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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사랑의 기쁨과 가정 성화: 사랑의 기쁨을 통해 보는 오늘날 가정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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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23 ㅣ No.1135

[경향 돋보기 - 「사랑의 기쁨」과 가정 성화] 「사랑의 기쁨」을 통해 보는 오늘날 가정의 현실

 

 

「사랑의 기쁨」 제2장 ‘오늘날 가정의 현실’(32-49항)을 보면 가정의 다양한 문제는 국가를 초월하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다. 가정의 문제들은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은 세계 어디든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통분모 안에 담긴 그 무언가를 찾고자 먼저 위급한 현실 두 가지를 언급해 본다.

 

 

혼인 감소와 출생률 감소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혼인해야 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이다. 혼인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2016년 51.9%로 2010년 64.7%에 비해 떨어졌다.

 

특히 미혼 여성들의 혼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매우 저조하다. 분석 결과 미혼 여성 열 명 가운데 세 명 정도가 혼인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처럼 혼인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 낮다는 것은 이혼한 뒤에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비혼’이 대중화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한편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8년 2분기 합계 출생율(가임기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의 수)은 0.97명에 그쳤다. 그 수가 두 명 이상이어야 인구가 현상 유지되는데, 2018년도 합계 출생율은 한 명 아래로 떨어질 게 확실시된다고 한다. ‘국제연합인구기금’(UNFPA)에서 발표한 ‘2017년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98개국 가운데 합계 출생율이 한 명 이하인 나라는 없었다. 우리나라가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길 날이 가까이 온 듯하여 씁쓸하다.

 

합계 출생율이 한 명 이하로 떨어진다는 것은 젊은이들이 출산 기피를 당연시한다는 반증이다. 저출산으로 새 생명의 탄생 소리가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노인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의학 기술 발전의 혜택도 있지만, 저출산으로 인구 연령의 분포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에 이미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올해는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14% 이상인 ‘고령 사회’에 들어섰다. 이 진입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 이 속도대로라면 2023년엔 한국의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저출산으로 말미암아 소비를 가장 많이 하는 연령대가 급속도로 줄어들면 이른바 ‘인구 절벽’에 다다를 것이다. 출생 인구보다 사망 인구가 더 많은 몇몇 지역은 유령 도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경제 성장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개인 생활은 물론 국가도 여러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빠르면 30년, 늦어도 40년 이내의 우리 현실이다.

 

 

또 다른 어둠의 현상

 

혼인 감소와 출생율 감소라는 이 위급한 현실은 ‘동거와 안락사의 합법화’라는 강력한 어둠의 현상을 조장한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혼인은 감소하지만, 비혼과 동거율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조력 자살’이 전 세계 가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를 합법화하고 있지만, 교회는 이러한 관행을 강력하게 반대한다(48항 참조).

 

‘동거의 합법화’는 말 그대로 합법적으로 동거를 인정하는 것이다(53항 참조). 이 단어는 1999년 프랑스에서 도입한 시민 연대 계약인 ‘팍스’(PACS, Pacte civil de solidarite)에서 비롯한다. 팍스 계약은 혼인과 비슷한 공동생활 형태로 동성을 포함하여 성인 두 사람을 결합하는 제도이다.

 

팍스 계약서를 관할 법원에 제출한 두 사람은 혼인에 준하는 공식적인 동거 짝이 되고, 그들의 자녀 또한 사회적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아 양육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방식의 이 팍스 계약은 혼인 계약과는 다르게 친족 관계도 발생시키지 않으며 계약을 파기할 시에는 간편하게 재산 분할만 하면 된다.

 

이처럼 혼인의 본질에서 가정 경제와 자녀 보호를 부각한 팍스 계약 방식을 선호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하지만 과연 혼인의 본질이 가정의 경제 유지와 자녀 보호에만 국한할까?

 

독일은 2001년 ‘생활동반자법’으로 동거를 법제화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2015년에 도입한 ‘동반 관계 증명 제도’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중앙 법원이 아닌 지방 자치 단체의 조례를 통해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생활동반자법’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2014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지금은 본격적으로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추진 중이다.

 

혼인하지 않고, 생명을 선택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움직임이 유행하는 오늘날,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시대 흐름에 한참 떨어진 사람처럼 취급하는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시류의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식별하고 있는지 반추해 본다.

 

 

가정 문제의 공통분모

 

이렇게 꼬리를 물며 확장해 가는 가정과 관련한 문제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전 세계 어디든 가정과 관련한 여러 문제의 공통 원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왜곡된 자유’와 ‘잘못 이해된 정의’에서 비롯된다. 이로 말미암은 지나친 개인주의는 가정의 유대를 왜곡시켜 결국 가족 구성원을 고립된 개체로 만들어 버린다.

 

소유와 쾌락에 사로잡힌 개인주의와 올바른 길을 벗어난 개성주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을 함께하겠다.”는 혼인 서약을 위협한다(33항 참조). 이러한 위협은 가정을 잠시 머무는 장소로 전략시켜 버린다. 자신에게 유익할 때, 또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만 가정이고, 계산적인 관계가 끝나면 가족의 결속도 불확실해진다.

 

노선을 잃은 개인주의와 개성주의에 젖은 이들이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혼동하는 듯하다. “나 말고는 나를 이끌어 주는 그 어떤 진리와 가치와 원칙은 없다. 또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다.” 이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타인을 이용하고 조종하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이내 내쳐 버린다.

 

그렇기에 자신을 기꺼이 내주는 혼인의 삶은 한 개인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 또 혼인의 위기가 오면 서로 인내하고 깊이 용서하며, 화해하고 희생하려는 노력 없이 성급하게 마무리하려 한다(41항 참조). 결국 이들은 함께 늙어 가며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혼인의 이상을 거부한다(39항 참조).

 

‘참된 자유’는 개인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이성과 의지를 바탕으로 숙고를 통해 행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능력이라 함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으로, 이 힘은 꾸준한 개인적 수양을 통해 키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자유는 인간 행위의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며 선과 정의를 위해 봉사할 때에만 참된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은 늘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반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쾌락과 소유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텅 빈 자유를 외치기에, 결국 늘 회피하고 도망을 다니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혼인과 가정의 왜곡된 정의

 

정의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를 잘못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대접받는 데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된다(33항 참조). 정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타인의 아픔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교회가 말하는 참된 정의는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경신덕),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라 할 수 있다. 사람을 향한 정의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시키는 조화를 인간관계 안에서 확립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07항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권리를 외치며 힘없는 이들의 생존권을 앗아 가는 행위는 왜곡된 정의의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젊은이들과 혼인한 이들에게서조차 가정을 꾸리는 것을 단념하게 만든다. 그 이유로 증가하는 실업률과 주택 문제, 또는 어렵게 잡은 일자리이지만 아기를 낳으면 받게 되는 불이익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혼인과 가정과 생명을 선택하지 않게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혼인과 가정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관념의 영향, 다른 부부의 실패를 보며 그 실패를 피하려는 바람, … 단순히 동거하는 것만으로도 얻어지는 사회적 기회와 경제적 이익, 사랑에 대한 순전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개념,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포기해야 하는 두려움”(40항)등이 있다.

 

그렇다고 선이 결핍된 사회적 시류를 따르고자 혼인을 옹호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일을 멈춘다면 우리가 세상에 줘야 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권위와 규범을 강요하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마음에 와닿는 적절한 언어와 현실적인 제안으로 혼인과 가정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놓인 젊은이와 기성 부부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왔는지에 대한 교회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36항 참조).

 

젊은이들과 기성 부부들에게 혼인과 가정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와 동기를 제시하는데 커다란 책임을 느껴야 하고,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단순히 교리적이고 생명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주제들을 강조하는 것은 혼인에 대한 거부감을 더욱 초래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이 은총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35항 참조).

 

 

사랑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젊은이들과 기성 부부들에게 전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이 진리를 선포하는 데 무엇보다 “선교적 창의성”(57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라는 것이다.

 

혼인과 가정에 대한 사목은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사목 현장에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혼인과 가정 사목의 핵심인 ‘사랑’을 지혜롭게 전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혼인을 통해 서로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키우며 때때로 찾아오는 갈등도 지혜와 인내로 극복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시대가 요청하는 ‘선교적 창의성’으로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기쁘게 맞이하며 양육하도록 선포해야 한다.

 

혼인으로 맺어진 가정의 힘은 경제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사랑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자. 가정의 힘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 안선희 데레사 -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연구원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 위원이다. 교황청립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신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안선희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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