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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교회미술의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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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24

[한국교회 토착화를 향해] 교회미술의 토착화

 

 

-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를 위해 교회가 앞장서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해주어야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열정적인 신앙심을 갖고 있고 선교열도 높은 편이다. 비록 증가 추세가 둔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신자 수는 늘어나고 있고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새로운 성전이 계속 들어서고 있으며 그 안에는 많은 그림과 조각 등 교회 미술품들이 제작, 설치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역사는 불과 200여년, 외형적 성장에 걸맞게 교회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성전과 성 미술, 성상 등 교회 미술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 전통 문화와 우리 민족 고유의 심성과 신앙심, 예술적 감성과 능력이 발휘되어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정신, 가치관을 수용하고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교회 미술의 토착화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토착화 노력

 

우리나라에서 가톨릭 교회 미술이 자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였다. 한국교회에서는 18세기 한국교회 창설 및 신자들의 경배 의식과 더불어 교회 미술이 시작됐다. 즉 시각적 경배 대상으로서 천주상과 그 밖의 상본 그림들이 사실적인 서양화법으로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 한국에서의 서양 미술 수용의 시초이기도 했다.

 

최초의 신자 화가로 알려진 이희영(루가)은 상본화를 그리며 전교활동을 하던 중에 체포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비록 그의 성화는 전해지지 않지만 「앉아 있는 개」(1795) 그림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초대 교회에서 상본이나 성화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박해시대의 성물들은 탄압으로 인해 거의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기도서와 묵주, 십자가, 고상 일부에 불과하다. 한국 교회 미술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886년 한불 수호 조약이 체결되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였다. 초기 교회가 견뎌내야 했던 박해가 끝나면서 성전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서울 약현성당, 명동성당, 대구 계산동 성당 등이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는데 이들 성당들에는 예외 없이 각종 회화작품과 조각품들이 성전을 장식하게 됐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외국에서 제작된 성모자상과 성인상, 천사상과 성물들,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설치됐고 제단벽에는 장발이 그린 「14제자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미술품들은 중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가져온 것이고 한국 미술가가 제작한 것은 1920년부터 등장하게 된다. 특히 장발은 서양화가이면서 미술교육자로 국내에 서양 화단과 가톨릭 미술을 개척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한 뒤 서울대 미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면서 교회 미술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이 더욱 혹독해진 가운데에서도 이순석, 윤승욱, 김종영 등이 성화와 성상을 만들며 교회 미술의 초석을 다졌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화 제작

 

1945년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부터 많은 신자 미술인들이 배출돼 이들은 성당을 설계하고 성화와 성상, 교회용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한국화로 성화 제작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김기창 화백은 전쟁 중에 피난지 군산에서 「예수의 생애」 30점을 한국화로 그렸다. 장웅성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한국화로 그렸고 장운상도 「예수와 어린이들」을 한국화로 표현했다. 1954년 10월에는 장발등 가톨릭 미술가들의 노력으로 서울 미도파 백화점에서 「성 미술전」이 개최됐다.

 

혜화동성당의 건립을 계기로 한국 교회 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장발의 주도로 1960년 건립된 이 성당은 많은 신자 예술인들에 의해 꾸며져 우리나라 현대 가톨릭 미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건립 당시에는 장발, 이순석, 김종영, 김세중 등이 참여했고 70년대 이후에는 문학진, 권순형, 이남규, 최종태, 이종상, 최봉자 등이 참여했다.

 

1954년 성 미술전 이후 중단됐던 가톨릭 미술가 모임이 다시 시작돼 1970년 이순석, 김세중 등에 의해 「서울 가톨릭 미술가회」가 본격적으로 창립됐다. 한국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에 있어서 미술가회가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이들은 성 미술의 토착화를 위해 성상과 성물을 제작하면서 교회 건축에도 적극 참여해 성전 건립과 함께 교회 미술도 꾸준한 발전을 보였다. 

 

교회의 문화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자라왔다. 주교회의 문화위원회가 1995년에 「가톨릭 미술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식을 갖고 있고 일부 신학대학에도 교양 미술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각 교구마다 가톨릭 미술가회가 구성돼 정기적으로 작품 발표회를 갖고 있으며 특히 각 교구의 미술가회가 연합해 「한국 가톨릭미술가협회」를 구성했다. 이 협회에서는 회화와, 조각, 공예, 건축 등 각 분야의 예술가 500여명이 활동하면서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이처럼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 노력이 꾸준하게 이어져왔지만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문화는 교회의 외적 성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홀하게 취급돼 왔다.

 

서울대교구 홍보실장 겸 성미술감독인 정웅모 신부는 『서구 문화의 꽃이랄 수 있는 르네상스는 중세 교회 미술이 바탕을 이뤘던 것』이라며 『한국교회는 이제 정신적 빈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문화적 관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면서 무엇보다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이 변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신부는 이를 위해 교회 문화의 자리로 기념관, 박물관, 미술관 등 공간적인 배려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교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또 올바른 토착화를 위해서는 교회 미술과 한국 문화 및 미술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교육할 것을 강조하고 사제들의 문화적인 소양을 위해 신학교 교과 과정에 성 미술이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은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 노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가톨릭미술가협회장을 역임한 이남규옹은 『토착화에 있어서 최종적인 문제는 예술가 개개인의 역량이 문제가 된다』며 『결국 교회 미술의 토착화란 미술가 개인개인에 의해서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교회 미술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예술가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 안에서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해주어야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가톨릭 미술가들의 활동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 예술가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이 돋보임에 따라 교회 미술의 발전과 토착화를 위한 노력 역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최종태 회장…미술관 건립에 전력


“비서구권서 유일하게 토착화 성과”

 

 

『한국교회의 성 미술은 나름대로 비서구권에서는 유일하게 토착화에 성과를 거둬왔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90년대 초부터 이른바 교회 미술 운동을 펼쳐온 가톨릭 신자 미술가들의 교회 미술 진흥 노력은 교회 미술의 토착화 시도와 맥을 같이 한다. 척박한 문화적 토양을 풍요하게 일궈내기 위해서 꾸준하게 쏟아온 미술인들의 노력은 이제 상당한 성과를 축적했고 교회 미술 발전을 위한 노력이 토착화의 길을 걸어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최종태(요셉, 서울대 명예교수) 회장은 「교회의 예술화」를 위한 제1단계 교회미술운동을 정리하면서 이제 「예술의 복음화」를 위한 두 번째 단계의 교회미술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최회장은 그러나 여전히 과제는 남아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아직도 문화, 교회미술에 대한 인식이 좀더 확산되어야 하고 교회와 미술가들이 합심해 노력함으로써 교회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최회장은 오래 전부터 사제들의 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신학교에 교회 미술 관련 강의가 개설돼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제작된 미술품들을 전국 차원에서 등록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배들이 제작한 훌륭한 미술품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데 이들 작품들을 총괄적으로 목록을 만들어 관리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교회 미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복제 성물 문제. 최회장은 아직도 저급한 복제 성물들이 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다며 이러한 복제품들을 교회 안에서 몰아내고 신앙과 정신이 깃든 예술품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최회장은 성물의 한국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신자 미술가들의 가장 큰 숙원사업 중 하나는 바로 한국 가톨릭 미술관 건립이다.

 

『한국 교회는 가톨릭 미술관을 건립할 저력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특히 저명한 신자 미술인들이 많이 있어 미술관이 건립되면 자신들의 작품을 기꺼이 기증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03년 3월 23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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