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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군종신부와 대구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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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523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군종신부와 대구대교구


아버지는 조부모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살아계신 부모님을 남겨놓고 단신 월남한 청년의 마음에는 자신은 늙어도 부모님은 도저히 늙지도 않고 돌아가시지도 않았다. 청년은 북한 땅에 하루라도 빨리 갈 방법으로 군대에 있었고 군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그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 이제는 기다림의 장소를 바꾸어야만 했고, 현충원에 누워서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다. 6.25 한국전쟁은 천주교회와 국군과의 관계를 밀접히 맺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6.25 당시 북한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고 남아있던 대구교구는 실제로 전쟁 기간 한국교회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리하여 군종업무나 군종사업후원회 등은 대구에서 출발했다.

한국의 군종제도는 전쟁 중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는 전쟁터에서 성직자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군종신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개념이 없이 단지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군사목의 첫 걸음이 시작되고 있었을 뿐이다. 참전한 신학생들의 노력, 의료봉사활동, 포로수용소에서의 선교 활동 등 각종 봉사활동이 전개되었다. 전쟁 때에는 의료봉사조차도 무보수였다. 신학생, 수녀들은 처음에는 병원에서 발급한 출입증을 지니고 도시락을 싸들고 출퇴근을 했고, 시일이 경과되면서 이들은 병원 나름대로 병실이나 천막을 제공해주어 병원 내에서 숙식을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군에 있던 신자들의 요구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개인적 참여에 따라 군종사목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군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 사목활동이 필요하게 되자 천주교의 캐롤 안 몬시뇰, 장로교의 한경직 목사, 성결교의 유형기 목사 등이 군종단 설립 추진위원으로 선출됐다. 메리놀회 소속 선교사였던 캐롤 몬시뇰을 비롯한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드디어 1951년 육군본부 내에 미국식 군제에 따라 군목과(軍牧科)가 설치되었다. 이듬해 평양교구소속 장대익 신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사목함으로써 군종업무가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는 대구교구 김동한 신부가 해군 최초의 군종신부로 임관했다.

처음 땅을 일군다는 것은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말일지 모른다. 초기 군종신부들은 무보수 촉탁문관으로 활동했는데 교회의 지원마저 넉넉하지 않았고, 1954년에 들어 유급문관으로 전환했다가 휴전 후에야 현역화 되었다. 초기 군종신부들은 사제관도 따로 없었다. 따라서 인근 성당의 방을 하나 얻어 생활하기도 하고, 군종신부 몇몇이 돈을 모아 집을 한 채 전세 내어 살기도 했다. 군부대 내에는 성당도 없어서 개신교 쪽에서 지은 교회를 빌려 미사를 지냈다. 그러다 보니 미사를 드리기 알맞은 시간대의 장소를 얻기가 어려웠다. 어느 신부는 임지에 부임한 다음 기증받은 성모상을 세울 곳이 없어 포장을 풀지도 못했다. 또 군종신부들은 병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야 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실정상 초기의 군종신부들은 개신교 성직자들과 함께 근무했다. 수적으로 개신교 군목에 밀리던 군종신부들로서는 천주교 쪽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불교의 승려들이 군승으로 들어오게 된 이후에도 외부의 지원은 개신교나 불교보다도 훨씬 열악했다.

천주교의 군종사목에서는 우선 신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58년 군종신부단이 창단되었고, 주교회의는 1961년 군종신부단을 정식으로 인준했다. 이때 18명의 신부가 대거 입대해서 군종단이 안고 있는 여러 사목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1963년 주교총회에서는 교구 사제의 10%를 군종에 파견키로 결의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68년에는 김치삼 신부가 군종사상 최초로 육군 군종감이 되었다. 이해 군종단 본부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건물로 이전하면서 군종단의 전용 공간을 확보했다. 1970년대 군에서는 ‘전군신자화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계기로 가톨릭의 군종사목은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되었고, 대대적인 영세식이 거행될 수 있었다. 1972년 육군 ○○군단에서 거행된 영세(780명), 견진(1,060명)식에는 7명의 주교단이 성사를 공동집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각 군 부내 안에 성당건립이 활발해졌다. 차츰 발전해 가던 군사목은 교계제도 안에서도 1989년 드디어 군종교구로 승격되었다.

군종사목은 처음부터 대구와 관계가 깊다. 본래 군종사목이 제도화될 때 육군본부, 공군본부 등이 대구에 있었다.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는 군종신부단 1대 총재였다. 또한 군종신부단 5대 총재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는데, 이때 이문희 주교가 부총재로 일했다. 그리고 대구대교구의 김상목 신부, 서정덕 신부, 박성대 신부 등이 군종감으로 군종교구 발전에 노력했다. 계산성당 출신 김상목 신부는 1984년 17대 해군 군종감으로 취임하였는데 이는 교구에서 탄생한 첫 군종감이자, 해군 최초의 천주교 군종감이었다. 김상목 신부는 1964년 해군 중위로 임관하였는데, 입대 초기에는 장기복무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신교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던 군종제도를 바로 잡기 위해 장기복무를 지원했다. 그는 개신교화 된 군종제도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 군종신부 중에 해군 군종감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군 군종감이 되려면 해군대학을 졸업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시험을 거쳐 해군대학 초급 과정을 이수하고, 이어 해군대학 지휘 참모과정도 마쳤다. 김상목 신부는 루르드에서 개최되는 국제 군인성지순례대회에 참석했다가 각 나라의 군종제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그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군종제도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탄절을 맞아 애기봉 성탄수 점화식을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격년제로 갖게 하는 등 군내에서 각 종교간 조화에 노력했다. 또 그는 성당건립에 주력하였다. 김상목 신부는 해군에 배정된 국방예산으로 성당을 최초로 건립하였다. 바로 해군 통제부성당이 그곳이다. 한편 육군 군종이었던 서정덕 신부는 김상목 신부가 해군에서 실행하려 했던 여러 가지 계획을 육군에도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군종신부단 총대리였던 서정덕 신부는 1985년 육군 군종감에 취임했다. 서정덕 신부는 1937년 대구 비산동에서 태어났다. 1962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삼덕본당의 보좌로 사목하다가 이듬해 육군 중위로 임관, 월남에 파병되어 종군했다. 서정덕 신부는 군종감 시절, 개신교와 불교 등 군종장교들의 일치와 화합을 강조했다. 그리고 박성대 신부는 군종교구 교구장 직무대행직을 맡기도 했다. 1946년 대구에서 출생한 박성대 신부는 1974년 광주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수품, 1978년 임관된 후 장기복무를 지원했다. 1998년 국군중앙성당 및 육군회관에서 정명조 주교 환송 행사가 베풀어졌을 때 한 그의 환송사에서 군종교구의 생활이 잘 드러난다.

“경제적 자립 능력이 없어 다른 교구장님들의 호주머니를 훔쳐보시며 거지 주교님으로 사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략) 돈만 얻어오면 되는 것도 아니고 신부까지 얻어 와야 하는 진짜 거지 주교님이셨습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은 하나도 없고 모두 얻어온 자식들뿐이었으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군종사목의 발전과정은 1950년부터 군사목 태동시대, 1958년부터 군종신부단 시대, 1989년 군종교구시대로 구분한다.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대구대교구 출신 사제들은 군을 선교의 황금어장으로 가꾸어 왔다. 군종제도가 시작된 이후 2000년 현재까지 465명의 군종신부가 있었다. 그 가운데 대구대교구에서는 60여 명의 군종신부를 배출했다. 이문희 대주교(공군), 서정덕 주교(육군), 조환길 대주교(육군)와 김상목 신부(해군 군종감), 박성대 신부(교구장 직무대행)를 비롯하여 신상도, 박춘택, 이임춘, 윤광제, 전주원, 박형진, 박춘식, 김용찬, 박창수, 조정헌, 김기조, 이재명, 최현철, 김용효, 최휘인, 이용호, 황용식, 김철재, 황주철, 정성해, 김정우, 정삼덕, 김현종, 김원조, 서정섭, 한재상, 최재영, 이성구, 김두찬, 박철, 임석환, 이기수, 김명섭, 신홍식, 김성호, 김영수 신부 (이상 육군), 전달출, 김용길, 김문순, 장정식, 이재원, 이상국, 류승기, 박영일 신부(이상 공군), 박도식, 장태식, 김진호, 천광성, 나진흠, 김준우, 서하기, 이영재 신부(이상 해군) 등이 그 황금어장의 어부였다. 강영철 신부는 초창기라 육군과 공군을 아울러 사목했다. 군대란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거치는 곳이다. 그곳은 젊은 시절,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 시절을 추억하면서도 마지못해 불려온 시간이라고 치부한다. 어떤 연대장은 이곳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배우고 어머니 또한 자식과의 분리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했다. 서상우 신부가 남긴 6.25 회고기는 군의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나는 군종으로 임관되어 연일 전선으로 투입되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신병들에게 역 광장에서 사기를 앙양시키는 종교 강연을 했다. 일장의 훈화를 끝내면 묵주와 성모패를 신자 병사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이때는 성당에 발걸음도 해보지 못한 비신자들까지도 신자로 돌변한다. 묵주를 받아 소중히 목에 거는 신자병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병사 한명이 번쩍 손을 들었다. “신부님, 저에게도 그것 하나 주이소.”, “당신도 천주교 신자요? 본명이 무엇입니까?”, “마리아입니다.” 들은풍월은 있었던지 이 욕심 많은 병사는 그만 여자 본명을 대고 말았다. 그러자 광장에는 때 아닌 폭소가 터졌다.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묵주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특성을 묻으며 전체의 한 부분으로 훈련받는 젊은이들은 군 복무기간에 어쩜 매일 전쟁에 나가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또 군은 타의이지만 가장 타인과 밀접하게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군종신부는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를 함께 사목해야 하며, 군종신부의 봉사는 국민 전체에게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대구는 그런 군종사목이 태동한 곳이며, 대구대교구의 많은 사제들이 군종사목을 위해 땀을 흘렸다. 그들의 땀은 대구대교구사의 일부임과 동시에 우리 군종사의 줄기가 된다.(도움 : 박성대 신부, 『군종교구 50년사』)

[월간빛, 2012년 6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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