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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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대건 ·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순교 성인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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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9-19 ㅣ No.2020

[특집 – 김대건 ·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th] 순교 성인 김대건


순교는 부활 신앙을 가리킨다

 

 

“제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시오.”(감옥 안에서 1846년 8월 26일 라틴어로 쓴 마지막 편지)

 

8년 여간의 신학생 시절과 13개월의 사제 생활 중, 겨우 마지막 부활절에 모자(母子) 상봉한 후 순교길을 걸으셨던 김대건 새 사제. 25세의 짧은 생애는 그 종착지를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가요?

 

1920년대 79위 시복 과정에서 가경자였던 김대건 신부님에게 중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순교에 대한 기록과 증언으로 김 신부님의 질료적(물리적) 죽음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사형을 언도한 이유가 신앙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간 죄, 곧 국사범(國事犯)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순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적 죽음에 있어서, 그 사형이 신앙에 의한 것이어야지, 다른 범죄에 의하여 죽음이 선언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심문 과정과 신자들의 증언에서 신부님이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간 것이 교회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실제로 천주교를 위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것이고, 선교사들을 조선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황포 돛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갔던 것입니다. 물론 김대건 신부님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서양어로 쓴 편지는 모두 자신이 쓴 것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애써서 변호하였습니다.

 

“깃을 아주 가늘게 깎아서 아주 작은 글자로 몇 줄 썼습니다. 그다음 뾰족한 끝을 자르고 큰 글자들을 만들었습니다. … 이것이 그들을 만족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편지 문제에 대해 더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1846년 8월 26일)

 

무엇보다도 김대건 신부님의 형상적 죽음을 확인시켜주고, 순교를 확증시켜주는 부분은 새남터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제 나의 마지막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과 교류한 것은 나의 종교 때문이요, 나의 하느님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죽은 다음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학생 시절의 성장통을 극복하고 부모와의 육정마저 물리치고 김대건 신부님의 삶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지상에서는 그것이 순교라는 이름의 죽음으로 비춰질지도 몰라도 그 속뜻은 부활이었습니다. 순교자 성월에 25세 청년 사제가 들려주는 신앙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내가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의 일에 어찌 거리낌이 없겠는가?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2021년 9월 19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서울주보 4면,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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