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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하느님의 눈으로 만물을 다시 보는 신앙 공동체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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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14 ㅣ No.1824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하느님의 눈으로 만물을 다시 보는 신앙 공동체를 그리며”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았습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는 그동안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땅에 묻히셨던 그분이 일으켜지시는 그 생명 충만의 때를 향해 함께 걸어왔습니다. 주님은 만물의 주님이시니, 우리만이 아니라 지구는 지구대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겠지요. 지구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보이시는지요? 우리도 아프면 열이 나듯이 지구가 아파서 열이 나고 그 열이 요즘 우리가 여름이면, 그리고 겨울에도 체험하게 되는 더운 지구, 지구 온난화, 더운 대구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참으로 대구가 지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구의 아픔과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주님의 수난과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성찰하시면서 2015년 5월 24일에 <찬미받으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하셨습니다. 대구대교구는 일찍부터 자연과 함께 살기를 위해 특별히 노력해 왔는데요, 이런 점에서 대구 시민들과 대구 신앙 공동체는 교황님의 생태 영성을 잘 이해하고 살아온 교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회칙을 통해서 지구와 지구에서 사는 수많은 생명체들과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 노인과 어린이들이 기후 변화로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적어도 그런 상황이 덜 발생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실천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연 생태와 사람과 사회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알고 싶은 분들은 이 회칙을 읽어 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대구대교구 신앙 공동체 평신도들이, 특히 레지오마리애 단원들이,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신부님들과 수도자들과 함께 읽는 거룩한 시간들을 가진다면 대구대교구의 지역 복음화의 길이 조용히, 그러면서 가열차게 열리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회칙이 발표되기 전부터 전세계가 이 회칙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언론사가 약속을 어기고 이 회칙이 공표되기 전에 전문을 내보내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저도 이탈리아어로 된 이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이 회칙이 이탈리아어와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바티칸 홈페이지에 동시에 발표된 6월 18일, 바로 다운로드한 회칙을 읽으면서 너무도 경탄스러웠습니다.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한 수녀원에서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요, 공표된 그날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준비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 담긴 내용을 시대읽기와 연결하여 수녀님들께 간략히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후에 한 달에 한 번 2박 3일씩 <찬미받으소서>를 함께 읽고 비전을 내면화하는 시간을 여섯 달에 걸쳐서 갖게 됩니다.

 

저는 2015년 여름 방학 때 이 회칙을 “한국형” “통합생태영성”의 기초로 삼아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부생들과 부제님들과 함께 이 회칙을 성찰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때 한 신학생이 하느님의 눈으로 온 세상 만물을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아름답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이 신학생은 몇 년 전에 신부님이 되셨는데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찬미받으소서> 234항에서 주목하시는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1572년에 그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을 생태영성과 연결하여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래 왼쪽에 소개된 십자가 그림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직접 그려서 한 가르멜 수녀님께 드렸던 것으로 스페인 아빌라에 있는 엔카르지 보관되어 있습니다. 직접 본 가르멜 수녀님에 의하면 이 성인이 그린 실제 그림은 손바닥만 할 정도로 작다는군요.

 

 

 

위 오른쪽 십자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어떠신지요? 왼쪽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 보통 보는 예수님의 모습과 다르게 느껴지시는지요? 우리가 흔히 보아 온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우리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볼 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달려 계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셨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분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위에서 말한 신학생은 이 그림을 소개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 하느님의 관점에서 창조물을 볼 것을 요청하십니다.”라고요. 실제로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도 하느님 보시기에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을 것을 요청받습니다.”(69항) 하느님의 창조물들은 문젯거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자 “계시”(85항)이며 “유용성보다는 존재가 우선하는”(69항) 실재로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무한한 자애”(84항)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19를 비롯해서 모든 자연 만물은 하느님을 관상하듯이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인 것입니다.(12항)

 

우리는 지난달에 ‘자연과 만물 만인을 하느님의 눈으로 다시 보기re-spect’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존중”이라고 옮기는 영어 “respect”는 “re-다시” + “spect-보다”를 뜻합니다. “다시-보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줍니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예상하지 못한 훌륭한 일을 했을 때 우리는 “다시 봐야겠는데” 하고 감탄하면서 축하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시 보면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그 사람이나 생명체나 사물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기초 위에서 이제 파괴되어 가는 자연 앞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우리 지역, 우리 마을, 우리집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욕심에 사로잡힌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맑은 눈으로, 예수님의 온유한 눈으로 자연 만물을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주는 빛(光) 안에서 집을 짓고 살게 해 주고 먹을 것을 대주는 땅(地)과 마실 것을 대주는 물(水)과 숨쉴 것을 대주는 바람(風)을 다시 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빛[하늘과 불]과 흙[땅과 산]과 물[물과 못]과 바람[바람과 천둥]을 품고 있는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와 우주(宇宙)를, 지구와 우주는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이 땅과 물과 빛과 바람에게도 집이 되어 주지요. 다시 보는 온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 “하나의”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사람들을 포함해서 온 우주 만물이 하느님의 사랑과 살림을 매개하고 증거하는 기쁜 소식의 증거자로, 서로 서로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로 알아보면서 새로운 우주 가족의 형제요 동반자로 함께 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 공동체 여러분 모두 하느님이 보내주신 그분의 자녀요 그분의 천사요 그분의 메시지로 서로가 서로를 다시 보면서 존중을 나누는 깊은 신앙 공동체의 축복을 열어 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 모두가 코로나19와 함께 살 줄 아는 역량을 성숙시켜 가는 가운데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주님의 부활의 빛 안에서 아름답게 일구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끝으로, 지난 호에서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늘”, “못”, “불”, “천둥”, “바람”, “물”, “산”, “땅” 가운데 자신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 두 가지와 꺼려지는 것 한 가지를 선택해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지요. 어떤 독자 분이 “바람”과 “물”을 선택하시고 그 이유를 “서로 다른 성질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있어야 움직(보완작용)일 수 있”어서로 설명하셨습니다. 바람과 물은 “서로의 힘으로 흐르고” “그 세찬 물길에서 바람이 형성될 거 같”다고 하셨고, “어느 곳에도 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자유로이 다닐 수 있”고, “또 흐르면 흐르는 대로 어떤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결국 흘러 넘치는 물처럼 뚫고 지나가”는 면이 있어서 마음이 끌리셨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겸손하고 물은 중심이 서 있습니다. 하느님의 바람은 부드럽게 우리가 숨쉬게 합니다. 그 독자 분의 물은 바닥으로 흐르고 만물에 스며 배이며 온유하게 생명을 키우고요. 그렇게 부드럽고 온유하기 때문에 힘찰 수 있고 장애에 가로막혀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막고 있는 것들을 지나서 결국에는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존재의 깊은 곳에는 세찬 바람, 거센 물결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연의 모든 만물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서” 불이 꺼려진다고 하셨는데요, 불처럼 폭발하는 면도 있으실 수 있겠지요. 불이 겸손하고 중심이 잡혀 있으면 태울 것만 태우고 끓일 것만 끓여서 생명을 살립니다. 그렇듯이 바람도 물도 하느님 안에서 온유하고 그분을 뿌리로 삼아 그분 안에서 굳건하면, 하느님의 바람처럼 자유롭게 주님의 물처럼 온유하게 하느님의 생명의 공동체를 살리면서, 하느님의 살림을 많은 사람, 많은 존재들에게 실어 전하는 축복을 누리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람과 물. 風과 水. 이것을 괘로 나타내면 이렇습니다.  이것을 위아래로 놓으면   이렇습니다. 이런 괘들을 그리스도 영성과 통합해서 복음적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므로 오늘은 이렇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괘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분의 부활 시기 동안 부활하신 주님의 눈길 안에서 그분의 살림을 증거하며 충만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주님의 빛 안에서요!

 

[월간빛, 2021년 4월호,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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