 주름잡고 있다. 포퓰리즘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대중을 선동하고, 자유주의는 주로 힘 있는 이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켜주는 역할을 도맡아 한다. 둘 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 특히 가장 나약한 이들의 방패는 되어주지 않는다. 사회가 단순히 복수의 개인을 모아놓은 집단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차이를 넘어서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는 공동체로 이해한다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민중(People)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이런 민중은 대중영합주의의 대중과는 구별해야 한다. 그렇다고 민중이 하는 일이 무조건 옳거나 좋다고만 간주하는 것도 잘못된 편견이다. 민중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동일한 사회적 문화적 유대에서 유출되는 같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를 이익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단’ 정도로만 이해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입장은 공동체와 문화적 유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민중’의 개념을 거부하고 쉽게 포퓰리즘의 딱지를 붙여버린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 힘없는 이들까지 포용할 수 없다. 진정한 애덕은 모두를 끌어안기 위해 사회의 여러 제도나 조직이 보유하는 다양한 장치와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모두를 살리는 일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사고 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여관이 있었고, 여관 주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상처받고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 없었다. 개별적 접근과 방법만 가지고는 아주 소수에게만 혜택을 주고 나머지 대다수는 그냥 버려두게 된다. 많은 나라에서 고통받고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면 보편적인 형제애가 우선되어야 하나, 국제적 조직의 효율적인 지원을 통하지 않으면 참된 애덕의 실천은 어렵다. 진정한 애덕 실천을 위해 먼저 우리 마음이 바뀌고, 태도와 생활습성도 바뀌어야 한다.

 

21세기 들어서서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 경제와 재정의 힘이 정치를 압도함으로써 국가의 힘이 약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거나, 경제가 기술 관료들의 효율 제일주의에 장악되어서도 안 된다. 이를 감안하여 세계는 좀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국제기구의 체계를 구축하고, 이러한 국제조직의 관리자는 각 정부의 합의 하에 세계의 공동선을 위하여 강력한 제재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야 한다.

 

현재의 유엔과 경제기구, 국제재정기구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제기구들이 소수 국가의 뜻대로 좌지우지되지 않고, 이념적 차이 때문에 약소국이라고 해서 기본적인 자유가 억제되거나 문화적 지배를 강요당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가장 차원 높은 애덕의 구현이며 지고한 소명이다. 정치적 애덕은 모든 개인주의적 정신 자세를 초월하는 사회적 의식에서 탄생한다. 사회적 애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동선을 추구한다. 사회적 애덕은 모든 사람의 선익을 추구하지만, 사람들 개개인의 사사로운 선익보다는 그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사회적 차원의 선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고통당하는 이를 돕는 일이 애덕의 행위이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직접 모른다고 해도 그의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여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도 애덕의 행위이다.

 

한 노인이 강을 건너도록 돕는다면 이는 훌륭한 애덕의 행위이다. 정치인은 그 강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또한 훌륭한 애덕을 실행한다. 누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면 그는 그에게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다른 형태의 지고한 애덕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좋은 정치의 핵심은 애덕이며 이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를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행동이다. 애덕을 통하여 변화된 시선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의 존엄을 인지하고 그의 정체성과 문화를 존중하며 사회 안에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시선이야말로 참된 정치를 아는 이의 심장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5일,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새 회칙 「모든 형제들」 (5)


‘친절’이라는 성령의 열매로 이루는 사회적 우애

 

 

- 브라질 교회가 빈민가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벌이고 생필품과 마스크 등을 전달하며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힘쓰고 있다. [CNS 자료 사진]

 

 

6장 사회의 대화와 우정

 

누군가를 만나고 이웃으로 도움을 주고받으려면 먼저 대화가 오가야 한다. 불화와 갈등은 쉽게 뉴스의 소재가 되지만, 용기와 끈기가 필요한 대화는 좀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대화야말로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이들은 자신의 좁은 틀 안에 숨어버리거나 아니면 파괴적 폭력으로 대응해버린다. 그러나 이기적 무관심과 폭력적인 대결 사이에는 항상 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세대 간의 대화, 종족 간의 대화가 열려있다. 사회의 각 계층 문화, 즉 대학문화, 대중문화, 젊은이 문화, 예술 문화, 기술 문화, 경제 문화, 가족 문화, 미디어 문화들 사이에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는 크게 번성한다.

 

인생은 그 안에 대결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기에 만남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서로 다른 모양이나 특성이 하나로 모여 있는 다면체다. 타인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은 없다. 어떤 사람도 소모품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로 합치는 일은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통합의 여정이 있어야 진실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평화는 순수하고 흠 없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무엇인가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을 넘어서서 만남을 이루어 가도록 성숙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도 그들이 우리와 다르게, 그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렇게 우리와 다른 존재들을 인정하는 능력이 우리의 문화로 정착되면 사회적 계약이 형성된다.

 

사회의 일부 계층이 가난한 이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의 모든 부와 권리를 독점하고 수탈해버린다면, 머지않아 그 부작용이 폭력적 형태를 띠고 나타날 것이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으면 그냥 고상한 이상으로 남을 것이다. 진정한 만남이란 정계, 재계, 학계의 유력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회적 만남은 대다수 사람이 공유하는 대중적 문화의 틀 안에서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회적 만남은 공존하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세계관과 문화와 생활양식을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문화적 계약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토착민들의 경우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으나, 그들이 생각하는 발전이란 선진국 국민들의 통념과는 다른 ‘인간적인 발전’을 기대한다. 토착민문화에 대한 불관용과 존중심의 부족은 일종의 폭력이다. 우리 문화와 아주 다른 문화, 특히 가난한 이들의 문화를 무시한다면 우리 안에 참되고 깊이 있고 영속적인 변화를 이루어갈 수 없다.

 

소비주의적 개인주의는 세상에 많은 불의를 쌓아왔다. 타인의 존재를 우리 자신의 평화에 방해되는 요소로 인식하게 만들어, 다른 이들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바라보게 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위기와 재앙과 시련이 닥쳐왔을 때,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친절’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라 5,22)

 

친절이란 무례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상냥하고, 뒷받침하는 태도이다. 고민과 두려움에 짓눌리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 이들이 갖는 자세다. 적의와 갈등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한 곳에 새로운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 친절이다.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22일,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풀어낸새 회칙 「모든 형제들」 (6 · 끝)


세계 곳곳의 아픈 역사들… 용서하되 끈질기게 기억하며 치유해야

 

 

- 프란치스코 교황이 폴란드 아우슈비츠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벽을 만지고 있다. [CNS 자료 사진]

 

 

7장 새로운 만남의 통로

 

오늘의 세계는 곳곳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치유의 통로를 요청하고 있다. 치유의 과정을 감행하고 새로운 만남의 통로를 의연하게 개척해갈 남녀 평화의 일꾼이 필요하다.

 

평화의 과정은 끈질긴 투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진리와 정의를 참을성 있게 추구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복수에 대한 갈망보다 훨씬 강력한 희망의 공유를 향해 한 발짝씩 전진해가는 투신이다. 진리는 정의와 자비의 동지다. 이 셋이 모두 평화의 건설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동지다. 진리는 복수가 아니라 화해와 용서로 이어져야 한다. 인간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은 인류 전체의 몸에 상처를 남긴다. 폭력은 더 많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더 큰 증오를, 죽음은 더 많은 죽음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 고질적인 고리를 부수어야 한다. 진실한 화해는 새로운 사회, 즉 타인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봉사에 바탕을 둔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참된 평화는, 한국 주교단이 제시한 바와 마찬가지로, 화해와 상호 발전을 추구하는 대화를 계속하며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 (2017년 8월 15일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호소문’ 참조)

 

사회적 우정(social friendship)을 만들어가려면 어려운 시기에 서로 대립해온 집단들끼리 마주앉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상처 입은 부류의 사람들과도 새로운 만남을 이루어가도록 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과 수탈당해온 이들이 반사회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멸시와 배제가 원인으로 작동해왔다. 평온한 사회적 공존을 성사시키려면, 온전한 인간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불평등이 판을 치는 곳에 평화는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세상에서는 갈등과 공격이 항상 싹을 내밀고 자라나 언젠가는 폭발해버릴 충분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예수님은 폭력과 불관용을 용인하지 않으시고 힘으로 남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일을 단죄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5)

 

복음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부패한 관리, 범죄인, 인권을 짓밟는 이들을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이 용서는 아니다. 압제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벌이는 억압을 용인하거나 묵인하는 일이 아니다. 압제자에 대한 참된 사랑은 그가 더는 억압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힘을 박탈하는 일이다. 분노에 불을 댕기거나 복수와 파괴에 사로잡히는 일은 우리 자신과 국민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불의하고 잔혹한 고통을 겪어온 이들에게 ‘사회적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화해는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사회 전체에 억지로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이 그 기억을 지우고 용서를 단행하는 일은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도 인간적으로 이해가 간다. 잊어버리는 일이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쇼아(홀로코스트 대학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이러한 기억을 오늘의 세대도, 내일의 세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기억을 간직해야 우리는 더 공정하고 형제적인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해, 노예무역, 인종청소 같은 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고 그 기억은 갱신되어야 한다.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29일, 강우일 주교(전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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