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기타 자료 기타 가톨릭자료실 입니다.

형제적 싸크라멘트

스크랩 인쇄

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7 ㅣ No.168

죄악으로 인해 고갈(枯渴)된 존재

인간을 위해

생명의 양식이 되려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의지는,

떡과 술의 형상으로 성체와 성혈에 내재되어

우리에게 오신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분은  

신학자 발타자르의 말처럼

고난받는 이웃 속에 내재되어

그를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우리는

떡과 술의 형상으로 오시는

주님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취하며

영생의 양식을 깨닫게 되고,

또 고난받고 있는 형제를 통해 나타나시는

주님을 사랑으로 받아모시면서

생의 빛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서로가 생명의 양식을 나누게 된다.

 

앞의 경우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취함으로써,

뒤의 경우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면서 참으로 살게 된다.

 

나를 비움으로써 가득 채워지고,

나를 줌으로써 가득 받게 된다는

측면에선 그 둘은 동일하다.

 

"주 네 하느님을 지성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나 하느님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앞서

떡과 술이 되어 나를 찾아 오셨고,

내가 이웃사랑을 펼치기 전에

그분 스스로 이웃되어 내 곁에 이미 계신다.

 

발타자르가 밝힌

’형제의 싸크라멘트’란 이런 것이 아닐까.

 

고난받는 형제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니,

미사 속에서 떡과 술을 받아먹고 마시며

성체와 성혈을 모시듯,

고난의 이웃과 그 고통을

내 몸인양 여기며 나의 삶 속에 받아들임으로

나는 성찬례식을 거행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니,

따라서 성체와 성혈에 깃들인 생명력과

고난의 형제가 지닌 고통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면 고난의 이웃은 도대체 누구인가.

 

반드시 그들이 마태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언급된 사람들,

곧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 등등의 그들뿐일까.

 

오히련 모든 이 모두가 다 그들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일지라도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한 순간엔

고난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외적 조건으로서나

내적 조건으로서나 간에

모든 게 캄캄한 어둠에 쌓이고,

존재가 찢겨진 연(鳶)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이는 앞에서처럼 그것이

병마나 가난

그리고 감옥살이 같은 갇힌 상황 때문에 올 수도 있고,

갑작스레 닥치는 시련과

불행으로 인해 충격적으로 올 수도 있고,

생의 허무감이나 절망감에서 올 수도 있고,

정서적인 불안에서 올 수도 있고,

하여튼 인생은

한 인간에게 무수히 그런 순간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곤경에 처한 그들 모두가

바로 고난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척이나 약하기만한 우리 서로를

서로가 온전히 받아 주고

서로를 지지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우는 자와 함께 울어 주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싸크라멘트가 되고

또 그것을 온전히 받아 줌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 세상을 성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니,

우리는 고난의 형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마치 떡과 술의 형상으로 오시는

그분의 성체를 모시듯

온전히 받아 모셔야 하는 것이다.  

 

복음적 형제애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1,23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