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가톨릭 교리

연장자 교리 교안 (5):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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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3-15 ㅣ No.45

5. 삼위일체(三位一體)

 

 

 5.0 인사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어요. 봄이 되는 듯하다가 또 추워지고, 다시 날씨가 풀린 듯하다가 움츠러들게 하는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건강에 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어르신들로서 건강에 조심해야 하는 것은 본인들을 위한 행동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녀를 위한 행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몸이 아픈 사람은 당연히 뭔가 준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아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별 불만없이 지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큰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것이겠습니까?  너무 서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는가 싶기도 하네요.

 

오늘은 그렇게 분리돼있는 듯 보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돼있는 가족의 끈, 혈연(血緣)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하느님에게서도 찾아보고 천주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가족의 혈연관계와는 꼭 일치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느님에 관한 일을 인간이 설명하겠다고 덤비는 일 자체가 무리에 속하는 일이기는 합니다. 같은 관계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 교리의 내용은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입니다. 삼위일체는 셋으로 보이고 구별하여 알아듣는 하느님의 특징이지만 사실은 ’하나이시고 한 분’이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 하느님의 속성(屬性)에 대한 것입니다.

 

 5.1 시작기도

우리가 시작하는 이 행위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은총을 받아들이고 실현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시작기도를 하겠습니다. 시작기도는 오늘 말씀드릴 하느님의 특징을 표현하는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에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올바로 살기를 애쓰시며 도움을 주시는 힘인 성령(聖靈, 성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내용을 미리 짐작하기는 어려우시겠지만, 시작기도를 하겠읍니다.

 

 5.2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의 의미

’삼위일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죠.  이 말의 의미를 신학에서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보이는 세 위격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들은 어려운 말로 돼 있읍니다.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릴 내용도 그 정도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읍니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라는 것은 하느님의 특성을 인간의 언어로 정리한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인간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특성까지도 언어로 표현하겠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하고도 아무런 탈없이 살겠다고 다짐하는지 놀라운 일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하느님의 시각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무모한 일을 하려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그렇게 헤아릴 수 있다면, 인간을 너그럽게 봐주시는 하느님의 업적과 의도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의 속성을 표현하려는 우(愚)를 범한다고 꾸중하기에 앞서서 그런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삶에서 알아듣고 다짐할 내용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순서일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우리가 아는 용어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의 반복이 되긴 합니다만, "세상 만물의 존재를 있게 한 만물의 아버지로서 ’성부’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오셨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신 아들 ’성자’, 그리고 그 업적이 지속되도록 교회를 통하여 작용하는 힘인 ’성령’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실상은 한 분이요 한 몸"이라는 것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5.3 삼위일체를 수용해야 할 이유 - 내가 내 삶을 사랑하기에.....

우리가 그날 그날을 헐떡이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하느님이 한 분이든지 두 분이든지 아니면 세 분이든지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신경 쓰고 우리의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올바로 깨달아 알고 올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 역할로 드러나는 한 분 하느님’은 바로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바라보고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판단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특성을 우리가 인간의 용어로 정리하는데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특성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의 사랑을 다른 대상에게 베풀어주고 또한 다른 이의 사랑을 받으며 삽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사회가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사회에서만큼 사랑이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는 사회는 없읍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충만함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교회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창조론’이라고 학문에서는 말합니다. 어르신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이라는 학설과는 다릅니다. 진화론은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의 세포였던 것에서 여러 개의 세포로 가진 동물이 생겨나고, 한 종류에서 또 다른 종류가 생겨나고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 세계가 생겨난 지 45억년 또는 50억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마치도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있는 것처럼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 삼위일체의 사랑에 근거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창조론에서는 그 입장이 다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세 위격(位格)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가 닿을 수 없는 계시(啓示) 진리이기에 우리에게는 그저 받아들이는 자세만이 필요하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재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머리로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세상을 좋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큰 뜻을 완벽하게 수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5.4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 1. -- 아우구스티노의 이야기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이 사용하는 이야기의 한가지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야기가 있읍니다.  이 성인은 354년에 태어나 430년까지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있을 히포에서 태어난 분입니다. 이 분은 일반서점에서도 팔리는 책 ’고백록 또는 참회록’의 저자로 알려진 분입니다.

이 분은 카르타고 대학에서 수사학(修辭學)의 권위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분이 신앙을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방탕아의 표본이었을 정도 였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뀌게 된 삶의 이력서는 자필로 된 ’고백록’이라는 책으로 낸 것이죠. 이 분이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로 방탕한 생활에서 돌아서고 이태리 밀라노에 있던 암브로시오 주교와의 만남을 인연으로 해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됩니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고 훗날 주교까지 됩니다. 이분이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중의 핵심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알아들으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닷가를 왔다갔다 거니는데, 얼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웬 어린 아이가 쓸 데없는 일을 하더라는 것이죠. 그 일은 작은 조개 껍데기 하나를 들고 바닷가 물이 치는 곳에 모래 웅덩이를 만들어놓고 바닷물을 퍼서 넣더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어른은 하나도 없고...

 

얘, 너 뭐하고 있니?  바닷물을 이 조개껍데기로 여기에 모두 퍼 담으려고 해요.  얘야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그것은 불가능하단다...  이게 불가능하다면 아저씨가 고민하고있는 삼위일체 교리를 알아듣는 것도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하느님은 이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모두 퍼 담을 수 있지만, 아저씨는 그 신비를 알아낼 수 없어요. 다음 순간 아이는 사라져버리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하던 생각을 접고 새로운 길로 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진리를 신앙에 의해서만 수용할 수 있는데 그러한 진리를 가리켜 계시진리라고 합니다. 모든 것의 주도권은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하느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이죠.

 

 

 5.5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 2. -- 초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바라보는 초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초는 사람이 빛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빛을 내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을 옮기려고 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음 달 정해진 날, 어르신들의 세례때가 되면 초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강조하는 말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몸체가 있고, 불을 켜면 빛을 내고, 가까이 손을 대면 열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가지만을 구별해서 초라고 말할 수는 없는 복합체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5.6 삼위일체에 대한 결론

우리가 삶에서 올바른 행동을 하려면, 몸이 건강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그 몸을 올바로 움직일 수 있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올바르게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정도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한 분 이신데, 그 하느님을 우리가 느끼는 방법은 세 가지, 그 하느님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엄청난 보이지 않는 끈이 작용해서 기묘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도 삶의 정신과 모범을 통하여 그 하느님의 특성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입니다.

 

 5.7 마침 기도

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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