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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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베네딕도의 규칙서에 나타나는 개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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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408

베네딕도의 규칙서에 나타나는 개인기도1)


베네딕도 수도원은 단순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는 편이다.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공적인 기도, 개인 독서, 연구, 기도, 손으로 하는 노동, 공동으로 하는 독서, 식사, 그리고 수면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1) 베네딕도의 규칙서 안에 나타나는 개인기도, 혹은 사적 기도, 2)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의 여러 개념들, 3) 거룩한 독서의 가치, 그리고 4) 귀 기울이고 기도하는 방법들을 살펴보기로 제안하는 바이다. 현대인들이 그들의 기도 생활을 위해 베네딕도회적 체험을, 6세기 중반에 베네딕도의 규칙서가 출현한 아래 시간의 시험을 거쳐 온 하나의 체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1. 단순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

베네딕도가 밤낮으로 드리는 공적 기도와 봉사를 위해 아주 자세한 규정을 세우기는 하지만, 기도의 방법과 신학에는 겨우 몇 단락만 할애할 뿐이다. 19장은 직접 공동기도를 다루는데, 베네딕도는 두 가지 기도원칙을 제시해 준다: 하느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것과 마음과 목소리의 조화이다. 환언하면, 기도의 신적 주제와 시편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RB 20장에서 “기도할 때의 경외심”이라는 제목 하에 사적이고 개인적인 기도에 대해 더욱 언급하고 있다. 기도 때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 첫 번째 이유는 약간 현세적인 것 같다: 관례적으로 우리는 존경심과 겸손을 가지고 중요한 사람, 유력한 사람에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주를 지어내신 하느님께 갈 때 경외심을 다한 몸가짐이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론한다.

그러면서도, 베네딕도는 이렇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을 권함에 있어 기도에 관한 그의 개념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두 문구를 사용한다. 그는 수도승들이 “온갖 겸손과 순수한 충성심을 가지고” 하느님께 간청할 것을 권한다(cum omnihumilitate et puritas devotione).

겸손이라는 단어는 성 베네딕도가 지니는 영성의 열쇠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성품을 말해준다. 제7장에서 수도승은 교만과 자의를 비우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따르며, 자신을 부당한 종으로 여기라고 가르친다. 수도승은 하느님 현존 안에서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무함을 인정한다.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수도승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세가 된다.

겸손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들어갈 허무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순수한 충성심은 기도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특징짓는 강렬함과 충만함을 가리킨다. 2절에 나오는 라틴어를 굴자 그대로 읽으면 “순수함의 헌신적 자세”이다. “성실한 충성”이라는 영어 번역은 권고할 만한 번역이기는 하나 라틴어의 뉘앙스를 다 드러내지 못한다. “충성”이라는 말은 하느님께 대한 그 사람의 봉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서원과 투신이라는 함축된 의미도 이 말 안에 담겨 있다. “순수함”은 성품의 단순, 솔직함, 그리고 하나만을 지향하는 성실함을 가리킨다. 순수한 충성을 가진 사람은 외적 소음과 내적 분심을 제거하였으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주의를 기울인다.

제20장 3절은 기도의 특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하는데(라틴어로) “많은 말”이 그것이다. 베네딕도는 아마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오 6,7)는 예수님의 경고를 명심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단순성과 성실함이라는 성향을 거스르는 시끄러운 방해를 자아낸다. 또한 그것은 겸손한 마음에 요구되는 내적으로 빈 마음과도 상반된다.

3절은 베네딕도가 장려하는 그런 종류의 성향을 더 예리하게 정의해 주는 두 개의 말로 계속되고 있으니 “마음의 순수성과 참회의 눈물”(in puritate cordis et compunctione lacrimarum)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순수함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며, 이번에는 “마음”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기도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베네딕도는 그 마음이 순수하고 성실하며 맑게 개어 있어야 한다고 일일이 들어 말하고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보는 성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수도승이 말한 것처럼 “마음이 깨끗한 이는 행복하다. 그들은 작은 어린이와 같이 되었으니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것이다.”

베네딕도가 마음에 두고 있는 기도는 “참회의 눈물”(라틴어에 따르면 글자 그대로 “눈물의 참회”)이라는 특징 또한 지니고 있다. 참회란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마음이 찔리는 것을 말한다. 기도 중인 수도승은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찔림을 체험하며 그 결과 눈물이 흐르는 것을 체험한다. 그런 마음은 개인적인 죄에 대한 슬픔뿐 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리 누르시고 현존하심을 체험한다. 죄에 대한 슬픔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이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놀랍게도,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전통적인 명령을 받은 베네딕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20,4). 개인적인 기도가 긴 시간동안 그 단순성과 강렬함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이 기도가 짧은 것이기를 원하며,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기도의 유형은 하느님의 얼굴을 향해 한번 흘낏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장에서 세 번째로 우리는 “순수한”이라는 단어와 접하는데 이번에는 형용사형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순수하다는 이 단어는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으며, 가로막는 것이 없고 직선적이며 솔직한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ex affectu inspirationis divinae gratiae) 간결하고 직접적인 기도를 옹호한다. 하느님의 은총이 커다란 열정을 매우 잘 나누어 줌으로써 기도 시간을 늘일 것을 장려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이다. 그 일별이 관상으로 연장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그런 것은 상례라기보다는 예외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적 기도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 제52장 “수도원의 성당”에 또 나타난다. 베네딕도의 기도소는 단순하고 극도로 검소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형제들이 기도에 전념하도록 한다는 유일한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들 중 많은 곳처럼 다목적용 방이 아니다. 베네딕도의 성당에는 제대(58,20; 29; 59 2; 62,6 참조)가 물론 있으되 그곳이 제대가 있다는 것과 거기서 시시때때로 미사성제를 드린다는 데서가 아니라, 거기서 이루어지는 성무일도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성당(기도소)은 그 이름이 말해 주는 것 같이 되어야 하며 ….”(52,1)

한 형제가 성무일도 끝기도 후에 개인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소에 머무를 것이라는 가능성을 만족감을 가지고 주시한다. 그는 또 수도승이 다른 때에도 개인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소로 들어가기를 열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개인 기도의 특성에 관한 그의 생각을 더 많이 제시한다. 수도승은 “혼자 들어가 기도할 것이며 소리를 내어서 하지 말고 눈물과 마음의 지향(충성)을 가지고 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제20장에서 따온 몇 가지 생각과 용어들을 반복한다. 그러나 어떤 용어들은 새로운 것이며, 생각들도 여기서는 다르게 표현된다. 제20장의 “많은 말로써 하지 말 것이며”라는 부정문이 여기서는 “소리를 내어서 하지 말고”라는 부정문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물론 큰 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기도소에서 큰 소리를 내면 거기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다른 형제들에게 방해가 될 것이다.

눈물에 관한 말이 한 번 더 나온다. 분명히 옛 사람들은 그들의 슬픔이나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눈물이 훌러 내리는 것에 난처해하지 않았다. 사실상, 눈물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정화와 덕행을 얻는 고상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구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intentione cordis)이다. 우리의 영역이 상당히 정확하기는 하지만, 라틴어 intentione cordis의 그 모든 함축적 어조와 저변에 깔려 있는 의미를 내포하지는 못한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의 주의를 표시하는 intentio란 단어에 적합성을 부여한다. 마이클 케이지(M. Casey)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 구절에 대한 분석을 요약해 준다:

그(베네딕도의 충고를 따르는 수도승)가 체험하는 것이란 의식의 한계,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의 마음의 불가피한 확장의 한계 너머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 베네딕도에게 있어 기도란, 마음이 집중하는 문제이며, 다른 활동들, 생각과 욕망을 규제하는 능동적인 노력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마음을 집중하는 문제인 것이다.


2.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임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를 “귀 기울여라”(obsculta)는 말로 시작한다. 전반적인 수도승적 모험을 특징짓는 말 가운데 그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 수 없으니, 그리스도인이라면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위해 수도생활로 향하는 까닭이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실상, 수도승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도처에서 듣고 그 말씀이 그를 수도원, 곧 그 말씀에 잠기어 있는 장소로 이끌어 감을 발견한다. 수도원의 하루 동안 말씀은 자주 울려 퍼진다. 공동체가 드리는 공동 기도, 개인적으로 하는 성서 읽기, 아빠스의 가르침 안에서 말씀이 울려퍼진다. 말씀은 풍성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주의 깊은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에게 순종을 권고하니 순종은 귀 기울여 들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불순종의 나태로 멀어졌던 하느님께 순종의 노고로 되돌아 갈 것이다”(서언 2). 먼저 듣지 않고서는 순종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먼저 불순종의 나태를 극복하고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려 되돌아간다는 뜻을 내포한다. 마음으로 귀를 기울임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길이다.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자신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확신을 지니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의 서언을 인용하지 않아도 그는 그 중심되는 선언을 확실히 듣고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 1,14).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먼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며, 가까이 할 수 없거나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수도원 한가운데 현존하며 귀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차비가 되어 있다. 베네딕도는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익히 알고 있다. 그 저자는 육화된 말씀에 함축적 의미를 밝혀내고 우리 내면의 깊숙한 존재에까지 그 말씀의 현존을 이끌어 내려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히브 4,12-13).

베네딕도는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지는 않으나 읽고 그 진리를 파악하였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서, 하느님께서는 순종은 하나 불만을 품는 수도승의 마음을 보고 계신다고(RB 5,18)말한다. 베네딕도에 의하면 공동체의 공적 기도가 온 누리의 하느님 어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존재의 중심을 갈라놓는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을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통찰력을 지닌 신학자 칼 라너(K. Rahner)처럼 이러한 인간 활동에 대해 사색을 하지는 않는다! 라너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을 말씀의 청취자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으로, 초월적으로 신적인 것에 기울어지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시키고 수도원 전체에 말씀이 날마다 시간마다 반향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는 수도승이 말씀을 인지하고 실천으로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매우 당연하게 여긴다.

베네딕도는 천국에 대화할 상대가 있는지에 관한 의혹 따위에 개의치 않는다. 규칙서와 성 그레고리오의 대화집에서는 그런 것 같다.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간구하고 하느님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수도승에게 말을 건네신다고 본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역사를 통틀어 다른 이들은 이 하느님이 멀리 계시거나 슬며시 사라지는 분으로 여긴다. 그들은 혼자이며 소외됨을 느낀다. 이런 것이 몇몇 현대의 수도승들의 체험이기도 한데 적어도 그들 삶의 일정한 시기에 그렇게 느낀다. 그러한 수도승이 침묵과 말씀이라는 신적 존재의 양면을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가 바로 이런 때이다. 때때로 그는 침묵과 그리고 어느 때엔 말씀과 관계를 맺어야 하리라.

인간 생활의 복잡함 속에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말씀의 핵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베네딕도의 해결책이다. 하느님은 성서 안에 참으로 현존하신다. 예수님의 실제 현존은 성체성사에 한정되지 않고 성서의 말씀에까지 이르고 있다. 베네딕도가 이런 말들로 정확하게 그 문제를 서술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말 속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실상 그는 손님과 병자와 아빠스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서로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말씀을 발하시면 우주가 존재하게 된다. 그 우주가 하느님의 말씀이 되며 인간존재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베네딕도는 이렇게 멀리까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온 누리에 말씀이 두루 퍼져있다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세상은 전체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적 말씀의 침투에 극도로 민감해야 한다. 어떤 교사들은 하느님 말씀의 무조건 편재를 역설하며 시 한 구절, 일몰, 인간의 사랑, 그리고 미소 등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라고 충고한다. 말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한 순간 한 순간의 말씀과 한 체험 한 체험의 말씀에 대한 주의가 부족한 것이다.

수도승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만 말씀은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사실상, 공동체 전체가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많은 이들이 말씀에 정신을 집중할 때 그 말씀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된다. 말씀에 대한 개인의 지각은 다든 이들의 지각에 의해 교정된다. 궁극적으로 귀 기울이는 공동체는 말씀에 대한 공동주석을 산출한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끌어간다. 새로운 도전에 우리를 인도한다. 토마스 머튼은 이 진리를 표현하였다: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성서에 몰입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책이 우리를 판단하고 처음에는 동의할 수 없는 그런 말들로 우리를 판단하는 것 같다.”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에게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에 조금도 휴식을 주지 않는다. 말씀은 항상 현존하며 따라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항상 의무이며 낙이다. 수도승들은 말씀이 단 한 번도 완전히 분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말씀이 스스로 밝혀 질 것을 인내롭게 기다린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환히 밝혀질 것을 기다리는 것이 수도승들의 과업이며 대체로 사람들의 과업이다. 성서는 사람들이 인내롭게 서서 기다리면 활짝 피는 꽃들과 같다.


3. 거룩한 독서

귀 기울임이란 성무일도나 아빠스의 강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야 한다. 귀 기울임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하루 종일 이루어진다. 그러나 베네딕도의 수도원 내에서 귀 기울임의 일차적 방법은 거룩한 독서이다. 그 실천을 렉씨오 디뷔나(Lectio Divina)라고 부른다. 규칙서에(48,1) 꼭 한번 나오는 이 완전한 문구는 다양하게 번역이 된다: 신적인 독서, 거룩한 독서, 경건한 독서, 영적 독서 등이다. “디뷔나”라는 말은 텍스트의 신적 성격과 거룩한 독서를 신심깊게 실천하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베네딕도는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설명한 적이 없다. “매일의 육체적 노동”에 대한 48장에서 그 주제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주제에 관해서는 한 장(章)도 할애하지 않는다. 그는 수도승들이 이 실천을 위해 하루에 세 시간, 네 시간, 심지어 다섯 시간까지 바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가 수도원의 시간경을 짤 때 특히 육체노동을 위한 시간을 정할 때 수도승들이 거룩한 독서에 풍족한 시간을 내도록 확인한다. 그는 48장을 다음과 같은 일반원칙으로 시작한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적 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영적 독서를 할 것이다”(48,1). 그러고 나서 육체적 노동과 거룩한 독서를 교대로 하여 하루의 일정을 정하기 시작한다. 그 둘을 위한 시간은 절기에 따라 다르나 모든 경우에 “렉씨오 디뷔나”는 시간을 우선적으로 보존하는 것 같다. 또한 여름 중 가장 더운 시간에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다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하절기 동안 더위와 수면 시간이 짧음을 고려해서 휴식까지도 허락하고 있다. 그는 휴식을 꼭 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고 원한다면 그 시간에 사적으로 독서를 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을 방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48,5). 이러한 작은 경고가 베네딕도 시대의 독서 방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들은 혼자 속으로 읽지 않고 보통 소리를 내어 읽었다. 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이런 실천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이 공부가 더 잘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국어 교사들은 더 잘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 시를 낭독하는 것을 권장한다.

수도승들이 읽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으뜸가는 책은 성서였으나 성서 주해서, 초기 수도 교부들의 저서와 유명한 그리스도교 저자들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성서의 메시지가 성서 그 자체 외에서도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베네딕도의 수도원이나 그 당시 대부분의 수도원이 많은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해서는 안 된다. 책은 귀하고 비쌌다. 그러나 베네딕도가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다양한 저자들의 작품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의 수도원에 대표적인 저서를 보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베네딕도는 사순절이 시작될 때 책을 나누어 주라는 것을 명기하고 있다: “사순절동안 모든 이들은 각자 도서실에서 책을 받아 차례대로 다 읽을 것인데 이 책들은 사순절 첫 날에 줄 것이다”(48,15-16). 어떤 저자는 베네딕도가 성서의 여러 부분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좌우간 책을 보관하는 장소에 관한 말이 있다(“도서관”). 일년 중 이 거룩한 시기 동안에 수도승들이 특히 더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거룩한 독서가 하나의 오푸스(opus)즉 하나의 과업, 하나의 훈련이자 수덕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사순절 첫 날에 책을 분배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동안 수도승들은 시편을 궁구하거나 몰두할 수 있다(48,13). 그들은 시편을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편은 그들의 성무일도를 이루는 주축이었으므로, 가대에서 낭송하고 또 종일 기도 중에 상기할 목적으로 암송하였던 것이다.

일요일은 베네딕도에게 독서를 위한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의 많은 시간을 이를 위해 바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주일에도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독서에 시간을 바칠 것이다.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거나 게을러서 공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 할 것이다”(48,22-23). 이 구절에서 베네딕도의 수도자들 중 소수는 문맹이었으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주어야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그 구절은 베네딕도의 독서 방법에 관하여 빛을 던져 준다: 그는 “공부하거나 읽으라”는 말을 사용한다(meditare aut legere). 이런 수행이 완전히 따로 이루어진 것인가 혹은 비슷한 것인가? 베네딕도는 그 두 가지가 많이 비슷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공부하거나 독서하는 가운데 본문을 깊이 생각하고 되새기고 음미하며 본문이나 몇 구절을 암송하기도 한다. 본문은 단지 정보를 제공하는 가치를 위해 흡수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이끌어 가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기도는 본문의 독서에서 생기는 자연적인 결과이다, 기도야말로 독서의 목표이다.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이같이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독서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이 사순절 동안 참회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참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실행되는 것이다”(49,4). 그 네 가지 실행은 완전히 구별되어 있지 않다. 독서와 기도에 헌신하려면 자아부정이 요구된다. 더구나, 눈물의 기도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참회는 성서를 읽음으로써 직접 우러날 수 있다. 거룩한 말씀을 파고듦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경건한 관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독서는 기도의 한 훈련이다.

베네딕도가 성무일도를 수도원의 전례에 따르는 유일한 기도 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도는 종일 계속되나 다른 양식과 방법으로 계속된다. 성무일도의 공적기도, 경건한 독서, 육체노동 시간 동안에 하느님을 기억함, 그리고 하루 중 아무 때나 계속되는 것이다. 수도승적 생활은 이와 같은 식으로 짜여져서 수도승들이 독서와 기도의 수덕실천에 자신들을 바칠 수 있게 된다. 수도승은 그의 삶 속에 거룩한 독서와 기도와 눈물을 위해 열려져 있는 공간을 지니고 있다. 그의 삶은 오로지 기도에 다 바쳐진다.


4. 귀 기울이고 기도하는 방법

간략하게 개인 기도의 수도승적 방법을 검토하고 오늘날 그들의 기도를 심화시키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는 일이 남아 있다. 수도승적 방법이라고 해서 수도원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그 방법들은 다른 환경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루에 거룩한 독서와 개인 기도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독서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다면, 하루의 일정 속에 공간을 마련하여야 한다.

각 사람은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여 매일 같은 시간을, 자기 자신이 보통으로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따로 내어야 한다. 그 시간을 자기 자신만의 거룩한 시간으로 바라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시간을 귀 기울이는 시간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과 느낌에 접하는 시간으로 고대하여야 한다. 이 개인적인 시간을 그 날의 닻을 내리는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과의 이 개인적인 접촉이라는 점에서 방향과 의미를 취한다.

기도하는 자세의 독서와 귀 기울임의 시간은 자동적으로 사람의 상념과 활동들의 속도를 늦추어 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통 열광적이어서, 상당히 속도를 늦추고 되새김과 기도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루에 개인적인 독서와 기도를 위한 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은 다른 시간에는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귀 기울임이 종일토록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씀이 다른 사람들이나 공동체, 자연의 변화 등을 통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선별을 해서 분별있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니 우리 사회는 소음의 포만 상태이며 우리가 흡수할 수 있는 말의 수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적 방법은 성서가 제공하는 지식만을 위해서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물론 우리는 성서의 기원과 성격(저자, 문학유형, 언어 등)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렉씨오 디뷔나가 성서에 관한 비판적인 접근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 접근 방법은 오늘날 어떤 명석한 사변가에게도 요구된다. 그러나 수도승적 실행의 요점이란 정신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을 따라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며 살아있는 기도 중에 응답하는 것이다.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면 성령의 감화에 그 사람을 활짝 열게 해준다. 우리가 말씀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기쁘고 자유로이 우리에게 다가 오실 수 없다. 렉씨오 디뷔나와 개인기도는 우리 내면의 자아로 하여금 말씀에 건드려지거나 상처받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찌르지만 싸매어 낫우는 말씀인 것이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치유와 통교이다.

거룩한 독서를 할 때 주어진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이 읽으려고 달릴 필요가 없다. 거룩한 독서는 본문을 천천히 숙고하는 것이다. 아마도 한 장이나 몇 단락만 읽어야 할 것이다. 성서를 소리 내어 읽거나 본문을 음미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속도를 늦추어야 할 것이다. 거룩한 독서는 속독 과정이 아니라 본문을 되새김이요 묵상함이다.

우리가 성서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심지어는 어느 한 구절들 특히 시편들을 암송한다면 다른 시간 - 특히 별 할일이 없는 시간 - 에도 말씀과 구절들을 되풀이 할 수 있다.

개인 기도와 독서 중에 우리가 듣는 음성이 하루를 지내는 동안 마치 귀에 익은 곡조가 우리 머리에 계속 맴도는 것과 같이 우리 귀에 울려올 수 있는 것이다. 렉씨오 디뷔나 중에 말씀에 주의를 다 한다면 그날의 남은 시간 속으로 기도가 쏟아져 들어오는 일이 가능해 질 것이다.

렉씨오 디뷔나는 다른 기도유형들을 위한 입문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 기도에는 여러 가지 다른 유형들이 있다. 고요의 기도, 관상 기도, 공적 기도 등이 있으나 렉씨오 디뷔나는 그 모두를 위한 배경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성서를 한 두 장 그리고 주해서를 읽은 후에, 책을 치우고 침묵 중에 잠시 쉬면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도록 내어맡기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고요와 집중된 마음가짐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만트라를 반복하거나 여러 가지 호흡법과 앉음새를 취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렉씨오 디뷔나는 온갖 종류의 고요한 기도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다.

개인 기도의 수도승적 방법들이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분명해 진다. 그 방법들은 그리스도인 일반에게 유익한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성향과 생활 일정에 맞게 채택할 수 있다. 누구나 기도와 거룩한 독서의 훈련에 진보할 수 있다. 베네딕도는 영적 거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도승이었으며 실천적인 방법으로, 특히 건전한 독서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규칙적으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찾기를 원했던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위해 규칙서를 썼던 것이다. 그의 기도 방식은 수도승과 어느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도 여전히 길잡이가 되고 있다.

(코이노니아 제16집 96쪽, Jerome Theisen, O.S.B, 백순희 젬마 마리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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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9년 이래 성 요한 베네딕도 대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자 성 요한 대학교의 신학 부교수인 제롬 타이쎈 신부는 1966년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전공은 교회, 은총, 그리고 베네딕도의 규칙이다. 이 글은 쌩 루이스에 있는 탐쓴 쎈타에서 있었던 “오늘의 베네딕도 정신”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바 있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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