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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중국교회 역사이야기17: 교황사절 첼소 코스탄티니와 중국 천주교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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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28 ㅣ No.1479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7) 교황사절 첼소 코스탄티니와 중국 천주교 토착화


중국에 최초 파견된 교황사절

 

 

- 코스탄티니 교황사절은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 파견된 교황사절 자격으로 중국교회 토착화를 위해 활동했다. 최병욱 강사 제공.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1919년 11월에 교황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를 선포했다. 「가장 위대한 임무」에서 선교사는 자기 선교지의 영혼이 돼야 하며 자신들의 사제들과 협조자들을 독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선교지가 최대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하며, 필요한 경우 소속 수도회 혹은 국적을 따지지 않고 협조자를 불러 자신의 거룩한 직무를 돕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지를 다스리는 장상은 누구나 현지인 사제 양성에 우선적 관심을 두어야 하며, 현지인 사제 양성이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개혁적 신자 마상백(馬相伯)의 건의문과 당시 중국교회의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비판했던 뱅상 레브(Vincent Lebbe) 신부 등의 보고서 내용을 반영한 결과다. 또한 교황청이 중국과 직접적인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교황사절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프랑스의 방해로 실패한 경험에서 나온 시도였다.

 

 

최초의 중국 교황사절, 코스탄티니

 

베네딕토 15세 교황 후임인 비오 11세 교황은 1922년 첼소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대주교를 교황사절로 중국에 파견했다. 코스탄티니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사절 임명 당시 포교성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16세에 수도회에 입회했고, 18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가톨릭교회 예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저서 「가톨릭 예술 강의」를 펴내기도 했다.

 

중국에 코스탄티니를 교황사절로 파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가 중국 교황사절로 임명되기 전, 교황청 내부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이 물망에 올랐지만 프랑스가 여러 빌미로 교황사절을 중국에 파견하는 것에 반대했다. 명목상 프랑스 선교 보호권은 폐지됐으나 그 영향력은 잔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교황청 당국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이며 당시 외교가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코스탄티니에 주목하게 됐다. 임명 과정은 매우 비밀스럽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교황사절로서의 임무를 지니고 북경으로

 

교황청은 처음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면서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에 의거해 임무를 수행할 방침을 정해 주었다. 첫째, 교황사절은 순수한 종교적 입장을 갖는다. 둘째, 교황사절은 열강의 정치적인 이익을 보호하지 않으며, 오직 교황에 속하고 교황을 대표할 뿐이다. 셋째, 교황사절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으며, 간혹 정치가 종교의 범위로 들어올 때는 우연적이거나 잠깐이어야 한다. 넷째, 교황사절은 중국에 대해 조금도 제국주의적 야심은 없다. 교황은 중국에 매우 관심이 많으며, 중국은 중국인의 것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다섯째, 선교 사업은 영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하므로 교회는 지극히 공적이어야 하며 현지인이 지역교회 주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스탄티니는 이러한 방침을 따르는 임무를 지니고 1922년에 북경에 도착했다. 그는 다른 외교사절과 달리 외국 공사관 구역 밖에 공관을 세워 그곳에서 생활했다. 그는 스스로 중국인들이 사는 지역에 거주함으로써 중국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중국에서의 선교 사업은 중국인 사제들이 성장했으니 외국인 선교사들은 뒤로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함을 강조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손님이지 주인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여러 수도회가 중국교회에서 군림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1924년 중국 상해 사산(佘山)에서 열린 제1차 전국주교회의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신의식 교수 제공.

 

 

토착화 노력의 결실

 

코스탄티니가 교황사절로 행한 첫 번째 임무는 1924년 5월 상해에서 중국 첫 전국주교회의를 개최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주교 42명, 감목 5명, 선교구 대표 13명 등 모두 108명이었다. 이 가운데 두 명의 중국인 감목이 포함돼 있었다. 두 명의 중국인 감목은 코스탄티니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이 회의는 개최 자체로 상징적인 의의가 있으며 교황사절이 중국 천주교를 관할하는 권리와 권한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후 중국에서 천주교에 대한 권한이 선교보호권을 지니고 있던 프랑스에서 교황청으로 넘어오는 전환기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상해에서 개최됐던 전국주교회의 이후 코스탄티니는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라는 임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인 사제 가운데 주교를 임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인 주교 권한 아래 복종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는 방안은 중국인 사제가 관리하는 대목구를 설립한 후에 주교를 임명해 관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화시키는 일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코스탄티니는 중국인 사제가 관할하는 독립 관할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의 노력은 성과를 나타냈다.

 

1926년 3월 30일, 교황청에서는 코스탄티니에게 중국 주교의 축성(서품식)을 로마에서 할 것이라고 통지했다. 1926년 9월 10일, 코스탄티니는 6명의 중국인 주교 서품 예정자들을 인솔하고 로마로 떠났다. 상해에서 배를 타고 나폴리에 도착했으며, 나폴리에서는 이탈리아 정부가 마련해 준 전용열차를 타고 로마에 도착했다.

 

비오 11세 교황이 서품미사를 집전했고 직접 강론했다. 코스탄티니도 미사를 공동집전했다. 이 서품식에는 뱅상 레브 신부도 참례했다. 중국인 주교 서품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으로 코스탄티니는 중국인 수도회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그 목적은 중국 토착화를 위해 지식인들에게 신앙을 전파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중국인 사제단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창설된 수도회가 ‘주도회’(主徒會)였다.

 

그는 또한 북경에 천주교 대학을 설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비오 11세 교황은 대학 설립에 필요한 경비를 원조하고, 베네딕도회 수사를 중국에 파견해 1925년 천주교 대학인 ‘보인대학’(輔仁大學)을 설립했다.

 

- 1924년 중국 상해 사산(佘山)에서 열린 제1차 전국주교회의 모습. 신의식 교수 제공.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구적 활동

 

중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파견된 교황사절 코스탄티니는 20세기 초반 격동기에 활동했다. 민족주의가 유행하고 반그리스도교 운동이 횡행하던 중국에서 그는 교황청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중국교회가 뿌리내리도록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중국에서 발생한 민족주의 운동을 지켜보며 그들의 애국심을 존중했으며 변화의 조류를 주시했다. 그가 계속 주목해 온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인들이 성당 안에 있을 때 서양 가옥에 있다는 것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신도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천주교의 토착화는 중국 문화와 천주교 문화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제는 ‘쇄신과 개혁’이었다. 이제까지의 폐쇄적인 교회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에 소통의 문을 여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또한 선교 방법에서 각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것에 적응해야 하는 토착화를 주장했다. 교황사절로서 코스탄티니가 중국에서 한 활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구적 활동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다.

 

[가톨릭신문, 2021년 11월 28일, 금경숙(마르가리타, 삼인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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