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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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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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01 ㅣ No.494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1) 변방으로 가라 - 남수단 난민촌


“난민은 밀어닥치는데 돕고 싶어도 줄 것이 없어요”

 

 

내전의 불길을 피해 우간다 북부 팔라벡 난민촌에 들어온 남수단 난민들. 학살의 광기를 피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이들은 유엔이 나눠준 최소한의 생필품 외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들은 너나없이 “여기는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아이들의 맨발과 해진 반바지가 궁핍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스로 선택한 복음적 가난과 달리 원치 않는 가난은 재앙이다. 가난은 단지 배고픔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회를 폭력과 범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현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보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라며 “문 앞에 누워 있는 라자로들에게 ‘교회의 돋보기’를 갖다 대라”고 촉구했다. 또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흘려듣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가톨릭평화신문과 고통받는 교회돕기(ACN)는 공동 기획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의 마지막 주제로 가난을 선택해 우간다 교회의 외침을 전한다. 한국 교회에 연대를 청하는 메마른 손길이 그들의 외침 속에 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다.

 

 

- 굴루교구의 매튜 오동 몬시뇰(오른쪽)이 난민촌에서 ACN 국제본부 관계자와 지원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오동 몬시뇰은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주님의 얼굴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이라고 말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캄팔라에서 최북단에 있는 팔라벡(palabek) 난민촌까지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우기라서 두어 시간 폭우라도 퍼부으면 시뻘건 흙길은 진흙탕 수렁으로 변한다. 취재 일정에 없던 난민촌 행을 감행한 것은 순전히 프란치스코 교황 탓(?)이다. 교황은 기회 있을 때마다 “변방은 세상의 구석이지만, 교회에는 중심이 돼야 한다”며 변방으로 가라고 재촉한다.

 

 

3만 7000명 난민촌의 유일한 사목자 

 

굴루까지 올라가 라자르 아라수(49, 살레시오회) 신부와 합류해 난민촌으로 달렸다. 인도 출신인 라자르 신부는 남수단에서 넘어온 난민 3만 7000명이 있는 팔라벡 난민촌의 유일한 사목자다. 그의 낡은 차에는 도시 본당에서 모아준 옷 보따리가 잔뜩 실려 있다. 그는 “난민들은 정부군과 반군의 무차별 학살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라며 “옷은 말할 것도 없고 부족하지 않은 게 없다”고 말했다.

 

수단은 고 이태석 신부의 선교지로 국내에 익숙하다. 북부 이슬람 아랍계와 남부 그리스도교ㆍ토착 종교 흑인계로 구분되던 수단은 2011년 갈라섰다. 하지만 남수단은 신생 독립국의 포부를 펼쳐보이기도 전에 내전에 휩싸였다. 이 때문에 우간다 북부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들어서 있다. 우간다 북부로 100만 명, 옆 나라 콩고민주공화국과 케냐로 30만 명의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다.

 

라자르 아라수 신부가 야외 주일 미사 중에 유아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이날 유아세례를 받은 105명 가운데 서너 살 된 아이도 많다. 엄마들은 전쟁 통에 성당이 폐쇄되고, 오랜 시간 떠돌이 생활을 한 터라 아이의 유아세례 시기를 놓쳤다.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청소년 교육에 종사한 라자르 신부는 교황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하는 변방을 찾아 6개월 전 난민촌에 들어왔다. “난민촌에 사목 공백이 크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와본 날, 신부 방문에 환호하는 난민들에게 발목이 잡혔다”며 “이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미사 참례는커녕 신부 얼굴 한 번 못 봤다”고 말했다. 남수단은 인구의 40%가 가톨릭이다.

 

 

다 잃어도 주님 사랑은 잃지 않았다

 

“난민들 속에 있으면 행복하다. ‘다 잃었지만 주님의 사랑은 잃지 않았다’는 신앙 고백을 수없이 듣는다. 다 버리고 애들만 둘러업고 나온 사람들이다. 반군이 들이닥쳤을 때 자기 자식을 찾지 못해 울고 있던 옆집 애를 데리고 도망 나와 키우는 부인도 있다. 한 인간으로서, 사제로서 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 가난한 과부의 주일 미사 헌금 바구니. 접힌 달러 지폐는 난민들이 봉헌한 게 아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국경에 버스를 대기해놓고 난민들을 실어나른다. 지난달 초에도 수백 명을 실어왔다. 유엔은 난민들이 도착하면 지붕을 덮는 방수포와 담요, 밀가루, 프라이팬, 물통, 태양광 전등 같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를 지급한다. 하지만 식량 배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난민촌에 돌고 있다. 유엔은 기금 모금액이 크게 미달해 국제사회에 긴급히 호소하고 있지만, 아직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라자르 신부도 “유엔이 북부에 있는 난민 100만 명에게 언제까지 식량을 배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난민 마르셀라 아찬(65)씨는 “정부군은 반군 가담자를, 반군은 정부군 가담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에게 총질을 했다”며 “손자들과 숲 속에 숨어 벌벌 떨다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젊은 여성 로즈마리 존(27)씨는 “땔감과 갈대 지붕부터 비누와 생리용품까지 모든 게 다 부족하다”며 “젊은 애들은 온종일 할 일이 없으니까 성관계나 하면서 무턱대고 임신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간다 교회는 난민 문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들에게 달려가 먹을 것을 주고, 옷을 벗어줘야 하지만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난민촌은 서북쪽 아루아 교구 일대에 가장 많다. 그중에서 가장 큰 난민촌이 35만 명이 내려와 있는 비디비디(Bidi Bidi) 지역이다.

 

 

부족한 것은 많은데, 교구가 너무 가난해서… 

 

캄팔라에서 만난 아루아 교구장 사비노 오도키 주교는 “교구 관할 구역에 난민촌만 20개”라며 “신부 15명을 난민촌에 보냈지만, 교구가 가난해 지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물과 식량, 생필품이 너무나 부족하다. 신부들은 나무 그늘에서 미사만 집전하고 나오는 상황이다. 교통수단이 없어 이것저것 얻어타고 난민촌에 들어가는 신부들은 중고 오토바이라도 한 대 사달라고 매일 요청한다. 국제 수도ㆍ선교회 신부들은 본부에서 그나마 지원을 받지만, 우간다 신부들은 기댈 곳이 없다.” 

 

오도키 주교는 “배가 너무 고프면 복음이 잘 들리지 않는다. 교구에 돈이 있다면 신부들 편에 식량과 물을 사서 보내고, 신부들에게 미사 예물을 주고 싶다”며 한국 교회와 고통받는 교회돕기(ACN)에 지원을 호소했다.

 

라자르 신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의 눈에는 식량 다음으로 급한 것이 유치원과 학교인 것 같아 ACN에 지원 요청서를 보냈다. 난민촌의 86%가 아이들과 젊은 여성이다. 학교라고 해봐야 임대한 땅에 나무 기둥을 박아 그 위에 방수포 씌우고, 칠판과 의자만 갖다 놓으면 된다. 교사 월급과 운영비도 생각해야 한다.

 

 

난민촌은 사목적 ‘비상사태’ 

 

“교회는 국제 구호기구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할 필요가 없다. 당장 급한 물고기는 유엔이 주기 때문에 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젊은 여성들은 가족의 죽음과 폭력, 강간 피해로 내면의 상처가 너무나 깊다. 죄인들의 회개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다 운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기도하자는 말을 안 한다. 난민촌은 ‘사목적 비상사태’ 상황이다.” 

 

그는 “젊은이들은 ‘거대한 감옥’ 같은 이곳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을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며 “그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교육 사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아프리카는 왜 가난과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지도를 펴놓고 자로 재서 그어놓은 아프리카의 국경선을 보면 서글프다. 국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지리적ㆍ종족적ㆍ문화적 특성에 따라 형성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19세기 아프리카 쟁탈전에 뛰어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은 그런 특성을 무시한 채 멋대로 국경선을 긋고 식민 통치에 들어갔다. 유럽 정상들이 모여 ‘파이를 나누듯’ 국경선을 정한 베를린 회의(1884년)가 야만적 역사의 한 단면이다.

 

아프리카는 1960년대에 대부분 독립했지만, 유럽의 분할통치 정책과 착취 후유증으로 부족 간 내전에 휩싸였다. 통치 편의를 위해 특정 소수 부족에게 특혜를 주면서 부족 간 화합을 막은 것이다. 

 

켜켜이 쌓인 식민통치의 모순이 폭발한 대표적 사건이 80만 명이 희생된 르완다 내전(1994년)이다. 1960년대 독립과 희망의 시대는 정치 지도자들의 어설픈 사회주의 경제 정책으로 실패했다. 국민의 불만이 높아질수록 독재자들의 탄압은 심해졌다. 정치 지도자와 엘리트들은 유럽 책임론을 주장하면서 부패와 독재를 일삼았다. 

 

아프리카의 비극은 100년 식민통치, 그에 앞서 15세기 유럽인들이 서해 상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된 착취 500년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유럽 식민 종주국 탓만 할 수 없다. 요즘은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 탐욕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 높다.

 

 

고통받는 교회 돕기 ACN KOREA

 

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는 차별과 박해,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는 교황청 산하 단체로, 한국 교회도 1960, 70년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 지부(이사장 염수정 추기경)가 개설됐다. 문의 : 02-796-6440

 

성금 계좌 : 우리은행 1005-303-232450

(예금주 사단법인 에이드투더처치인니드)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일, 팔라벡(우간다)=김원철 기자]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2) 아프리카의 꽃, 사제 성소


학비 못낸 신학생을 내보낼 때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점심을 먹기 무섭게 강당에 뛰어들어와 TV를 켠 라코르 성심소신학교 학생들. 반군에게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소신학생 11명은 교구장 주교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소신학생들이 강당 바닥에 널어놓은 옥수수 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비디오 삼매경에 빠진 광경이 이채롭다. 비디오 시청은 라코르(Lacor) 성심소신학교에서 토요일 오후에나 잠깐 허락되는 유일한 문화생활이다. 

 

소형 브라운관 TV 화면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다. 선을 뽑아 연결한 외부 스피커에선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교생 170명 가운데 상당수가 모여 화면에 코를 박고 손으로 옥수수를 털고 있다. 화면에 비치는 바깥세상은 하나부터 열까지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는 호기심 많은 10대다.

 

우간다 북부 굴루에 있는 라코르 소신학교는 15년 전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간다 북부와 주변국을 공포에 떨게 한 반군 조직 ‘신의 저항군(LRA)’이 2003년 5월 11일 밤 기숙사에 들이닥쳐 소신학생 41명을 끌고 갔다. 반군에게는 순진한 소신학생이 세뇌해 소년병으로 만들기에 좋은 먹잇감이다. 교구장 존 오다마 주교는 ‘잃어버린 자식들’을 찾기 위해 밀림에 들어가 반군 우두머리 조셉 코니를 4번이나 만났다. 그에게 “내 새끼들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눈물로 설득했다. 순차적으로 30명이 풀려났다. 이 가운데 15명이 공부를 계속해 사제가 됐다. 나머지 11명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오다마 주교는 “아비가 어떻게 자식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며 “지금도 11명을 찾기 위해 조셉 코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셉 코니는 몇 년 전 우간다 정부와 미군의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도 꼬리가 밟히지 않았다.

 

 

성소는 풍부한데 신학생 공부시킬 돈 없어

 

하지만 소신학교 입장에서 보면 반군보다 더 큰 두려움은 가난일지 모른다. 우간다는 지난 20년간 LRA가 활개치는 바람에 더 가난해졌다. 사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사제가 되고 싶다는 청소년은 줄을 서 있지만 절반도 수용하지 못한다. 학생들을 먹이고 재우고 공부시킬 돈이 없기 때문이다. 1년 학비는 900달러(96만 원)지만, 그 돈을 다 내는 학생은 반도 안 된다. 교구와 학교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신학생 양성에 쓰고 있다. 강당에 널어 말리는 옥수수를 비롯해 모든 식량은 학교 농장에서 조달한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수업료를 한 푼도 내지 못하는 학생들부터 내보낼 수밖에 없다. 본당들은 모두 가난하다. 본당 출신 신학생을 지원할 형편이 안 된다. 하늘에 의지해 소규모 농사를 짓는 학부모들은 더 가난하다.

 

학장 매튜 오동 몬시뇰은 “퇴학 위기에 처하면 부모는 수업료를 내겠다고 찾아와 20~30달러(2~3만 원)를 내민다”며 “그 돈을 얼마나 어렵게 마련했는지 알기에 그럴 때마다 더 괴롭다”고 말했다. 이어 “우간다에서 사제 한 명은 성당 일대 촌락의 지도자이자 교육자이고, 계몽 운동가”라며 “아프리카 신학생 한 명 ‘입양’하는 마음으로 도와달라는 요청을 한국 교회에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큰 창고를 개조한 성 마리아 비리카 소신학교 기숙사. 이 정도면 시설이 매우 좋은 기숙사에 속한다.

 

 

학비 못 내 두 번이나 휴학 

 

전국 4개 대신학교에서 사제수업을 받는 신학생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캄팔라에 있는 성 마리아 대신학교에서 만난 데이비드 오니에르토(30) 부제는 가난해서 3년 늦게 소신학교에 진학한 데다 그마저도 학비를 내지 못해 두 번이나 휴학했다. 소신학생은 방학이 되거나 휴학을 하게 되면 사용하던 침대 매트리스까지 집에 갖고 가야 한다. 그는 매트리스를 머리에 이고 64㎞ 떨어진 집까지 걸어가던 중 너무나 서럽고 힘든 나머지 동전 한 푼 없이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탔다. 집에 도착해 마당에 있는 닭으로 택시비를 치렀다. 5남 7녀의 중간인 그는 1년 동안 땅콩과 카사바 농사를 지었다. 그 수확물을 학교에 학비 명목으로 봉헌하고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계속 걸어가야 하는데 단지 돈이 떨어졌을 뿐”이라며 “휴학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포기하고 결혼할 거로 생각했지만, 가야 할 ‘길’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땅을 팠다”고 말했다. 이어 “나와 사정이 비슷한 36살 부제와 40살 신학생이 학교에 있다”며 “그들의 꿈을 응원해줄 천사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니에르토 부제는 올해 6월 사제품을 받는다.

 

 

신학교 신축 공사비와 장학금 가장 아쉬워 

 

신학교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골조만 남기고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는 듯한 건물을 여러 채 봤다. 하지만 몇 년째 방치돼 낡아 보이는 신축 공사 골조들이다. ‘가뭄에 비 기다리듯’ 후원 기관이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다. 성 음바가(St.Mbaaga) 대신학교의 부앙가토 교학처장은 “교사(敎舍)는 대부분 1930년대 유럽 선교사들이 지은 건물”이라며 “신축 공사비와 학생들 장학금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인터뷰] 폴 마솔로 신부(성 마리아 대신학교 학장)

 

마솔로 신부는 학장 경력 16년을 합쳐 27년째 신학교에 몸담고 있는 사제 양성 전문가다. 그는 “아프리카의 사제 양성 특징은 전통 종교에서 좋은 점을 찾아 토착화된 사제를 길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족(Gisu)에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다. 

 

“신(하느님)이 사랑하는 땅의 인간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부족회의에서 ‘인간은 늙으면 새로운 살을 갖고 다시 태어나게 해주고, 뱀은 죽게 해달라’고 요청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카멜레온에게 그 요구 사항을 노래로 가르쳐서 신에게 보냈더니, 그놈이 도중에 그걸 까먹고 거꾸로 얘기했다. 그래서 인간은 죽고, 뱀은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부족은 화가 나서 그놈을 잡으려고 숲을 뒤졌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피부색을 수시로 바꿔가며 숨는 바람에 찾지 못했다. 결국 죽음은 신의 탓이 아니라 그런 머리 나쁜 동물을 보낸 인간 탓이라며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옛날이야기로 복음을 풀어갈 수 있다.”

 

그는 “우간다 교회는 신학교 운영비의 10% 정도밖에 부담할 능력이 안 된다”며 “나머지는 모두 바티칸을 비롯한 해외에서 지원을 받는데, 매달 식비와 전기료, 물값, 교직원 월급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털어놨다. 학부모들이 부담하는 몫에 대해서는 “자녀가 보통 8명”이라며 “학비 부담은 (자신들 노후를 기대야 하는) 아들, 딸 순이고 신학생은 ‘내 아들을 원하면 데려가라’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 교회를 향해서는 “질 좋은 사제가 질 좋은 신자와 교회를 만든다”며 “사제 양성 지원은 우간다 교회 전체를 돕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8일, 우간다=김원철 기자]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3) 변방, 카세세교구의 ‘작은 기적’


성당 비좁아 신자 10명 중 7명이 뙤약볕 아래서 미사

 

 

성 미카엘 카부이리 성당의 성체강복 기도회. 난민 수용소나 다름 없었던 이 성당은 2년 만에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순례지 성당이 됐다. 아프리카인들의 남다른 종교적 심성을 올바로 이끌어줄 사목자가 더 많이 필요한 이유다. 김원철 기자.

 

 

그나저나 숨이 막혀서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다. 공간이 꽤 넓은데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콩고민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도시 음폰웨에 있는 성 미카엘 카부이리(Kabuyiri) 성당의 성체강복 기도회. 분향 연기와 쩌렁쩌렁 울리는 찬양 소리, 거기에 주민들 땀내와 체취가 더해져 성당 안은 찜통 같다. 이 성당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유명 가수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가득하다. 국경 수비대 군인들도 달려와 기도회에 참석한다. 

 

음폰웨는 우간다에서 미신과 악령이 들끓는 지역으로 악명 높다. 2년 전 카세세교구장 프랜시스 키비라 주교가 신부를 파견하려고 하자 “그런 곳에 어떻게 신부를 보내느냐”며 모두 말렸다. 프랜시스 주교는 “그때 내가 감기에 걸려 며칠 콜록거리니까, 많이 배웠다는 대학교수조차 악령이 벌써 저주하는 것이라고 걱정했을 정도”라며 “이 작은 도시에서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 이 광경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했다.

 

 

토속 신앙의 뿌리가 깊어 

 

음폰웨는 변방 중의 변방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루엔조리 산맥 너머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내전의 불길을 피해 시도 때도 없이 난민들이 건너온다. 부족 간 갈등과 내전, 미신과 악령, 강간과 에이즈, 마약과 자살…. 흔히 말하는 ‘아프리카의 상처들’로 뒤덮여 있는 버림받은 도시다. 언어도 토속어를 써서 영어와 스와힐리어가 통하지 않는다. 교구장도 강론하려면 통역이 옆에 있어야 한다. 성 미카엘 성당은 오랜 세월 비어 있는 공소로 방치돼 있었다. 옆 나라에서 내전이 격화해 난민들이 넘어오면 국경 수비대가 그 행렬을 몰아 들여보내는 난민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아심웨 신부가 마을을 돌며 수거해온 부적과 주술의식 용품들.

 

 

프랜시스 주교는 “예수님도 광야에서 악령을 물리치셨다”며 사제 파견을 강행했다. 인사 발령 언질을 받은 아심웨 신부는 30일짜리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다녀온 뒤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이 국경도시에 왔다. 소문 그대로였다. 집집이 동물 뼈나 이상한 물건을 신줏단지 모시듯 끼고 살았다. 마귀를 쫓기 위해 문 앞에 닭대가리를 던져놓고, 도로에서는 차 사고 사망자가 끊이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툭하면 젊은이들이 자살했다. 주민들은 이 모든 불행을 악령의 저주라고 믿어왔다. 

 

고도의 문명사회 시각으로 보면 미개한 사람들이다. 가난과 무지(無知)는 닿아 있다. 가난은 무지를 초래하고, 무지는 가난을 연장시킨다. 하지만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갈 일만은 아니다. 이들의 토속 신앙은 종교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생활습관에 가깝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지난 100년간 아프리카에서 눈부시게 성장했다. 가톨릭만 하더라도 전 세계 신자의 20%가 아프리카에 산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토속 신앙을 끊어버린 것은 아니다. 수천 년 이어 내려온 토속 신앙의 현세적, 운명론적 세계관은 이들의 사고와 생활방식 곳곳에 남아 있다. 가령 마녀는 여전히 두려운 대상이다. 공동체에 까닭 모를 불행이 닥치면 조상신이 노해서, 혹은 아이가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 생긴 탈이라고 믿는다.

 

 

사목자 이전에 계몽 운동가로 

 

아심웨 신부는 “부임해서 자비의 해를 맞아 자비의 문을 설치하려고 하니까 ‘악령이 노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말리는 신자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목자 이전에 계몽 운동가가 돼야 했다. 

 

“괴질은 영양 결핍과 위생 문제다. 빈발하는 교통사고는 대형 트럭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국경 소도시의 열악한 도로 사정 탓이다. 젊은이 자살은 빚더미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는 절망적 빈곤이 가장 큰 원인이다. 환자가 생기면 주술사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달려가서 성수 뿌리고 기도해준다. 성당은 24시간 열려 있는 상담실이 됐다. 하지만 악령과 마녀 추방은 참으로 어렵다. 토속 신앙은 뿌리가 깊고, 생명력이 길다.”

 

카세세 주교좌 성당 주일 미사 광경. 성당 내부가 좁아 신자의 약 70%는 밖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버려졌던 이 공소는 사제 한 명이 부임하면서 2년 만에 순례지 성당(Shrine)으로 지정됐다. 야심웨 신부는 “샤워실과 화장실이 꼭 필요하다”고 한국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사제로 살면서 아쉬운 부탁을 해본 적도, 도움을 받아본 적도 없는 수줍은 표정이다. 샤워실은 난민을 위한 시설이다. 국경 수비대가 난민들을 데려오면 여성과 아이들은 성당 시멘트 바닥에서 재운다. 성당도 먹을 것을 내줄 형편은 안 된다. 대신 땀과 흙먼지, 공포로 뒤범벅된 몸이라도 씻고 누울 수 있게 하려는 게 아심웨 신부 소망이다.

 

 

큰 성당 건립 열심히 모금하지만 도움 절실 

 

카세세교구는 또 다른 기적을 준비 중이다. 주교좌 성당은 비좁다. 주일이면 1500여 명 가운데 약 70%가 밖에 서서 미사를 봉헌한다. 신자들이 큰 성당을 짓기 위해 2차 헌금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다. 지난 4년간 4만 달러(약 4200만 원)를 모았다. 터도 넓게 잡아 파놨다. 

 

조셉 키룬기 주임 신부는 “우리 힘으로 4만 달러 적립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새 주교좌 성당은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짓는 첫 성당이 될 것이다. 우리 힘으로 건축비를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으고, 나머지 부족분을 외국 교회에 도와 달라고 요청할 생각으로 여기저기 문을 두드리고 있다.”

 

자체 모금 목표액은 약 1억 7000만 원. ‘기적 같은 일’이 네 번 일어나야 목표액을 채울 수 있다. 신자들이 주교좌 성당 신축이라는 ‘기적’을 이루려면 외국 교회 형제들의 지원이 절실해 보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4일, 카세세(우간다)=김원철 기자]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4) 선교사의 발이 되어주세요


“차량, 아니 중고 오토바이라도 안 될까요?”

 

 

1954년 생산 모델인 성 바오로 신학교의 만능 트럭(오른쪽). 트럭이 탱크 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옆에서 개교 25주년 축제 연극을 연습 중이던 신학생들이 몰려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 트럭은 멈춰 선 지 오래돼 보인다.

 

 

우간다 서부 포트포탈(Fort Portal)에 있는 성 바오로 대신학교 교정을 어슬렁거리다가 살아 움직이는 유물(?)을 발견했다. 구석에 세워둔 폐차 트럭 두 대 중 한 대가 ‘쿠르릉’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학교 주방에서 쓸 땔감을 실어오기 위해 숲에 가는 참이다. 여태껏 엔진 심장이 뛰고, 바퀴가 굴러가는 게 신기하다. 온전한 건 전면부 그릴에 붙어 있는 독일 상용차 제조사 엠블럼뿐이다. 

 

취재에 동행한 고통받는 교회 돕기 동아프리카 담당 토니 젠더(독일인)씨가 휴대전화로 트럭 모델을 검색하더니 탄성을 질렀다. “독일 자동차의 우수성이 입증됐다. 1954년 산(産)!”

 

이 트럭은 사람으로 치면 100살을 넘긴 나이지만 힘깨나 쓴다. 17㎞ 떨어진 농장에서 신학생들이 먹을 바나나와 카사바 등 농작물을 실어온다. 주 2회 농장에 일하러 가는 신학생들을 태우고 도로에 나가면 달릴 줄도 안다. 교내 가축농장에서는 소와 돼지 등을 실어 나른다. 신학교는 운영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식량은 거의 다 자급자족한다. 건축 공사를 할 때도 쓸모가 많다. 

 

이 트럭에 관심을 보이자 학장 라자루스 루인다 신부는 “저 차를 폐차시키고 중고 트럭이라도 한 대 사자는 얘기가 나온 지 10년은 된 것 같다”며 “중고차 시장에 알아보니까 2만 4000유로(약 3000만 원)쯤 하던데, 신학교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이라고 말했다.

 

 

관할 구역은 상상 초월, 이동 수단은 없고 

 

우간다 교회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차량, 그게 안 되면 오토바이라도 한 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 본당의 관할 구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지만, 이동 수단과 도로 사정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지방의 경우 본당에 우리의 공소 개념인 ‘거점지’(outstation)가 30~40개 딸려 있는 것은 예사다. 대중교통이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사목자들에게 차량과 오토바이만큼 필요한 게 없다. 

 

포트포탈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카웅게(Kahunge)본당. 낮에는 원숭이들이 찻길에 철퍼덕 주저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밤이면 코끼리떼가 어슬렁거리는 깊은 밀림에 있다. 성당 마당에 세워져 있는 산악용 오토바이가 눈길을 끌었다. 베네딕트 카카웨지 주임 신부는 “거점지를 방문할 때 타는 오토바이”라며 “우기 진흙탕 길에서는 저 오토바이도 맥을 못 춘다”고 말했다.

 

시멘트로 구멍을 때운 보트를 타고 섬을 찾아가는 부슈왈레본당 관계자들.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내온 사진이다.

 

 

카웅게본당의 거점지는 36개다. 신부가 부지런히 움직여도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신자들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미사를 봉헌하지 못한다. 카카웨지 신부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까지 전하다 보면 거점지 미사 시간은 최소 2시간”이라며 “만일 조금 일찍 끝내면 성의 없는 신부로 낙인(?) 찍힌다”고 말했다. 그나마 오토바이라도 있으면 형편이 나은 본당이다. ‘보다보다’라고 부르는 영업용 오토바이를 불러 뒷좌석에 타고 거점지를 방문하는 사목자가 부지기수다. 

 

카세세교구장 프랜시스 키비라 주교는 “중고 오토바이 한 대 장만해 주지 못한 채 갓 수품한 새 신부를 멀리 떨어진 본당에 파견할 때가 가장 마음 아프다”고 털어놨다.

 

“볼멘소리하는 신부들이 더러 있다. 그러면 ‘일단 가서 신자들 곁에 있어 달라. 신자들은 신부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한다’고 달래서 보낸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워낙 가난한 교구이다 보니 돈 나올 구석이 없다.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주시길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나무 보트 타고 19개 섬 순회

 

나일 강 발원지로 이름 난 진자(Jinza)교구 부슈왈레본당의 사정은 말문이 막힐 정도다. 부슈왈레본당은 교구에서도 가장 오지에 있는 본당인데, 그곳 사목자들은 나무 보트를 타고 빅토리아호수 북부에 있는 19개 섬을 순회한다. 빅토리아호는 길이 402㎞, 너비 322㎞로 면적이 어마어마하다. 한국인 눈에는 대양(大洋)이지 호수가 아니다. 

 

부슈왈레본당에서 사목하다 2년 전 교구청으로 자리를 옮긴 고드프레이 키붐바 신부는 “나무 보트의 구멍 나고 파손된 부위는 안쪽에 시멘트를 발라 타고 다녔다”며 “후임자도 그 배로 19개 섬 73개 거점지를 찾아다니며 사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교구청에서 배로 8시간 걸리는 곳을 갈 수 있겠느냐”며 사진을 보여줬다. 발동기로 가는 우리나라의 ‘똑딱선’ 수준이다. 

 

부슈왈레는 19세기 중반 나일 강 발원지를 찾아 나선 유럽 탐험가들이 발견한 지역이다. 탐험가들이 돌아가 “거기에도 사람이 산다”고 알리자 선교사들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선교사들이 지어놓은 양철지붕 성당만 곳곳에 있을 뿐 사목상 공백 상태나 다름없다. 고드프레이 신부는 “섬에 사는 남성들은 물고기를 팔아 돈을 벌면 술집과 매음굴을 전전하고,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다고 좌절한다”며 “시멘트로 구멍을 때운 보트라도 타고 가서 복음에 깃든 윤리와 희망을 전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 와미카 주교.

 

 

당장 새 사제들에게 오토바이라도…

 

그는 또 “한국 교회가 도와준다면 모터보트를 사서 부슈왈레에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교구장 찰스 와미카 주교는 “사실 보트보다 오토바이가 더 시급하다”며 “당장 새 사제가 4명 나오는데, 그들에게 중고 오토바이라도 한 대씩 사줘서 본당에 내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교회 돕기는 유럽에서 선교용 오토바이를 대량 구매해 아프리카에 많이 실어 보낸다. 하지만 우간다는 선교용 차량에도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탓에 사실상 힘들다. 전 세계 신자들이 한푼 두푼 보내주는 성금을 모아 사목활동을 돕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원사업은 할 수 없다. 

 

우간다에서 유통되는 중고 오토바이는 대부분 두바이에서 실어온 것들이다. 1000유로(약 120만 원) 정도면 쓸만한 것을 고를 수 있다. 고통받는 교회 돕기를 통해 현지 교구에 현금을 지원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21일, 우간다=김원철 기자]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5) 가난과 에이즈


에이즈와 전쟁, 잠시라도 방심하면 재앙으로 돌아오기에…

 

 

- 마리아 무소케 박사(캄팔라 소재 성 프란치스코 병원).

 

 

마리아 무소케(Maria N.Musoke) 박사에게 우간다에 에이즈 환자가 유독 많은 이유를 물었다가 면박을 당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듣고 와서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는 투였다. 한국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고 하자, 마리아 박사는 두 손을 펴 보이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우간다 정부는 에이즈 실태와 그 심각성을 서방 세계에 공개하고, 지원을 받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덕분에 HIV(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 양성 반응 비율이 20년 전 30~35%에서 현재 7%대까지 떨어졌다. 그 실태를 숨기는 아프리카 남부가 훨씬 더 심각하다.”

 

그는 “에이즈는 아프리카인들의 문란한 성관계로 인한 위기가 아니라 빈곤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간다 가톨릭교회가 벌이는 ‘에이즈와의 전쟁’ 최일선에 있는 전사(戰士)다. 교회가 운영하는 캄팔라 소재 성 프란치스코 병원에서 20년째 에이즈와 싸우고 있다. 

 

우간다에서 에이즈는 다소 진정됐다. 2001년 전 세계 신문방송이 미국 9ㆍ11 테러 충격에 휩싸여 흥분한 목소리로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낼 때, 아프리카 의사들은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6000명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다”고 소리쳤다. 9ㆍ11 테러 희생자는 총 2997명이다.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하루 수천 명이 죽어 나가는 재앙적 위기 단계는 지나갔다.

 

 

에이즈, 무시하면 죽는다 

 

포트포탈에 있는 비리카 성가정병원의 에이즈 전문의 프리실라 수녀는 “에이즈는 여전히 힘겨운 도전이지만, 당뇨와 고혈압처럼 약을 꾸준히 먹고 조심하면 다스릴 수 있는 병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촌락을 찾아다니면서 ‘HIV는 당신을 죽이지 않지만, 당신이 무시하면 죽인다’고 계몽한다”고 말했다.

 

북부에 있는 비디비디 난민촌 입구. 인근 본당 관계자들이 방문하지만 사실상 사목적으로 방치돼 있는 곳이다.

 

 

에이즈만큼 인종적 편견과 오해가 많은 병도 없다. 1981년 미국 의학계에 HIV가 처음 보고됐을 때만 해도 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몰랐다. 단지 아프리카에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많고, 원숭이에게서 동종 바이러스가 검출됐다는 이유로 아프리카인들은 인류가 맞닥뜨린 최악의 성병 주범으로 몰렸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성적 편견과 인종차별적 시선이 오해를 키웠다. 호사가들은 아프리카에 내린 ‘신의 형벌’이라는 해석(?)까지 내놨다. 

 

하지만 에이즈 환자들은 한국과 미국에도 있다. 그들이 아프리카 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의약품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면역력이 좋아 바이러스 활동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영양 상태가 부실해 면역력이 떨어지는 아프리카인들은 바이러스에 저항할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마리아 박사는 “1980년대 중반 병원을 운영하던 프란치스코회 수녀들은 환자들이 평화롭게 눈을 감도록 기도해주는 것 외에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약이 없었다. 효능이 좋은 신약은 우리가 쳐다볼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때문에 병원 문턱 한 번 넘어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우리는 2004년 미국 ‘에이즈 퇴치를 위한 대통령 비상 계획’(PEPFAR)으로부터 약을 무상 지원받으면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가망 없어 보이는 환자가 병원에 입원해 며칠 만에 멀쩡한 모습으로 퇴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봤다. 20년째 에이즈 환자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19개 모든 교구가 에이즈 클리닉 운영

 

에이즈와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우간다 교회는 지금도 19개 모든 교구에 에이즈 클리닉 혹은 전담 사무실을 두고 싸우고 있다. 서방 원조기구로부터 약을 지원받아 처방하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보건 교육을 한다. 가톨릭교회의 일관된 작전은 ‘생활 방식의 변화’다. 콘돔 수십억 개를 뿌려서 예방할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건은 날이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다. 의약품과 운영비를 대주던 서방 원조기구들이 해마다 지원액을 줄이고 있다. 당장 성 프란치스코 병원은 영국 카리타스(CAFOD)가 지원 종료를 통보하는 바람에 초비상이 걸렸다.

 

수도 캄팔라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병원에서 에이즈에 걸린 여성들이 간호사와 상담하고 있다. 엄마들은 아이들의 수직 감염 가능성을 가장 걱정한다.

 

 

인력과 도움 절실 

 

마리아 박사는 “병원 클리닉에서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30명이 정신없이 일한다”며 “도움받을 곳을 찾지 못하면 이들을 해고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우간다 주교회의 청소년위원회 조세 자코 총무는 “에이즈와의 전쟁은 진행형”이라며 “요즘도 도시를 벗어나면 비위생적인 칼로 여성 할례를 해서 마을 소녀 10여 명이 동시에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더 많은 사회복지사와 상담가를 양성해 파견해야 하지만, 외부 지원이 끊기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북부 비디비디 난민촌의 고민

 

“사용하고 버린 콘돔이 기도하는 경당 바닥에 널려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주교회의 청소년위원회 조세 자코 총무는 북부 비디비디(Bidi Bidi)에 있는 난민촌 경당에 들어갔다가 기겁하고 뛰쳐나온 경험을 털어놨다. 비디비디 난민촌은 남수단에서 35만 명이 내려와 있는 우간다 최대 수용 시설이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난민촌 젊은이 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HIV 혈액검사, 기초 교리교육, 심리치료 등 그들에게 당장 시급한 것을 제공하는 서비스다. 젊은이들은 내전의 상처가 깊다. 난민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종일 돌을 깨서 1달러(1070원) 버는 것밖에 없다. 사목적으로도 방치돼 있다.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춤과 연극, 스포츠, 복음 나누기보다 좋은 게 없다. 

 

자코 총무는 한국 신자들에게 이 교육 프로젝트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동안 외국 교회 네 군데에 사업 계획서와 지원 요청서를 보냈지만 모두 감감무소식이라고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28일, 우간다=김원철 기자]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간다 교회 (6) 우간다 목자들의 외침


“지원 없으면 식량 배급 · 사제 양성 · 성당 건축 아무것도 안 돼요”

 

 

- 우간다는 한국과 같은 순교자의 나라다. 십자가 양옆의 22명은 1880년대 중반 부간다 왕국의 무왕가 2세 왕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화형을 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이들을 성인으로 선포했다. 전면을 바라보는 양옆의 두 명은 1918년 이슬람 부족에게 끌려갔지만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복자 디우디 오켈로와 질도 이르와다.

 

 

뜻밖의 행운이다. 우간다 방문 취재 중 수도 캄팔라에서 주교회의 정기총회가 열려 우간다 교회 주교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가난한 교회의 목자들은 유머와 해학(諧謔)이 넘쳤다. 일상화된 빈곤을 얘기하는가 싶었는데, 정작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풍요’였다. 가난을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자랑하고 기뻐했다. 가난한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서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 언뜻 비친다. 바오로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몸속의 가시’가 하느님께서 자만하지 말라고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참조)라고 고백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자들을 만날 때 빼놓지 않는 얘기가 “예수님 일을 망치려 드는 악마가 있는데, 그 악마는 항상 주머니를 통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돈 혹은 물질적 풍요를 경계하라는 당부다. 역설적이게도 악마는 우간다 교회의 주머니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 같다. 가난이 축복이라는 뜻이 아니다. 악마도 시큰둥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말이다. 가난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걸으며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에게 한국 교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했다. ‘생생(生生) 마이크’처럼 가감 없이 옮긴다.

 

 

사비노 오칸 오도키 주교(아루아교구)

 

본당을 방문하면 내 차는 ‘달리는 농장’이 된다. 신자들은 가난해서 땅에서 거둬들이는 것, 예를 들어 양ㆍ염소ㆍ닭ㆍ과일ㆍ채소를 예물로 봉헌한다. 나름 정성껏 준비해 봉헌한 예물이라 그냥 주고 올 수도 없다. 만일 그러면 무척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 때문에 돌아올 때면 뒷좌석과 트렁크에서 염소와 닭이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우리 교구를 방문하면 내 차에 태워 ‘달리는 농장’을 구경시켜주겠다. 

 

교구청에서 그 녀석들을 다 키울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는 길에 수도원에 들러 나눠준다. 한 수도원에 몰아주는 게 아니라 두세 군데에 나눠준다. 수도원들은 몇 배 더 가난하다. 염소 한 마리만 줘도 좋다고 손뼉을 친다. 

 

북부에 있는 우리 교구의 가장 큰 도전은 남수단에서 내려온 난민들을 위한 사목이다. 북부에 100만 명이 내려와 있다. 교구 내에 크고 작은 난민촌이 20개나 된다. 주 우간다 교황 대사와 한 달에 한 번꼴로 찾아가보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목은 둘째치고, 가는 길에 생수와 비누라도 한가득 사서 주고 오고 싶다. 

 

난민촌 주변 본당의 신부 15명을 보내고 있지만, 낮에 잠깐 방문하고 나오는 정도다. 신부들은 거기까지 갈 교통편도 없고, 잠잘 곳도 없다. 궁금해서 전화해보면 신부들은 중고 오토바이라도 한 대 사 달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교구 형편을 뻔히 아니까 차량을 지원해달라는 신부는 없다. 한국 교회와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에 중고 오토바이 지원을 요청하고 싶다.

 

 

존 바티스티 오다마 대주교(굴루대교구장)

 

‘신의 저항군’(LRA)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교구 소신학생 11명을 포기하지 않았다.(LRA는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동북부의 반군 조직으로, 소신학생 41명을 끌고 가 30명만 풀어줬다. 지도자 조셉 코니는 소년병 징집과 여성 인신매매로 악명 높은 전쟁 범죄자다. 주교는 소신학생들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조셉 코니를 잘 안다. 내가 목숨을 걸고 4번이나 깊은 밀림으로 그를 찾아가서 눈물로 애원했다. “신부 되려는 아이들을 잡아다 소년병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며 사정했다. 덕분에 30명은 풀려났지만, 나머지는 딱딱한 응어리처럼 가슴에 얹혀 있다. 

 

코니의 아버지는 우리 교구에서 교리교사를 했다. 코니는 제 아버지의 장례 미사를 내가 집전한 것과 내가 지금도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멱살이라도 잡고 내 자식들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인제 그만 투항하라고 설득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정부와 한통속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무런 기별이 없다. 최근 우간다 북부와 주변국의 정정 불안은 LRA 탓이다. 코니가 밀림에서 백기를 들고 나와야 평화가 가능하다. 

 

소신학생 석방과 코니의 회개, 그리고 우간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 달라.(반군 조직에서 풀려난 한 소신학생도 2015년 우간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앞에서 동료들의 무사 귀환과 코니의 회개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미아노 줄리오 구제티 주교(모르토교구장)

 

1986년 우간다에 도착한 이탈리아 캄보니선교회 소속 선교사다. 모르토는 동북부에 위치한 변방 중의 변방으로, 신부가 11명밖에 없다. 

 

소를 키우던 이 적막한 사바나 초원은 1979년 독재자 이디 아민 대통령 축출 이후 총기가 마구 유입되면서 무법천지가 됐다. 사제가 너무 부족해 우간다 주교 형제들에게 사제 파견을 요청하면 “신부들이 ‘그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며 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할 정도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총기를 일제히 거둬들여 혼란이 진정됐다. 

 

그런데 값비싼 광물이 발견되고,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다시 시끄러워졌다. 대형 트럭 80여 대가 줄지어 항구 도시로 돌을 실어 나른다. 여성과 아이들 할 것 없이 주민 상당수가 광산에서 헐값 노동에 시달린다. 더욱이 광산회사가 몇 달 전까지 ‘워라기’라는 독한 술로 임금을 지급해 알코올 중독자가 넘쳐 난다. 허기를 잊게 할 정도로 강한 술인데, 임신 여성도 마구 마셔서 장차 ‘워라기 피해’ 세대가 나타날 것이다. 미국 개척 시대에도 유럽인들이 술로 임금을 지급해 그런 세대가 있었다. 

 

주민들은 너무나 가난하다. 배가 고프다.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많다. 지난 4년간 강우량이 불규칙해 피해가 컸는데, 올해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농작물이 썩어가고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지금 울고 있다. 나도 함께 운다. 

 

교구는 ACN 지원금이 도착하면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순으로 도움을 준다. 그동안 ACN 지원이 없었다면 식량 배급, 사제 양성, 성당 건축 등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 100년이 넘어 붕괴 직전인 대성당을 헐고 다시 짓는다. 교구민 자력으로 짓는 최초의 성당이다. 물론 공사 속도는 ‘거북이걸음’보다 느리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고 있다. 식량을 지원해 주고 성당 건축을 도와주길 호소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4일, 우간다=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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