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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기 교회 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경기도 마재의 나주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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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9 ㅣ No.668

초기 교회 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경기도 마재의 나주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

 

 

1. 머리말 

2. 정씨 형제의 가계와 고향 마재
3. 정약전 · 약용 형제의 천주교 수용과 마재 공동체의 형성
4. 정약종의 천주교 수용과 마재 공동체의 분원 이전
5. 정씨 형제 이후의 천주교와 신앙의 연속성
6. 맺음말

 

 

1. 머리말

 

본고에서는 ‘경기도 북부 지역’을 한수 이북, 특히 현재의 의정부교구 사목 관할 지역과 관련하여 ‘북한강 이북 지역’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1)에는 두 집안이 이 지역의 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다.2) 하나는 남양 홍씨 집안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洪敎萬(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抱川에서 순교한 洪?(레오) 부자가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경기도 마재[馬峴]의 나주 정씨 집안으로 교회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丁若銓 · 若鏞(사도 요한), 그리고 1801년의 순교자 丁若鍾(아우구스티노) 형제가 여기에 속한다. 


포천의 홍씨 부자에 대해서는, 그 신앙 행적과 관련된 자료들이 비교적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3) 그러나 홍씨 부자가 거주하던 포천 지역은 현재 의정부교구가 아니라 춘천교구의 사목 관할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또 홍교만은 마재의 정씨 형제들과 사돈 간이므로 두 집안 사이에 있었을 신앙 교류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와 관련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마재의 나주 정씨 형제들은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이었고, 창설기의 교회를 이끌어간 지도층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들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굳이 관련 자료를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통념상으로 이미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는 마재 정씨 형제들에서 시작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실제로 정씨 집안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기존 연구에서 자세히 밝혀지고 있다.4)

이에 본고는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마재 정씨 형제들의 천주교 입교 과정과 그 시기, 활동 내용 등을 우선 정리해 보았다. 그런 다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안의 천주 신앙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하는 점과 그 신앙이 후대에 끼친 영향 등을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정씨 집안의 천주 신앙이 한국 천주교회사, 좁게는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갖는 위치를 설명해 보려고 한 것이다.


2. 정씨 형제의 가계와 고향 마재

정씨 형제들의 가계도는 다음에 수록한 것과 같다.

그 선대의 경우는 5대조(나주 정씨 18세) 丁時潤이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 병조참의 · 교리를 지낸 것을 끝으로 고조 道泰, 증조 恒愼, 조 志諧는 포의로 세상을 마쳤다. 5대 시윤은 1694년(숙종 20)의 甲戌換局 때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96년 이후 세자시강원의 弼善에 임명되었으나, 1698년 백성의 기근을 보고도 올바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조정의 신하들을 비난하면서 다시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한 시윤은 1701년(숙종 27)에 서울을 떠나 가족과 함께 마재[馬峴]로 낙향했으며, 이후 나주 정씨 집안은 마재에서 세거하게 된다.5)


                                        〈마재의 나주 정씨 가계도〉6) 
                                                                                                   +표는 천주교 신자 혹은 순교자
 

당시 마재의 행정 구역명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였다.7) 한강을 중심으로 설명한다면, 광주 마재와 양근 분원(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은 다음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대표적인 犬牙相入地(즉 斗入地) 형태를 띄고 있었다. 정약용은 자주 자신의 고향을 ‘소(초)내’[苕川]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곧 한강의 두물머리[兩水里] 즉 이곳 강변에 자리잡고 있던 ‘마재’를 지칭한다. 洌上(漢水 · 洌水의 상류)도 이 마재 혹은 소내의 별칭이었다. 


 
1872년 지방도 : 광주(규장각 소장)


이곳에서 정씨 형제의 부친 丁載遠(1730~1792)은 세 명의 부인에게서 若鉉(1751~1821), 若銓(1758~1816), 若鍾(1760~1801), 若鏞(1762~1836), 若鐄 등을 얻었다. 그리고 1767년 음서로 연천현감에 임명되었으며, 1776년 호조좌랑에 임명된 후 화순 · 예천현감과 진주목사를 지냈다. 정씨 형제들이 마재를 떠나 서울을 오가게 된 것은 부친이 호조좌랑에 임명된 이후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된 근거지는 여전히 마재였고, 특히 장남 약현은 마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또 4남 약용이 1782년 이후 서울 창동(倉洞 ?泉)과 회현방으로 이주한 데 반해 2남 약전과 3남 약종은 오랫동안 마재에 거주했다.8) 



3. 정약전 · 약용 형제의 천주교 수용과 마재 공동체의 형성


마재 정씨 집안 중에서 정재원은 물론 장남 약현도 서학이나 천주교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를 수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집안에서 서학, 특히 천주 신앙을 가장 먼저 접한 인물은 2남인 硏經齋(혹은 巽菴) 若銓과 4남인 俟菴(혹은 茶山) 若鏞임이 분명하다.

우선 약전은 1776년 부친이 호조좌랑에 임명된 후 서울에서 李潤夏(?~1793), 자형李承薰(蔓川, 1756~1801), 金源星 등과 石交를 맺고 지내면서 鹿菴 權哲身(1736~1801)의 문하에 들어가 星湖 李瀷의 학문을 따른 것으로 나타난다. 또 그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 알기 전에 맏형 약현의 처남인 李檗(曠菴, 1754~1785)으로부터 曆數之學에 대해 들으며 마테오 리치(M. Ricci, 利瑪竇)의 《幾何原本》과 같은 서양 서적을 연구한 적이 있었고, 둘이 潮汐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9) 아우인 약용도 혼인한 다음해 즉 1777년(16세)에 기호남인 출신인 李家煥(錦帶, 1742~1801)과 자형 이승훈의 영향을 받아 성호의 유고를 처음 읽은 뒤 그의 학문을 따랐다. 특히 약전 · 약용 형제는 1777년부터 이벽과 학문을 토론하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다.10) 


1774~1776년은 권철신의 문도 즉 鹿菴系가 형성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앞에서 언급한 이윤하, 정약전, 김원성을 비롯하여 茯菴 李基讓(1744~1802)의 아들 李寵億, 李存昌(1759~1801), 洪樂敏(1751~1801), 尹有一(1760~1795) 등이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벽과 이승훈, 권철신의 조카 權相學, 정약용 등이 권철신의 학문을 따르게 된 것도 대략 이 무렵이었다.11) 바로 이와 같은 학문적 분위기 아래서 마재 정씨 형제들은 1776~1777년 무렵에 이미 천주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西學을 접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정약용은 1811년 강진의 배소에서 중형 약전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우리들이 능히 천지의 광대함과 일월의 밝음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어른(즉 성호 이익)의 힘이었습니다”12)라고 하였다. 정약전 · 약용 형제의 서학 세계는 이익을 사숙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열렸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물론 이들이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실학적 측면에서의 매력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약용은 1797년에 올린 〈辨謗辭同副承旨疏〉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신은 일찍이 이른바 서양 邪說이라고 하는 책을 보았습니다. … 무릇 일찍부터 그 내용이 마음속으로 끌려 대단히 흠모하였고, 이를 모두에게 자랑하였습니다. … 신이 이 책을 얻어 본 것은 대개 약관 초기였으며, 이때에는 본래 일종의 풍조가 있었으니 天文 · 曆象의 학문과 農政 · 水利의 기계와 測量 · 推驗의 방법에 대해 잘 설명하는 이가 있으면 세상에 서로 전하면서 그를 가리켜 해박하다고 했습니다. 신은 어렸을 때 이를 곁눈질해 보고 몰래 혼자서 흠모하였습니다.13) 


여기에서 정약용이 말한 천문 · 역상 · 농정 · 수리 · 측량 · 推驗은 바로 실학적 학풍이었고, 그가 젊었을 때는 이와 관련된 서양 서적들이 학문의 폭을 넓히는 데 필요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1782년에 정약용이 “슬프구나 우리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 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14)라는 시에서 언급한 ‘만리 밖의 성현’도 서학의 성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까지 정약용 형제들은 서양의 과학 · 기술 서적에 담긴 단편적인 천주교 교리들, 그리고 직접 천주 신앙을 설명한 서적들도 서학의 한 분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러면 정약전 · 약용 형제가 서양의 학문인 천주학을 새로운 종교인 천주 신앙으로 이해하는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에 대해 정약용은 중형 약전이 일찍이 이벽을 따라 노닐면서 “마침내 新敎(즉 천주교)의 학설을 듣고 흔연히 기뻐했으나 몸으로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15)고 했는데, 그 시기는 서학을 접하는 1776~1777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약용이 1779년 겨울에 열린 走魚寺講學16)에 대해 언급하면서 여기에 참석한 중형 약전과 스승 권철신과의 관계, 이벽의 강학 참석 등을 중요한 내용으로 설명한 점에서 볼 때, 정약전은 적어도 주어사 강학이 있기 전인 1776~1779년 사이에 신교(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이를 새로운 신앙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17) 


반면에 정약용 자신은 1784년 4월 보름에 이벽으로부터 처음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이를 신앙으로 이해하게 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갑진년(1784년, 23세) 여름, 李檗을 좇아 배를 타고 斗尾峽(검단산과 예봉산 줄기가 만나는 한강의 좁은 뱃길)을 내려가다 처음으로 西敎에 대해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18)

갑진년 4월 보름, 큰 형수(이벽의 누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약용과 약전)가 李德操(즉 이벽)와 함께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초, 인간과 신과 생사의 이치를 듣고 황홀하여 놀랍고 의아함을 이기지 못했으니,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다는 《莊子》의 말과 같았다. 한양에 와서 또 이벽을 좇아 《천주실의》와 《칠극》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흔연히 그것에 마음을 기울였다.19)

1784년 4월은 이벽이 이승훈으로부터 북경에서 가져온 새 서적들을 건네 받아 탐독하던 시기였다. 이후 이벽은 같은 해 겨울, 이승훈, 권철신의 아우 權日身(稷菴, 1742~1792), 정약전 · 약용 형제를 수표교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 불러모은 뒤 이승훈으로부터 함께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니,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다. 이때 이벽은 세례자 요한[若翰]을,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정약용은 사도 요한[若望]을 각각의 세례명으로 정했지만, 정약전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20)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정약전도 이후 교회의 지도층으로 활동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마재의 정약전 · 약용 형제는 녹암계가 형성되던 시기인 1776~1777년 사이에 서학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76~1779년 사이에는 2남 정약전이 먼저 천주학을 서양의 새로운 종교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1784년 4월에는 4남 정약용이 천주 교리를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이들 형제에게 천주 교리를 설명해 준 사람은 정약용이 만년까지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벽이다. 그러다가 1784년 겨울의 첫 세례식에 참여하여 정약용이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니, 마재의 신앙 공동체는 이때부터 정식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재는 분명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요람지 가운데 하나였다. 아울러 마재 공동체는 첫 세례식이 베풀어진 서울 이벽의 집(수표교 인근), 이승훈의 집(서울 반석방 중림동의 焰硝橋 부근), 양근 남시면의 한감개(大甘浦, 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있던 권일신의 집과 천주 신앙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이벽과 정약전 · 약용 형제의 관계는 물론, 정약용이 언급한 것과 같이 ‘마재 · 두미협 - 수표교’로 이어지는 천주 신앙의 줄기는 교회 창설을 가능케 해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4. 정약종의 천주교 수용과 마재 공동체의 분원 이전

정약전이 첫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약용의 설명과 같이 ‘몸으로는 천주교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일수도 있고, 이가환과 같이 ‘직접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자 한 때문’21)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정약전이 1786년 봄에 구성된 평신도들의 假聖職者團 내에서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1787년 이승훈에게 서한을 보내 ‘신부 印號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신부로 임명되었다’는 점을 들어 瀆聖罪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도 바로 정약전이었다.22) 실제로 정씨 형제는 1785년 明禮坊事件이 일어나면서 한때 부친으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했지만,23) 정약전은 1787년(정미년) 겨울 泮會事件이 일어나기 전까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 사건 이후 부친이 천주교를 엄금하면서 교회 활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24)

정미년의 반회사건은 진사 정약용이 성균관 앞의 泮村에서 동료들과 함께 천주 교리를 연구하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이 사건은 이듬해 초 동료인 洪樂安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면서 파문을 낳았다. 그 결과 당사자인 정약용은 이가환 · 이승훈과 함께 親西系 즉 ‘邪學의 三兇’으로 지목을 받게 되고, 기호남인은 攻西系와 親西系로 분열되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이후에도 한동안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의 제사 폐지령과 다음해의 珍山事件 이후 점차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고, 1795년의 北山事件으로 인해 충청도 金井察訪으로 좌천되면서 교회와의 단절을 분명히 하게 된다.26) 


그에 앞서 정약전은 아우인 3남 정약종에게 천주 교리를 전하였다. 정약종 자신이 1801년의 추국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그가 처음으로 중형 약전에게서 천주 교리에 대해 듣게 된 것은 27세 때인 병오년(1786년) 3월이 분명하다.

묻기를, 네가 체포될 때에 압수된 日記에 보니, 병오년 3월에 ‘중형에게서 이른바 세례를 받았다[受洗]’는 말이 있는데, 너는 과연 병오년 3월부터 邪學을 시작하였느냐?

진술하기를, 저는 병오년 3월에 과연 이 천주학을 제 중형에게서 들었습니다[聞此學].27)

정약종은 이후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는데, 이에 대해 최창현은 훗날 “정약종에게 세례를 준 신부는 이승훈이고, 교리를 가르쳐 준 대부는 권일신이다”28)라고 진술하였다. 이처럼 정약종은 중형 약전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권일신을 대부로 세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아마도 그 입교 시기는 제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1786년 3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 즉 1786~1787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9) 이후 마재 정씨 집안의 신앙은 이제 정약전 · 약용 형제로부터 3남인 정약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물론 입교 직후부터 정약종이 교회 지도층으로 부각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황사영이 설명한 것처럼 그는 입교한 뒤 여러 해 동안 집안에 거처하면서 천주 교리서를 연구하는 데 힘쓴 것으로 생각된다.30) 또 1787년의 반회사건과 1791년의 진산사건 이후에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친에게 천주교와의 단절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이때 그는 자신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중형 약전이 교회와의 단절을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실천하였다. 정약전도 이에 대해 훗날의 추국에서 “신해년에 나라에서 (천주교 신봉을) 금지한다는 법령이 있은 뒤에도 아우인 약종은 이에 깊이 빠져 아무리 만류하고 금지해도 끝내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31)라고 진술하였다.

정약종은 이후 둘째 부인 柳召史(체칠리아, 1761~1839)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장남 哲祥(가롤로, 1782?~1801)에게도 천주교 신자로서의 모든 본분을 정성껏 가르쳤다.32) 그러다가 집안의 박해로 인해 마재에서의 신앙 생활이 어렵게 되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데, 아마도 그 시기는 형 정약전이 설명한 것과 같이 제사 폐지가 문제되어 발생한 1791년의 진산사건과 이로 인한 辛亥迫害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정약종이 새로운 거처로 정한 곳은 마재에서 멀지 않은, 즉 두물머리 건너편에 있는 양근 分院(양근군 南終面 분원리, 현 광주시 남종면)이었다.33) 신앙의 요람지 마재의 신앙 공동체가 분원으로 이전된 것이다. 정약종의 차남 丁夏祥(바오로, 1795~1839)과 딸 丁情惠(엘리사벳, 1797~1839)도 바로 이곳 분원에서 탄생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재의 신앙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정약종 · 철상 · 하상 부자는 물론 정약현의 사위들인 황사영, 홍재영 등이 신앙을 지닌 채 수시로 마재를 왕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 초부면과 양근 경계도(규장각〈해동지도〉, 1750년대)


 
광주 초부면과 양근 경계도(김정호,〈대동여지도〉, 1861년)


정약종은 분원 이주 이후 인근의 양근 · 여주 신자들뿐만 아니라 서울 신자들과의 교류를 점차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당시의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洪翼萬 : 갑인년(1794년)에 이르러 또 중국에서 전래된 책자를 본즉 文理가 단출하면서도 뜻이 심오하여 점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었는데도 신자들은 오히려 이를 믿지 않았으므로 종종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의 집에서 강론하였습니다.34) 


· 李國昇 : 정사년(1797년)부터 황사영의 집에서 강습하였는데, 함께 교리를 연구한 사람들은 최창현, 현계흠, 尹鍾百, 홍재영, 정약종, 孫仁元, 崔仁喆, 南松老, 이합규, 황사영 집안 사람, 이름을 모르는 李哥 및 봉사하는 여러 사람들이었고… 황사영의 집을 왕래하면서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 필제 형제 등과 함께 강론을 하였습니다.35) 


· 崔昌顯 : 무오년(1798년)에 다시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과 상종했으며, 정약종이 여러 차례 찾아왔습니다.36) 


정약종은 1794년 무렵부터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교리 연구 모임(즉 同學共同體)을 갖기 시작했으며, 1797~1798년 이후에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지도층 신자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1797~1798년은 바로 1794년 말에 입국한 중국인 周文謨 신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므로, 정약종과 주문모 신부와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1795년의 북산사건 이후 아우인 정약용이 교회와 단절되어 간 반면에 정약종의 교회 활동은 오히려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정약종은 신자들의 교리 이해와 천주교 전파에 유용하게 사용된 한글본 교리서 《주교요지》(상 · 하 2권)를 저술하였다. 또 1799년 초에는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明道會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37) 주문모 신부의 명에 따라 천안 옥중에 있던 李存昌과 연락한 뒤 북경에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였고, 같은 해 말에는 金有山 편으로 이를 북경에 전달하기도 했다.38) 그러다가 1800년 4월 여주에서 李中培 등이 체포된 데 이어 5월에는 양근에서 權相問이 체포되자, 즉시 양근 분원을 떠나 한강 뱃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이주하였다.39) 서울로 이주한 뒤 그는 우선 여회장 姜完淑 등의 도움으로 典洞 안의 靑石洞에 있던 文榮仁의 집을 빌려 살다가 두 달 후에는 아우인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남대문 안으로 이주하여 신유박해로 체포될 때까지 살았다.40) 



5. 정씨 형제 이후의 천주교와 신앙의 연속성

마재 정씨 집안의 신앙은 정약종을 거쳐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약현의 사위인 黃嗣永(알렉시오, 1775~1801)과 洪梓榮(프로타시오, 1780~1840), 정약종의 장남인 정철상 부부, 차남인 정하상과 딸 정정혜가 그들이다. 이 중에서 풍산 홍씨 집안의 홍재영은 녹암계 인물이었던 부친 洪樂敏의 신앙을, 정철상의 아내(홍교만의 딸)는 포천 남양 홍씨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정씨 집안의 영향으로 천주 신앙을 수용하게 된 2세대 인물로는 황사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 西部 阿峴坊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성장한 황사영은 16세 때인 庚戌年(1790년)의 增廣試(8월 7일 개장, 9월 7일 발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41) 마재 정약현의 딸 丁命連(일명 蘭珠, 1773~1838)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 (황사영 알렉시오는) 丁氏 집 딸과 혼인하여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42) 


· 제(황사영)가 洋學을 배운 지는 11년이 됩니다. 처음 배운 이듬해(즉 1791년) 나라의 금령이 지엄하여 친척과 벗들이 모두 이를 배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43) 


· 신해년(1791년)부터는 천주교가 점점 성하게 되었지만, 나라의 금령은 대단히 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저(황사영)는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스스로 익혔을 따름입니다.44) 


· (황사영이) 절친한 인척 정약종과 가까운 친척 이승훈을 따라 과거를 폐지하고 오로지 천주학에 매달려서 밤낮으로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로 공부하였다.45) 


이와 같이 황사영은 진사에 합격하고 혼인을 한 1790년에 처음 천주 교리를 접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이듬해부터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고 스스로 교리를 익혔으며, 을묘년(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46)

아마도 황사영이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위의 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나라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이 천주 교리를 실천하던 처숙 정약종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황사영이 처 명련(마리아)에게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녀가 혼인하기 이전에 이미 세례를 받았다면 황사영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혼인 이후에 남편 황사영과 함께 입교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재 정씨 집안의 신앙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정약종을 비롯하여 황사영, 홍재영, 정철상 등이 순교하고, 선구자인 정약전 · 약용 형제가 유배형을 당하면서 천주 신앙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제주도로 유배를 간 황사영의 아내 명련은 1838년(66세) 유배지인 제주목 대정현에서 사망하였다.47) 그리고 정씨 집안의 신앙은 정약종의 아내 유조이, 차남 하상, 딸 정혜로 이어지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로 다시 한번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정약용이 1818년(57세) 해배 후에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그의 장남 學淵도 만년에 영세 입교한 뒤 사망했다고 한다.48) 또 정약종의 누이동생 즉 蔡弘謹의 아내(채제공의 며느리)는 16세 때 과부가 되었으며, 노년에 신앙을 얻은 뒤 1850년경 崔良業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49)

이제 신앙의 요람지 마재에서 시작되어 분원과 서울로 이어졌던 나주 정씨 집안의 천주교 신앙은 인맥상으로 볼 때 1850년대를 기점으로 일단 그 맥이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집안의 신앙은 또 다른 경로를 통해 후대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 정약종이 저술한 《주교요지》와 정하상의 〈上宰相書〉가 전사본으로 전해지면서 널리 읽혀졌다는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50) 훗날 安重根(토마스, 1879~1910)이 《주교요지》와 〈상재상서〉로 이어지는 교리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점도51) 그 신앙의 줄기가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6. 맺음말

나주 정씨 집안의 세거지였던 광주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인 정약전 · 약용 형제가 천주 교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한 초기 교회의 요람지였다. 이들 형제 중에서도 2남 약전과 4남 약용이 서학을 접하게 된 시기는 1776~1777년 무렵이었다. 특히 약전은 1776~1779년 사이에 가장 먼저 천주학을 서양의 새로운 종교로 인식했으며, 그에 이어 1784년 4월에는 약용도 천주 교리를 이해하게 된다. 당시 이들 형제에게 천주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이벽이었다. 


이어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치러진 첫 세례식에서 정약용(사도 요한)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재의 신앙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서울의 이벽과 이승훈의 집(중림동 염초교 인근), 양근 권일신의 집(양근 한감개)과 신앙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786년 3월에는 정약전이 아우인 정약종에게 천주 교리를 전하였고, 약종은 얼마 안되어 천주교에 영세 입교한 뒤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반면에 가성직자단에서 신부로 활동하기까지 한 형 약전은 1787년의 반회사건 이후 교회를 멀리하였다. 아우 약용도 1795년의 북산사건 이후에는 천주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마재를 떠나 양근 분원으로 이주하는데, 이는 집안에서의 박해가 심해진 1791년의 진산사건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약종이 마재에서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마재의 신앙 공동체는 점차 분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맏아들 정철상의 신앙은 마재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와 유조이 사이에서 태어난 정하상 · 정혜 자매의 신앙은 분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마재의 신앙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재의 신앙은 분원을 거쳐 서울이나 경기도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고, 정철상 · 하상 · 정혜 자매, 황사영 부부, 홍재영 부부 등에 의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정씨 집안에서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이로 인해 그 집안의 신앙은 큰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기록상으로 볼 때는 1850년대 이후 그 집안의 신앙 인맥이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재의 신앙은 끊이지 않는 연속성을 지니게 되었으니, 정약종의 《주교요지》, 정하상의 〈상재상서〉가 후대에 준 영향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안중근이 이어받은 천주 교리의 내용도 그 하나의 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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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창설기’ 혹은 ‘초기 교회 시대’는 17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이전부터 1801년의 辛酉迫害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하한 시기를 1791년의 辛亥迫害 때까지로 보기도 하며, ‘시대’라는 용어 사용에도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2) 《邪學懲義》에 경기도 북부의 천주교 관련자로 추정될 수 있는 송도 사람 韓在濂, 고양 사람 李宗和 등이 나타난다(《사학징의》 권1, 本曹作配罪人秩 및 各道罪人作配秩). 그러나 이들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3)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제2집, 2006, 110~137쪽 및 제4집, 2007, 170~183쪽.

4) 지금까지의 연구들 중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정씨 형제들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언급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경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밖의 연구는, 차기진,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참조.
· 琴章泰, 〈丁茶山의 사상에 있어서 西學의 영향과 그 의의〉, 《논문집》 3, 국제대학교, 1975. 

· 河宇鳳, 〈丁茶山의 西學 관계에 대한 일고찰〉, 《교회사연구》 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 朱明俊, 〈丁若鏞 형제들의 天主敎 신앙 활동〉, 《전주사학》 창간호, 1984. 

· 金相洪, 〈茶山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反論〉, 《다산학연구》, 계명문화사, 1990. 

· 金玉姬, 〈다산 정약용의 墓誌銘 등에 나타난 서학 사상〉, 《한국천주교사상사 II :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도서출판 순교의맥, 1991. 

· 徐鍾泰, 〈巽菴 丁若銓의 실학 사상〉, 《동아연구》 24, 1992. 

· 崔奭祐, 〈丁若鏞과 天主敎의 관계 : Daveluy의 備忘記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車基眞,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정약용의 천주교 수용과 서학 사상〉,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2002. 

· 趙珖, 〈丁若鍾과 초기 천주교회〉, 《한국사상사학》 18, 2002. 

· 주명준, 〈정약종 가문의 천주교 신앙 실천〉, 《한국사상사학》 18, 2002. 


5) 정약용, 《與猶堂全書》 제1집 권16, 自撰墓誌銘(集中本) ; 《숙종실록》 권26, 20년 4월 1일 및 권32, 24년 1월 25일, 3월 10 · 11일. 이하 앞의 자료 출처는 ‘《전서》 I-16’식으로 표기함. 


6) 경주 최씨를 포함하여 정약종의 아내를 3명으로 이해한 경우도 있다(주명준, 앞의 글, 72쪽).
7) 마재는 1895년(고종 32) 양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가 되었다.

8) 《전서》 I-16, 자찬묘지명(집중본). 정약전과 약용 형제는 1783년 진사가 되었고, 1789년에는 약용이 문과에, 1790년에는 약전이 문과에 합격하였다.

9) 정약용, 《洌水全書》 續集 4, 巽菴書牘, 答茶山, 辛未 ; 《전서》 I-15, 先仲氏墓地銘.

10) 《전서》 I-16, 자찬묘지명 ; I-1, 贈李檗, 丁酉(1777년) ; 俟菴先生年譜, 正祖 元年(1777년), “始見星湖先生遺稿.”

11) 차기진, 앞의 책, 129~131쪽.
12) 《전서》 I-20, 上中氏(辛未冬), “自念 吾輩能識天地之大 日月之明 皆此翁之力.”

13) 《전서》 I-9, 辨謗辭同副承旨疏, “臣於所謂西洋邪說 嘗觀其書矣…蓋嘗心欣然悅慕矣 蓋擧而?諸人矣…臣之得見是書 蓋在弱冠之初 而此時原有一種風氣 有能說天文曆象之家 農政水利之器 測量推驗之法者 流俗相傳 指爲解洽 臣方幼?竊獨慕此.”

14) 《전서》 I-1, 述志二首(壬寅年), “嗟哉我邦人 ?如處囊中…聖賢在萬里 誰能豁此蒙.”
15) 《전서》 I-15, 선중씨묘지명, “遂聞新敎之說 欣然以悅 然不以身從事.”

16) 주어사 강학의 내용과 실체, 그 의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의가 되어 온 데다가 이미 관련 자료와 연구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 강학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 자료의 종합적 검토〉, 《양업 연구 총서》 3집, 2006을 참조.

17) 주명준, 앞의 글, 78~82쪽. 주명준은 1779년 주어사 강학의 지도자를 권철신으로, 강학의 실질적인 주관자를 정약전으로 추정하였다.

18) 《전서》 I-16, 자찬묘지명, “甲辰夏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 見一卷書.”

19) 《전서》 I-15, 선중씨묘지명, “甲辰四月之望 旣祭丘嫂之忌 余兄弟與李德操同舟順流 舟中聞天地造化之始 形神生死之理 ??驚疑 若河漢之無極 入京又從德操 見實義七克等數卷 始欣然傾嚮.”

20) 《推案及鞫案》, 李家煥 等 推案, 신유 2월 11일, 27~28쪽, 崔昌顯 ; 신유 2월 13일, 68쪽, 이승훈 ; 《推鞫日記》 순조 원년 2월 18일, 이승훈 ; 《전서》 I-15, 貞軒墓誌銘 ; 黃嗣永, 〈帛書〉 41행 ; 샤를르 달레 저, 안응열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308~312쪽. 


21) 황사영, 〈백서〉, 46~49행.

22) 차기진, 앞의 책, 160, 164~165쪽 ; 최석우 역, 〈이승훈이 北堂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의 서한〉 및 〈조선인 Hiuen-chen(정약전의 자인 天全)이 이승훈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992, 173~177쪽.

23) 李晩采 편, 《闢衛編》 권2, 乙巳秋曹摘發.

24) 《추안급국안》, 신유 2월 14일, 86~87쪽, 정약전, “矣身最初甲辰年 李承薰妖書持來之後 果得見其書 至丁未年迷惑衣 矣身之亡父必欲禁止 故仍爲止之 辛亥邦禁之後 斷意不爲.”

25) 차기진, 앞의 책, 187~188쪽, 291~293쪽.
26) 위의 책, 188~189쪽.

27) 《추안급국안》, 신유 2월 12일, 51쪽, 정약종, “問曰 以矣身所現捉日記見之 丙午三月 有所謂受洗於仲兄之說 矣身之爲邪學 果自丙午三月而爲始乎 供曰 矣身於丙午三月 果聞此學於矣仲兄.” 정약종이 1785년 봄에 열린 明禮坊 집회에 형제들과 함께 참석했다는 기록도 있으나(이만채 편, 《벽위편》 권2, 을사추조적발), 여러 가지 정황에서 볼 때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다.

28) 《추안급국안》, 신유 2월 13일, 66~67쪽, 최창현, “供曰 若鍾之神父李承薰 代父權日身 而神父者領洗之謂也 代父者敎授之稱也.”

29) 차기진, 앞의 글, 《교회사연구》 15집, 13쪽.
30) 황사영, 〈백서〉, 36~37행.

31) 《추안급국안》, 신유 2월 14일, 86쪽, 정약전, “辛亥邦禁之後…矣身之弟若鍾 沈溺此學 萬端挽禁 終不感回.”

32)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앞의 책, 441, 469쪽; 《기해일기》, 107쪽. 


33) 차기진, 위의 글, 16~17쪽. 최완기는 정약종이 이주한 곳을 ‘분원’이 아니라 정확히 ‘소내’(옛 광주군 남종면 牛川里)로 보고 있다(최완기,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팔당호의 모래톱으로 변해 버린 소내(牛川里)〉, 《上敎友書》,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2006. 여름, 26~29쪽). 이곳은 팔당댐 건설로 인해 거의 수몰되어 버린 마을로,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내’[牛川]는 정약용의 기록에 자주 나오는 ‘소내’(苕川, 즉 마현)와 다른 마을이다.

34)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123쪽, 홍익만, “至於甲寅年間 又見中國出來冊子 則文理簡雅 旨義深奧 漸至駭駭 而敎中之人 猶爲不信 故種種講論於家煥承薰若鍾嗣永等家.”

35)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88~89쪽, 이국승, “丁巳來留黃嗣永家講習 而同學諸人 則崔昌顯玄啓欽尹鍾百洪?榮丁若鍾孫仁元崔仁喆南松老李?逵黃嗣永家人名不知李哥 及諸奉事爲?人等是白遣…往來於黃嗣永家 與若鍾昌顯必恭必悌等 互相講論.”

36) 《추안급국안》, 신유 2월 11일, 28쪽, 최창현, “戊午年分 復與若鏞之兄若鍾相從 而若鍾數次來.”

37) 명도회의 설립과 성격에 대해서는, 차기진, 앞의 글, 23~35쪽 및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明道會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집, 1996, 213~226쪽을 참조.

38) 《사학징의》 권1, 傳敎奏啓, 30쪽, 김유산 ; 차기진,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聖職者迎入과 洋舶請來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13집, 1998, 39쪽.

39) 〈백서〉, 12~13행, 25~26행 ;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153쪽, 권상문 및 권2, 작배죄인질, 316쪽, 黃次乭.

40)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105~107쪽, 文榮仁 ; 《추안급국안》, 신유 2월 13일, 62쪽, 정약용 및 신유 3월 15일, 209쪽, 주문모.

41) 李在璣, 《訥菴記略》, “黃嗣永漫浪家孫也 年十六進士” ; 《사학징의》 권1, 정법죄인질, 權相問, “庚戌(1970)年分 嗣永爲進士.” 《司馬榜目》에는 “正祖 14年(1790년) 增廣 進士, 三等 百十三, 黃嗣永 : 字 德紹, 乙未(1775년)生, 本貫 昌原, 居京 慈侍下, 幼學, 一詩(詩는 1등)”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9월 12일에는 정조가 20세 이하로 詩를 지어 三中(셋째 등위의 두 번째)한 진사 황사영에게 白紙 3권, 붓 세 자루, 먹 세 자루를 하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2)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앞의 책, 558쪽. 


43) 《추안급국안》, 신유 10월 10일, 황사영, “矣身爲洋學者 爲十一年 始學之翌年 朝家禁令至嚴 親戚朋友無不毁斥.”

44) 《추안급국안》, 신유 10월 11일, 황사영, “自辛亥年間 邪學漸熾 而邦禁不至甚嚴 故矣身得見邪書於承薰處 心好而自得而已.”

45) 《눌암기략》, “從曳(?)乎切姻之若鍾近戚之承薰 廢擧專治邪法 圖晝夜??.”
46) 《추안급국안》, 신유 10월 10일, 황사영.

47)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위원회 편,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1, 44~49쪽.

48)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185~188쪽 ; 최석우, 앞의 글, 104~106쪽. 


49) 위의 책, 186쪽 ; 최석우, 위의 글, 106쪽.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보면 양반 출신 ‘안나’에게 성사를 준 이야기가 나오는데, 위의 기록을 인정한다면, 그녀가 정약종의 누이동생일 가능성이 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81~85쪽). 다만, 이 서한에 나오는 안나는 노년에 입교한 것이 아니라 혼인 전에 이미 영세 입교한 신자였으므로,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50) 《주교요지》는 1885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감준으로 목판본이, 1897년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감준으로 활판본이 간행되었고, 전사본으로 전해지던 <상재상서>도 1887년 홍콩의 나자렛 인쇄소에서 활판본으로 간행되었다.

51) 차기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교회사연구》 1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8~15쪽.

[교회사 연구 제31집, 200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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