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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7: 공주 국실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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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7 ㅣ No.758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7) 공주 국실 순교자들

 

 

"등장인물은 많은데 내용이 없는 책" 옛날에 전화번호부를 우스갯소리로 이르는 말이었다. 오늘 소개하는 공주 국실 순교자들이 이와 같았다. 한 동네에서 수십 명이 순교하였는데 각자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없어 이름만, 혹은 그마저도 없이 숫자만 알려져 있을 뿐이니까.

 

공주 국실(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은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으로 옹기를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산골 마을이었다. 1810년대 이전에 형성된 꽤 오래된 교우촌이었는데도 병인박해 이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박해가 일어나면서 1866년에서 1868년까지 3년 동안 최소 53명 이상이 공주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분들이 한 동네에서 순교한 사례인데도 기록이 적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기록들을 보면 이렇다.

 

“병인 4월에 공주 국실에서 27인이 공주 포교 김명보, 이치문에게 잡혔는데.... 박성일 등 합 19인이 공주서 교하여 치명하니, 그때 이 서방은 신문교우(새 신자)로 영문에서 추열할 때 삼종기도 첫 조목을 외우고 옥에 내려가 19인에게 세례를 받고 치명하니....”

 

“공주 국실에 살 때에 동네 교우 대개 30명이 정묘 4월 초5일에 잡혀 공주에서 갇힌지라. 이에 김 예로니모와, 김용소와, 이정심과, 함선일과, 최 첨지와, 박광지와, 김치명, 합 여덟 사람이 한가지로 치명하니....”

 

이분들의 순교를 증언하고 기록해줄 사람마저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기에 기록이 적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짧게나마 작성된 기록의 조각들을 모아 보면 그들이 어떻게 순교의 시간을 맞이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국실 교우들은 공주 감옥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십자가의 길을 갔다. 1867년에 함께 갇힌 이들의 경우 먹을 것이 없어 옥졸들이 돼지 밥통에서 술지게미 찌꺼기를 가져다주자 그것도 감사하며 서로 나누어 먹었다. 다소 부유했던 김군심이란 교우는 아내가 개를 잡아 몰래 옥으로 들여보내자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는 조금만 먹었다. 또한 저녁때가 되면 교우들은 날마다 큰 소리로 만과(저녁기도)를 기쁜 마음으로 합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주 국실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름만 알려지거나 때로는 숫자로만 나열되어 있다. 그럼에도 전화번호부처럼 ‘내용이 없지 않은’ 이유는 짧은 기록 안에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와 음악이 길다고 좋은 작품이 아니듯이, 간결하게 늘어선 그분들의 이름 안에서 믿음의 깊이가 느껴진다.

 

[2016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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