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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수도원 순례6: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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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4 ㅣ No.334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6 · 끝)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회


기도와 전례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삶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원 전경.

 

 

1931년 9월 14일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회 소속 수녀 6명은 연길지목구장 백 테오도로 신부의 요청으로 연길 땅을 향해 출발했다. 이들은 수녀원을 세우고 한국인 지원자들을 받아들이며 7개의 본당 지원(支院)을 설립하는 등 연길 수도원의 간도 지방 선교 활동에 동반했다. 그러나 1946년 공산당에 의한 청산, 이듬해 한국인 수녀들의 남한 이주, 6·25전쟁 발발로 부산으로의 피란 등 어려움을 겪었고, 1952년 9월 수련원이 다시 문을 열면서 3년 뒤 종신서원식이 거행됐다. 연길수녀원 폐쇄 이후 한국에서 처음 거행된 종신서원식이었다. 한국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성장과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모원인 성 십자가 수녀회는 스위스 중북부 죽(Zug)주 캄(Cham)에 위치하고 있다. 수녀원은 10여 분 거리의 캄 호수를 이웃하고 있는, 짙은 회색 지붕의 상아색 빛 건물이다. 흰색 수도복이 연상됐다.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의 성당. 성당 입구에는 붉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른 봄의 전령 같은 느낌이었다.

 

시몬 북스 원장 수녀가 마중 나왔다. 수녀원에 거주 중인 한국인 수녀가 마침 한국으로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한국어로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없어 아쉽다고 했다. 수녀회의 이야기는 수녀원 성당 입구 쪽 피 흘리는 예수님 십자가가 마련된 제대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것은 ‘성 십자가 수녀회’ 이름의 배경이 된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 모습의 목각 십자가를 모셔 놓은 곳이다.

 

성 십자가 수녀회 수녀원 성당 제대. 십자가상 예수님을 중심으로 수도자 출신 성인성녀들이 그려져 있다.

 

 

이 십자가는 수녀원이 캄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뗄 수 없는 수녀회의 상징이 된다.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인근에 십자가를 모셔 놓은 작은 경당이 하나 있었고, 경당을 찾는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증축을 거듭, ‘성십자가성당’으로 봉헌식을 갖고 십자가도 현양했다고 한다. 수녀회는 이 성당 곁에 정착하기를 원했고 1859년 마침내 성십자가성당 곁에 수녀원 건물이 완성됨으로써 ‘성 십자가(Heiligkreuz) 수녀원’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수녀원이 건립되면서 더 많은 순례자가 모여들었다는데, 치유의 은사를 얻은 신자들도 생겨나면서 십자가는 더욱 유명해 졌다. 이를 증명하듯 십자가 앞에는 기도 지향을 적은 쪽지들이 모아져 있었다.

 

성 십자가 수녀회의 시작은 1830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루체른 발덱(Baldegg)에 세워진 ‘가난한 자매들의 학교’가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인근 호흐돌프(Hochdorf) 지역 성베드로바오로대성당에서 재임 중이던 블룸(Josef Leonz Blum) 신부가 정치적 박해를 피해 또 산업혁명 등 영향으로 도시로 몰려든 소녀들을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계몽주의가 팽배, 반종교적 기운이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였고 스위스교회는 정치권력의 제재와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공업화·도시화로 인해 농민들의 정신적 갈등은 더욱 심해진 상황이었으며 도시 생활을 동경, 농촌을 떠나 도시로 상경하는 소녀들이 많았다. 가난한 자매들의 학교는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스위스 교회가 설립한 수녀회의 효시가 된 성 십자가 수녀회 발덱 공동체의 시작이기도 했다.

 

‘성 십자가 수녀회’ 이름의 배경이 된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 모습의 목각 십자가.

 

 

블룸 신부는 가난한 자매들의 학교 공동체가 수도 생활 공동체로 점차 발전해 나감에 따라 1844년 바젤교구장 살차만 주교로 부터 수녀회 회헌을 인준 받았으나 1848년 스위스 연방회의에서 수도원 신설과 폐쇄된 수도원 부활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됨에 따라 1859년 발덱의 학교 공동체는 유지된 채 수녀회는 캄 지역으로 이주하는, 부침 많은 역사를 겪었다. 캄으로 옮긴 이후에는 주 정부와의 이견으로 1862년 발덱 공동체와 분리됐다. 그리고 1887년부터 성 베네딕도 수도원과의 연합을 추진, 1892년 9월 ‘몬떼 올리베또 성모 마리아 대수도원’과 정식 연합회 가입 수락서가 교환됐다고 했다.

 

원장 수녀는 파워포인트를 통해 수녀회의 역사와 함께 영성과 활동을 소개했다. 한국 신자들의 방문에 앞서 꼼꼼히 준비한 노력이 드러났다.

 

회원들에게는 ‘기도와 일, 영적묵상’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이며 ‘기도’와 ‘전례’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삶이라 했다. 특히 원장 수녀는 성체조배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가 중요한 요소임을 밝혔다. 성체조배의 경우, 회원들에게는 매일 한 시간 이상의 기도가 의무화 돼 있고, 성당 옆에는 묵상을 위한 명상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고 했다.

 

원장 수녀는 무엇보다 “이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 묵상하고 봉사할 일들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라고 말했다. 지역민들과 함께하면서 수녀원이 잘 성장할 수 있었듯이 앞으로도 지역과 세상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 준비가 돼 있고 또 협력하며 살아가는 길을 도모하고 있다고 했다. 십자가 영성과 공동체 영성을 통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누고 살며 확장해 간다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회원의 삶을 풀어서 얘기해 주는 듯했다. 현재 수녀회 인원은 87명 정도.

 

한국 순례단을 맞아 원장 수녀가 수녀회의 역사와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1981년 6월 교황청 수도회성으로부터 교황청 설립 자리 수녀원 인가를 받았고 동시에 캄 수녀원과는 연합 결성을 승인받았다. 두 수녀회 사이의 ‘성 십자가 연합’이 그것이다.

 

“한국 수녀원과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엄마와 딸’ 같은 관계라고 할까. 캄 수녀원 이전의 발덱 공동체는 ‘할머니’같은 의미로 비유된다고 했다.

 

3년마다 교대로 캄과 한국 공동체에서 연합 회의를 개최하고 있는 두 수녀회는 이 회의를 통해 두 공동체의 정보를 교환하고 조언을 나누며 서로 봉사하고 있다.

 

원장 수녀는 “시집간 딸이 잘 살고 있으면 기분이 좋듯, 한국 수녀원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 매우 기쁜 일”이라고 전하며, “유럽에서는 성소자가 줄고 있는데 한국은 꽃이 피듯 번창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내년 2012년에 설립 150주년을 맞게 된다는 캄 성 십자가 수녀회는 올해 80주년을 맞는 한국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온전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보임으로써 그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드러내보이는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모원 수녀들이 80년 전 순교를 각오하고 중국 연길을 향해 떠났듯 한국에서도 80주년을 기해 지난해 남미 선교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 십자가 수녀회의 사랑의 물길이 한국을 거쳐 또 다른, 복음이 필요한 세상 속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2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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