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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0) 유현석 요한 사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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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5-19 ㅣ No.342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0) 유현석(요한 사도) 변호사


실천하는 신앙인, 인권변호사, 약자들 벗으로

 

 

-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약자들의 벗으로, 인권옹호자로 산 유현석 변호사.

 

 

"법은 가진 자의 무기가 아니라 낮은 자를 위한 지혜가 돼야 한다."

 

변호사 유현석(요한 사도, 1927~2004)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 한마디를 보면 다 드러난다. 5ㆍ16 군사 쿠데타 당시 옥고를 치르고 엄혹했던 군부독재시절 '인권 변호사'로 산 그의 삶은 문자 그대로 간난신고였다. 자녀들 학비를 대지 못해 변호사로 개업했으면서도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인권변호사로 '신앙적 삶을 실천한' 참 신앙인이었다.

 

특히 무고한 시민들 피로 얼룩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다들 죽음이 두려워 오금을 펴지 못하고 '벌벌 떠는' 시기에도 그는 동료 변호사들을 다독이며 인권변론에 나섰다. 이돈명(토마스 모어) 변호사의 회고에 따르면, 광주민중항쟁과 관련된 송사는 그가 다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을 비롯해 이 땅 민주화를 위해 몸 바친 이들 가운데 그의 변론이나 도움, 격려를 받지 않은 이들이 없다시피했다. 부드러웠지만 강직했고, 따뜻했지만 올곧게 살아간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발자국마다 정의의 꽃이 피었네...

 

유현석 변호사는 1927년 생으로 부친 유주성과 모친 한정순씨 사이 3남 2녀 중 맏이다.

 

충남 서산 출신인 그는 경기공립중(경기고 전신)을 거쳐 1945년 경성제대 예과 문과을류(법학과)에 입학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가 있던 중 해방을 맞아 좌ㆍ우익 갈등과 혼란이 계속되자 낙향,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 서기로 일하다가 1946년 대학을 중퇴했다.

 

- 유현석(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변호사가 재속 프란치스코회 대전형제회 허원식을 마친 뒤 재속회원들과 함께하고 있다.

 

 

이어 전쟁 와중이던 1952년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 법조인의 길을 걷는다. 그해 10월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육군 6사단 및 육군본부 법무장교, 서울지방법원 및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및 서울형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냈다. 꼭 13년 8개월이었다.

 

법무장교 재임 때엔 김창룡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도 처리했고, 여러 법원에서 각종 민ㆍ형사사건을 처리하며 유능한 법관들이 거치는 엘리트 코스도 두루 거쳤다.

 

그의 삶이 더 빛나는 것은 그 이후다. 1966년 3월 돌연 판사직을 떠난 그는 김제형, 이돈명, 이동신 변호사와 함께 국내 첫 전문 변호사 법률사무소(Law Firm)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연다. 김제형ㆍ이돈명 변호사가 공동 수임과 공동 수행, 공동 수입, 공동 지출, 공동 운영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합류를 권유하자 그 뜻에 공감해 삶의 길을 바꾼 것이다.

 

로펌에 합류한 이후 그는 38년을 인권변호사들은 물론 재야 법조계의 영원한 좌장(座長)으로 살았다. 특히 지학순 주교 사건을 비롯해 김지하 시인 사건, 3ㆍ1구국선언 사건,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권인숙 성고문 재정신청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명지대 강경대 사망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김근태 고문 사건 등 주요 시국사건 때마다 변론에 나서 인권 변론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4년 타계 직전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의 대리인단 대표를 맡기도 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 하나하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고백하곤 하던 그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변론 당시에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피해자들을 위해 변론에 나선 그는 군사법정 재판관에게 "용기를 내 법관으로서 양심에 맞는 판결을 해달라"고 고언했으나, 재판장은 도리어 "재판장에게 훈시하려 드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법조인으로 갖춰야 할 덕목 지식ㆍ양심ㆍ용기 가운데 용기를 가장 중시했다.

 

법률가로서도 소홀하지 않았다. 해박한 법률 지식에 근거해 끊임없는 탐구를 바탕으로 「대한변호사협회지」(현재 월간 「인권과 정의」) 등을 통해 수많은 판례 평석을 남겼다. 또 민사법 분야에선 실정법과 그 운용상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한국 법조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구령은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생 인권 변론 외길을 걸어온 유현석(앞줄 가운데) 변호사가 1995년 2월 인권변호사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가 세례를 받은 건 1950년 12월 초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였다. 서산농림학교 교장이던 아버지와 함께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 서기로 재직 중이던 그는 공산 치하에서 숨어 살며 고초를 겪었다. 전쟁 중 겪은 고통을 되새기던 그는 수복이 되자마자 당시 서산본당에 와 있던 유봉운 신부를 찾아가 불문곡직 세례를 청했다.

 

유 신부가 세례는 교리를 배우고 준비를 한 후에야 받는 것이라고 답변하자 그는 불쑥 "죽더라도 구령(救靈)이나 하고 죽어야겠다"고 대꾸한다. 한 청년의 뜨거운 신앙고백에 유 신부는 흔쾌히 세례 요청을 받아들여 4대교리를 가르친 다음 한달 열흘 만에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 그는 하느님 정의를 실천하는 바쁜 변론 와중에도 평생을 '교회의 아들'로 살았다. 1955년에는 대전 대흥동주교좌본당 레지오 마리애 단장 및 사목회장을 지냈고, 1959년 12월 20일에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착복식을 하고 허원서약한다. 그는 단독회원으로서 일상에서 봉사를 통해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았다. 셋째 아들인 유이규(프란치스코) 신부를 작은 형제회 성직수사로 이끌기도 했다.

 

그는 1972년 서울 제21차 꾸르실료 교육을 이수한 뒤 날마다 새벽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해 여생 평일미사를 거르지 않았다. 또 서울 혜화동본당 총회장,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장, 교회연구소 후원회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 천주교 인권위원회 고문,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이사를 각각 역임했다. 또 수십 년간 서울대교구 고문변호사로 활약했다.

 

그의 한 생애는 신앙을 토대로 인권 보장과 민주화, 사회 정의 실현에 헌신한 세월이었다. 1980년대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장을 지내면서 동시에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인권위원장과 정법회ㆍ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원로고문으로 활약했다. 한국법학원 남북관계법률연구위원회가 발족했을 땐 법률관계도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며 위원장이 돼 겨레 일치에 기여했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로도 헌신했다. 또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에 위촉됐고, 2002년에는 언론인권센터가 발족하자 초대 이사장이 돼 활동했다.

 

이렇게 재야에서 활동하면서도 그는 한번도 인권운동가나 활동가들이 빠지기 쉬운 독선이나 아집, 배타성을 보이지 않고 언제나 온건하고 합리적이었으며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늘 겸손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그는 '늘 그 자리에 있는' 든든한 울타리와도 같았다. 그는 억울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변론을 통해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평신도로서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을 실천했다. 아무 대가 없이, 아무런 빛남도 없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섬긴 '외로운 이들의 벗'으로 살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4년 5월 그의 장례미사 강론에서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사셨다"며 "인간 존엄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수십 년간 한 푼 보상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헌신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선종 1주기를 맞아 그의 영전에 추모문집 「하늘엔 영광 이 땅엔 정의를」(도서출판 공동선), 유고집 「하느님의 법 사람의 법」(공동선) 등 2권이 헌정됐다.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인권변호사로, 약자들의 벗으로 산 고인의 뜻을 기리는 법률가들과 성직자, 사회운동가, 유족들의 헌사였고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이었다.

 

또 2009년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유족 출연 기금으로 '유현석 공익소송기금'을 출범해 고인의 뜻을 잇고 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8일,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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