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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마리아]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여성,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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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8 ㅣ No.24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여성, 마리아

 

 

여성의 눈으로 이해하는 마리아

 

새로운 영성을 갈구하는 시대적 흐름 안에서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영성도 변모를 겪고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마리아에 대한 영성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일반신자들의 종교적 심성으로부터 발로된 마리아 신심이라는 흐름이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동정녀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 ‘무염시태’, ‘몽소승천’ 교리로 요약할 수 있는데, 교회의 분위기는 여성들의 종속적인 위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리아를 온유하고 겸손한 동정녀요 어머니로 강조하는 반면, 제자로서, 사도들의 모후로서의 위치는 간과해 왔다(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평신도위원회와 사회위원회 주최, ‘여성에 관한 회의보고서’, 1993년.)

 

마리아의 동정성이 여성의 순결 · 정절 의식을 강화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의가 여성의 모성을 신비화 또는 절대화시킬 수도 있다. 마리아의 무죄성이 다른 여성과 구별성을 낳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여성의 온전성을 지향하는 데 종래의 마리아론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눈으로 이해하는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여기서는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해석만을 다루어보기로 하겠다.

 

 

동정녀 탄생설은 메시아 탄생의 표징

 

처녀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분은 마리아뿐이기에 ‘동정녀 탄생설’은 현실성 없이 무조건 믿어야 할 교리로만 다가온다. 그러나 성서의 전승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임신과 관련된 여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맥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구약성서에는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 삼손의 어머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등 모두 아기를 낳지 못한 석녀였고, 아기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핍박과 설움을 당하였다.

 

아들의 출산을 둘러싼 여성의 문제는 신약성서에서도 계속된다. 루가 복음 1,5-38을 보면,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 다 예사롭지 않은 임신을 하였다. 엘리사벳과 즈가리야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처럼 나이가 많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석녀였던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갖게 되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보살핌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사람들에게서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루가 1,25). 구약성서의 빛에서 보면 엘리사벳의 임신은 평범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표징에 해당한다.

 

루가는 곧 이어 마리아의 임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만 해놓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인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으로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미 결혼한 여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임신했다면, 당시 율법에 의해 돌로 맞아 죽을 일이었다.

 

아들이 없어서 설움받는 여성의 이야기와 임신 자체가 크나큰 부담인 미혼모의 경우는 서로 상반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두 경우 다 가부장 문화권 안에서 여성에게 덮어 씌워진 굴레라는 점에서는 공통의 지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설은 아들을 둘러싼 여성의 문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다.

 

석녀가 아기를 가지면 이는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것보다 더욱 놀랍게도 아예 남자의 도움 없이 임신이 되었다면 더 큰 표징이 될 것이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신화와도 같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바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탄생하심을 알리는 표징이 된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감지한 엘리사벳과 마리아

 

동정녀 탄생설은 남성의 힘과는 무관하게 하느님의 개입에 따른여성의 힘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짐을 말한다. 남성의 도움 없이 다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여성이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가부장적 구조의 철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새로운 창조질서를 엘리사벳은 제일 먼저 간파하였다.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받았으며 당신 태중의 아기 또한 축복받았습니다. … 복되어라, 믿으신 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리니.”(루가 1,42-45)라고 외쳤다.

 

당시 아무도 마리아의 임신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볼 눈이 없었지만, 엘리사벳만은 달랐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놓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이 말은 정녕 크나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엘리사벳의 존재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자이며 버팀목이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은 예사롭지 않은 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 개입하고 계심을 감지하였고, 서로를 격려하였다.

 

 

새로운 인간 역사의 실현

 

이제 마리아에게서 인간 억압의 모든 굴레가 벗겨지고 하느님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한 여성의 모습이 살아난다. 아들을 낳는 일은 가부장적 문화권 안에서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었지만,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은 가부장적 틀을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스스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마리아는 마니피캇에서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 권세 부리는 자들은 권좌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은 들어올리셨으며,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라고 노래부른다.

 

여성의 입장에서 이 노래를 다시 읽노라면 좌절이나 패배가 아니라, 용기와 희망이 솟아남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은 역시 억눌린 여성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계시구나. 남성 중심의 사회가 하느님의 본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구나. 하느님은 여성의 손을 빌려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새로운 인간관계를 바라고 계시는구나.’라는 새로운 신앙의 이해가 생겨난다.

 

동정녀 탄생설은 하느님의 개입과 마리아의 협력으로 말미암아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새로운 인간역사의 실현을 말해준다. 그리고 마리아는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3년 8월호, 강영옥 루치아(가톨릭 대학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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