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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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1)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김수환 추기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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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1

1999년 5월 7-14일까지 의정부 한마음 청소년 수련마을에서 서울대교구 사제평생교육원  주최로 열린 사제 연례피정 강의록입니다. 강사는 김수환 추기경님이시고, 주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사제평생교육원 자료실에서 옮겨왔습니다. 첨부파일은 전체 내용입니다.

 

 

제1강의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5월 8일 오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이 소중한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리오며 주님께서 주신 이 시간, 주님과 마주앉아서 주님께서 저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말씀을 우리 모두 귀담아 듣고, 주님의 사랑 속에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소서. 주님의 성령을 저희 마음에 가득히 부어 주시어 저희 마음을 밝혀 주시고, 저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고, 마음의 귀를 열어 주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저희가 이 8일간, 주님의 사랑에 푹 젖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이 아마 이번 피정의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요한1서에 나오는 말씀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성인은 누구인가?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한 주일 동안 이 사랑이신 하느님, 나를 사랑으로 지으시고 사랑으로 구해 주시는 그 하느님, 나의 존재와 삶의 원천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하느님, 한마디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마주앉아서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소중한 시간입니다.

 

만물의 원천이 되시는 그 하느님과 우리가 마주앉아 있다는 것,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 정말 이것 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값지고 더 좋으며 더 필요한 것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보람있고 뜻이 있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다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얼마만큼 우리가 마음으로 그분과 함께 하는가, 그분과 마주앉아 우리가 얼마만큼 이 피정을 기도 가운데 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지내자고 여기 초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여기 신청해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주님의 초대에 응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한 이유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께 응답하는 길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 곧 기도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신부님들한테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고 때늦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겠습니다만 그래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해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목을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쉬실 시간도 식사를 하실 시간도 없었다고 그렇게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도 늦은 시간이 되면 홀로 산으로 가셔서 또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님처럼 5분을 있든, 10분을 있든 정말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아버지 앞에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이 기도이고, 기도를 어떻게 하면 좋은지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이 있는데, 마태오 복음 6장 5절에서 6절, 7절, 8절을 보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 가르침을 살펴보면,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의하면,

 

첫째, 기도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많은 말을 나열하기보다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시는 하느님을 믿는 마음으로 고요히 침묵 속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러니까 내 뜻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정말 열어두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자세가 정말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주님의 기도」가운데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할 때,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부분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을 아무 생각 없이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설령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땅에서"라는 말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시키고 "그저 세상에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가? 아니면 나는 제외하고 그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무의식중에 나를 빼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정말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먼저 내 마음에서부터, 내 삶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그것이 다른 이들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세상에서도 정말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어떤 의미로 자아를 떠나고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의 뜻이라면 예수께서 수난 전 날 저녁에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것이 고통이든지 시련이든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 자세로 하는 것이 참된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언젠가 어느 수도원 신부님께서 저에게 해 주신 말씀 가운데, "사제는 신자들이 보는 곳에서 기도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신자들이 사제가 기도하는 것을 봐야, '아 우리 신부님 정말 기도하시는구나'하고 알게 되고, 그래야 신자들도 신부님을 본받아서 '아, 나도 기도해야 되겠다'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뜻이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일부러 신자들이 보는 시간만을 골라 가지고 성당에 가서 기도하지는 않겠지만, 사제가 꾸준히 기도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아, 우리 신부님은 기도하는 신부님이다'하고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많은 분들이 신자들로부터 그런 평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간혹 가다가 어떤 신자들이 '우리 신부님은 일년이 가도, 이년이 가도 도무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이것은 정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합니까? 그 사람은 냉담 교우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면 그 냉담 교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더구나 신부가 미사도 드려야 하는데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좀 아주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께서 어느 신부에게 "하루에 한시간씩 기도하고, 그리고 신부님 생각에 해서는 안되겠다고 하는 것을 피한다면 신부님 생활은 사제로서 훌륭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하고 말했답니다.

 

그 다음에 기도는 예수님 말씀대로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침묵 속에 하는 기도가 더 좋습니다. 어떤 의미로 여기에 기도의 올바른 자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물론 청원기도도 해야 하고, 때로는 청원기도가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나 병고에 신음하고 있을 때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필요합니다. 또 우리 자신이 시련을 겪을 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필요하고, 더구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나 용기를 잃었을 때 '주님께서 힘을 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내가 나이를 좀 먹으니까요, 차차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어떤 좋은 일도, 좋은 생각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 심지어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올바른 믿음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내 힘만으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나이 때문에 전보다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기도할 때, "주님 저로 하여금 주님을 정말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전보다는 어떤 의미로 잦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물론 청원을 드려야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기도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예를 들면 우리가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한다면 감실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편에서 일방적으로 내 말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니까, 주님께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기도를 한다고 할 때, 그냥 우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는 것이든지 뭐든지 혹은 또 외우고 있는 기도든지, 그렇게 늘어놓고는 주님께는 1분 1초도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주님, 말씀하소서. 이 종이 듣습니다'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면서 그러한 자세로 기다린 적이 있는가를 반성해 보면 참 드물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또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도는 기다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기도를 영어로 'Wasting time'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Wasting time'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시간을 소비하는 것', '시간 낭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시간 낭비라고 하더라도 좋은 낭비입니다. 어차피 우리들은 하루에 낭비하는 시간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면 TV 앞에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데, 이왕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하느님 앞에서 낭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세로 하느님 앞에서 시간을 낭비해 보도록 합시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고 아주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우리와 기도나 신앙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난번에 한달 피정을 할 때 그 곳에 있던 게시판에서 본 것입니다. 그것을 읽어보니까 참 내용이 좋아서 일본말로 적혀 있는 것을 우리말로 옮겨보았습니다. "나의 기도가 가장 신심깊고 내적인 것이 되어갈수록 나 자신 말하는 것이 줄어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나는 완전히 입을 다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기도라는 것은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기도는 그냥 묵묵히 있는 것만이 아니고, 듣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역시 기도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조용히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듣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예를 들면 '기도란 자신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할 때 "듣는다"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이어서 '기도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라고 할 때 거기에 또 "듣는것"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물론 "듣는 것"이라는 말은 같기는 하지만, 그 표현에 담긴 뜻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듣는 것"은 "소리를 그냥 듣는 것"을 말하고, 뒤의 "듣는 것"은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마음으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피정에서 침묵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마음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외적으로 하는 침묵은 이 마음의 침묵을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의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외적으로는 가만히 있지만, 속으로 남을 평가하거나 참견하면서 분주하다면 이것은 마음의 침묵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딴 생각을 하고,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남을 흉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을 보고서 자기 나름대로 평가하고 점수를 매깁니다. 누구는 몇 점이고 누구는 몇 점이고 하는 식으로. 또 누구는 장점이 뭐고 하는 식으로 우리 마음은 그렇게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은 내적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이 피정을 얼마나 잘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얼마만큼 기도하느냐, 또 기도하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여기에 달려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들숨 날숨'이라는 잡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왜관 분도 수도원에서 새로운 천년기는 영성의 시대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뜻에서 '들숨 날숨'이라는 잡지를 얼마 전에 창간하고 출판 기념을 했는데, 그 창간호에 구상 시인이 쓴 시가 실려 있습니다. "영혼의 호흡"이라는 제목으로 기도의 필요성을 시로 쓴 것인데 그것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창세기 첫머리의 표현대로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달리

하느님이 손수 흙으로 빚어서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시어

영혼과 육신을 갖추고 태어난지라

 

우리의 육신은 공기로 숨을 쉬지만

영혼은 성령의 숨을 쉬어야 한다.

 

만일 영혼의 호흡을 모르거나, 멈춰서는

그 목숨, 살아서도 죽은 거나 매한가지요

하느님의 입김, 즉 성령을 숨쉬는 사람만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영혼의 호흡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것은 바로 일상적 기도다!

 

마치 신선한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며

우리의 육신이 활기를 지니고 살 듯이

우리의 영혼은 기도로써 생기를 가꿔

아무리 숨막히는 처지와 절망 속에서도

새롭고 영원한 삶이 어김없이 열린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의 호흡과 함께

끊임없이 정성스레 영혼의 호흡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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