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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교회 안 상징 읽기: 박(조롱박) - 인간의 참회와 그리스도 부활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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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3-23 ㅣ No.2722

[교회 안 상징 읽기] 박(조롱박) : 인간의 참회와 그리스도 부활의 표지

 

 

- 크리벨리, <아기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왼쪽 위의 길쭉한 열매가 박)

 

 

사과와 박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성화들에는 종종 사과와 박이 묘사되어 나온다. 여기서 사과는 흔히 인류의 원죄와 타락을 나타내고, 박은 그것들을 해소하시고 제거하신 분, 곧 죄에 떨어진 인류를 죄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로 말미암은 벌(죽음)을 거슬러 거둔 구원의 승리인 바,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예전의 가톨릭 신자들은 나리꽃(백합), 벌어지는 석류, 종려나무, 달걀 등 상징성을 지닌 사물들을 통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부활을 가리키는 상징에는 박도 포함된다.

 

가령, 15세기의 화가 크리벨리(Carlo Crivelli)의 ‘아기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Madonna with the Child)이란 작품에서 우리는 인류의 원죄 또는 죽음을 상징하는 사과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박을 볼 수 있다. 크리벨리는 ‘사과-박’이라는 모티프를 그만의 서명 문양(시그니처 모티프)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작품에 즐겨 사용했다. 그의 다른 작품 ‘성 에미디오가 함께한 주님 탄생 예고’(The Annunciation with St. Emidius)에서도 또한 사과와 박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사과는 인류의 타락을 나타내고 박은 구속(救贖), 곧 마리아의 수락 응답인 ‘피아트’(Fiat, 루카 1,38 참조)를 통해 이룩될 인류 구속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는 사과가 인류의 타락을 뜻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겠지만, 박이 주님의 부활과 인류의 구원을 상징한다는 것은 낯설어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예형 인물인 요나와 관련된 박

 

요나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박은 요나와 관련되는 식물이다. 요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그 도시와 그 안의 주민들이 우상숭배와 악행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사명을 이행하지 않으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항해 중에 폭풍이 일었고, 요나는 바다로 던져졌으며, 고래(큰 물고기)에게 삼켜졌다. 그 물고기는 사흘 낮 사흘 밤이 지난 뒤에 요나를 바닷가에다 토해냈다.

 

훗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40) 그리하여 요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표 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 박덩굴 그늘에서 쉬는 요나.

 

 

요나는 다시금 니네베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40일 뒤에 그 도시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수행했다. 니네베의 왕과 시민들은 요나의 경고를 귀담아듣고 즉시 뉘우쳤고, 하느님은 그 도시를 벌하지 않으셨다. 니네베에서 물러나온 요나는 하느님께서 그 도시에 자비를 베푸신 데에 실망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요나는 더위에 지치고 허약해졌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그늘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밤사이에 자라게 하신 박 덩굴을 발견하고는 그 아래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나 다음날 벌레가 쏠아대자 박 덩굴은 이내 시들어 버렸고, 요나는 괴로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 12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고작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박 덩굴 하나 때문에 그토록 역정을 내냐며 요나를 꾸짖으셨다. 당신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을 두고 투덜댈 것이 아니라 니네베의 시민들이 당신의 경고를 받아들여 회개하고 목숨을 구한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사실, 훗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였듯이, 요나가 니네베에 간 것은 그 도시와 그곳 사람들을 멸망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력으로 해서 박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파멸을 면한 뒤에 기쁨 속에 누리게 된 새로운 생명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박 덩굴을 쏠아댄 벌레는 자기 원수들이 구원된 것을 보며 오히려 속 쓰려 한 요나의 심정을 나타낸다.

 

카타콤바의 벽화들에서 보듯이, 교회는 일찍부터 요나가 큰 물고기에 의해 바닷가에 던져진 모습이며 그런 다음에 니네베 외곽의 언덕배기를 뒤덮은 박 덩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는 모습을 묘사하곤 했다. 그리고 시들어 버린 박 덩굴로 해서 꾸중을 들은 요나는 교회에서 박에 의해 예언자가 된 사람으로 여겨졌다.

 

 

현세의 순례 여정에서 행하는 참회의 상징

 

박 덩굴은 밤사이에 자라나 잠시나마 요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낮 동안에 시들어 버렸다. 이는 우리가 좋으신 하느님을 믿고 의탁해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현세 삶의 좋고 즐거운 것은 그저 한순간의 일일 따름이며, 우리는 결국에는 하늘나라를 지향하며 이승에서 순례자로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명에 따라 밤사이에 자라났다가 이내 죽어 버린 박 덩굴은, 그리고 그 겉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쉽사리 깨어지는 박 열매는 현세의 삶과 이러한 삶이 주는 즐거움의 부질없음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훗날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는 박의 이런 점을 묵상하는 한편 물을 담는 수통으로 호리병박을 순례용 지팡이에 달아 휴대하곤 했다. 마침내 지팡이와 호리병박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성 야고보 사도의 길)를 걷는 순례자를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조롱박과 순례자의 지팡이(또는 막대기)는 토비야의 여정에 동행한 라파엘 대천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 뒤러, <서재 안의 성 예로니모>

 

 

성 예로니모와 성 아우구스티노 사이의 실랑이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이 상징성 풍부한 박이 아니라 아주까리로 번역되어 있다. 이렇게 된 뒷이야기에는 위대한 두 성인의 실랑이가 있었다.

 

성 예로니모가 요나서 4,6을 번역할 때였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 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여기서 ‘아주까리’에 해당하는 단어(히브리어 키카욘, kikayon)가 이전의 라틴어 성경에서는 쿠쿠비타(cucubita, 조롱박 또는 박)였다. 그런데 성 예로니모는 이것이 덜 정확한 번역이라고 여겨 헤데라(hedera, 아이비의 일종)로 옮겼다.

 

이 번역을 두고 많은 학자들이 신랄하게 공격해댔다. 이 논란은 격렬해졌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교구에서 성 예로니모의 불가타 성경 사용을 금지하고 70인역과 시리아역 성경을 사용하게 했다. 아이비를 뜻하는 단어로 번역한 것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성 예로니모는 자신의 번역을 옹호하기 위해 성인 특유의 풍자적인 신랄함을 곁들인 장황한 주석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견해에 승복하게 되었다.

 

이 일화를 두고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뒤러(Albrecht Dürer)는 ‘서재 안의 성 예로니모’(St Jerome in His Study)라는 작품에서 서까래에 크고 마른 박을 그려 넣음으로써 언어학적 논란에서 한발 물러서며 양보한 성 예로니모의 겸손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3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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