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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과 신앙, 믿음의 길을 찾아서1: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이제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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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5-20 ㅣ No.665

[팬데믹과 신앙, 믿음의 길을 찾아서] (1)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이제민 신부


물질과 권력 숭배, 팬데믹보다 심각… 교회는 세속화된 세상 구원해야

 

 

이제민 신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올바르게 전하고 있는지 많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넘어가고 있다. 일상이 회복되면서 본당에선 다시 성가가 울려 퍼지고, 단체 모임도 재개됐다. 신앙생활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이지만, 코로나19 이전과 같을 수만은 없다.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생활양식마저 바꿔놓은 전환기의 시대에 다시 모인 하느님 백성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가톨릭평화신문은 창간 34주년을 맞아 ‘팬데믹과 신앙’을 주제로 신학자들을 만난다. 하느님 말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성찰해 온 이들의 진단과 전망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교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KTX 마산역으로 마중 나온 이제민 신부는 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마산교구 주교좌 양덕동성당으로 안내했다. 평일 오후, 불이 꺼진 성당은 고요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주변 도로에서 들리는 차 소리가 아득했다. 스치는 옷깃이 내는 바스락거림조차 조심스러웠다. 신자석 맨 뒷자리에 이 신부와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몇 분의 침묵이 흘렀을까. 낮은 목소리로 이 신부가 운을 뗐다.

 

“전례 분위기엔 이런 고요함이 있어야 해요. 인간의 소리를, 나의 소리를 죽여야 그분의 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코로나로 텅 빈 성당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고민하는데, 텅 빈 성당의 침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은 종교의 근본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가 성당으로 먼저 온 이유였다. 잠시나마 창조의 원천으로 이끄는 침묵을 느끼게 해주며 텅 빈 성당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텅 빈 공간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태초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순간에 잠기어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게 합니다. …침묵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께서 몸 바쳐 사랑하신 고통받는 이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

 

그는 책에서 “텅 빈 성당의 고요에서 코로나19가 극복된 일상이 새로 시작된다”고 썼다. 성당 근처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 이제민 신부가 서 있는 곳은 마산교구 주교좌 양덕동성당이다. 이 신부가 유학 후 보좌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은퇴하고 나니 그동안 써놓은 글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겨 좋다”고 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

 

일상으로 속속 돌아가면서 텅 빈 성당은 신자들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이 신부는 코로나19 이후를 이야기할 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여전히 삶의 변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고 아픈 이들이 교회 안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면 코로나를 이겨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떠셨는지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이 누구였나요.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과부 등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었고, 소외와 차별을 겪는 이웃이었죠.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해주셨어요.“

 

아픈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병이 낫고 깨끗해졌다.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병이 낫는 것 이상의 체험이다.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원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지금 함께 하신다는 걸 느끼며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신부는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면서 “중풍에서, 나병에서 낫지 않아도 괜찮은 거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됐으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이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부활의 삶이라고도 했다.

 

“고통스러운 처지에서도 용기를 내 예수님께 찾아갔던 이들의 마음,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이들에게 기꺼이 다가갔던 예수님의 마음, 우리는 그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한 질병, 물질과 권력

 

이 신부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질병이 세상을 휩쓸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보다 더 무서운 병을 늘 앓고 있지 않았냐”면서 물질과 권력을 숭배하는 현대사회의 병을 지적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 돈을 번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경제를 살려야 한다면서 더 불평등해졌어요. 경제를 우선할 때 낙수효과를 기대했지만, 어디 물이 떨어지던가요. 물 안 떨어지게 하려고 그릇을 더 크게 만들었죠. 그게 돈의 속성, 권력의 속성이에요.”

 

그는 경제의 어원을 되짚었다. 경제를 지칭하는 영어 이코노미(economy)는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와 관리한다는 뜻의 노미아(nomia)를 합친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유래했다. 이 신부는 “결국 집을 관리하고 가꾸는 것이 경제인데, 돈만 갖고는 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보살펴야죠. 집을 잘 가꾼다는 건 소외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경제를 한다면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더 많이 아프게 하면 되겠어요. 다른 게 병이 아니라 그런 게 병이에요. 참 안타깝지요.”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

 

이 신부는 “이러한 질병을 교회가 앓으면 세상엔 희망이 없다”고 했다.

 

“교회는 물질과 권력에서 벗어난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수도원의 삶이 하나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고요. 물론 세상 경제가 어려우면 교회도 힘들죠. 그렇다고 교회가 살아남아야 한다며 경제 논리에 따라서 숫자놀음을 하면 되겠어요. 그럴수록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신부는 덧붙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영적 세속성’을 언급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한다.(「복음의 기쁨」 93항)

 

“교회가 세속화되면 세상보다 더 속물인 거예요. ‘돈과 권력이 전부가 아니다’고 외치면서 정작 교회가 돈과 권력에 젖어 있지 않았나요. 세속화된 세상을 구원하는 건 결국 교회고, 종교입니다. 교황이 영적 세속성을 말한 건 비판이라기보다는 종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 역할을 일깨운 것이라고 봐요.”

 

 

무신론에서 길어올린 신앙

 

이 신부는 유학 중이던 1980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86년 독일 뷔츠부르크대학에서 기초신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선 광주가톨릭대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고 여러 본당과 명례성지에서 사목했다. 그에겐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신학생 시절이 있었다. 하느님을 공부하면서 ‘신은 없다’는 명제에 꽂혔다.

 

그렇게 신학과 신앙 사이에서 하느님에 관한 질문에 매달리며 유학을 떠났다. 신학자 칼 라너(1904~1984)를 알게 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내용과 개념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신은 있다 없다’의 고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칼 라너의 책을 보다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봤어요. 충격이었죠. 내가 믿는 하느님을 다시 돌아보고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고백할까를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는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학자로서, 사제로서 그의 삶은 하느님 신비와 복음의 언어를 가능한 훼손하지 않고 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시간이었다. 그가 남긴 저서마다 말과 언어에 대한 성찰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엥기켄, 손안에 있다

 

이 신부가 곱씹고 또 곱씹는 구절은 마르코복음 1장 15절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성경에선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엥기켄은 ‘손안에 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이 신부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왕국이 손이 닿는 곳에 와 있다는 말씀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라고 말했다.

 

“손을 내밀면 닿는 곳에 천국이 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 거예요. 온갖 질병을 앓는 사람, 슬픔과 괴로움으로 고통받는 이들 안에 있는 거고요. 예수님께선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손을 뻗어 천국에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밀어내고 있지 않았나요.”

 

그는 「손 내미는 사랑」에서 “하느님 왕국을 체험하고 싶으면 밀어내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라”고 했다. 보기 싫은 사람,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밀어내는 건 자신도 모르게 천국을, 하느님을 밀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남을 향하여 손을 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생명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손내미는 사랑」)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 믿어야

 

삶의 자리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천국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서 가는 천국, 죽음 이후의 부활이 없는 것이냐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 이 신부는 “무엇이 있다 없다고 이야기하는 낡은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살아서 가지 못하는 곳을 죽어서는 갈 수 있나요.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겐 지금 이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고, 지금 이 공간이 하느님의 나라가 돼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신 소중한 존재인 것이에요. 그러면 내가 지금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인데 정말 기쁘지 않겠어요.”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지금 여기에서 찬미하며 기쁘게 살아갈 때 신앙의 뿌리는 단단해진다. 위기 속에선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엔 끝이 없어

 

이 신부는 매일 새벽 미사 전 성무일도 독서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독서는 새벽에 해야 살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들었던 성경 말씀이지만, 매일 미사 때 듣는 독서와 복음, 성무일도의 시편기도와 독서기도에 나오는 교부들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다. 하루종일 묵상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다.

 

2019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이 신부는 마산 성지여고 내 사제관에서 머물고 있다. 그동안 썼던 자료들과 매일의 묵상을 정리하며 지내고 있다. 이 신부는 최근 마르코복음 묵상집 「모든 사람이 나에게 복음」 1,2권을 펴냈다. 각 권 모두 500쪽이 넘는다. 내년에는 교리서도 다시 정리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복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일념은 그를 지치지 않게 하는 듯싶다. 그는 인터뷰 후 며칠 뒤 책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데 그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신지 많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15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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