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우리와 온 창조물 곁에 함께 있어 주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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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20 ㅣ No.1831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우리와 온 창조물 곁에 함께 있어 주시는 하느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현존”하십니다.(「찬미받으소서」, 80항) “내면”은 안 혹은 속이라는 뜻이고 “현존(現存) 한다.”는 말은 “곁에 있다.”는 뜻인데요, 우리 교회는 이것을 하느님께서는 “안 계시는 곳 없이 모든 곳에 다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어 존재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몸과 마음과 정신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거처이면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말할 때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말을 머리로 알 수 있고,가슴으로 느낄 수 있고 발바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과 발바닥으로 사는 것이 통합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이 살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머리와 가슴과 발바닥이 통합된 신앙 살이가 가능해질 때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인격을 부당하게 모욕하면,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폭력을 가하면, 그 존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모욕당하고 하느님이 폭행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느끼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행동하게 됩니다. 감실 안에 계신 성체가 훼손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실천해 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감실이고 성전이며 하느님의 자녀이니까요.

 

우리나라에 살던 한 신앙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부터 아무리 어린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라면서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어떠신가요? 우리나라에서 어른들과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이 여러분이 어릴 때 여러분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아시고 이 신학적, 영성적 사실을 존중하면서 여러분을 대하셨는지요? 그분들이 이것을 잘 알고 사셨을 수도 있고, 이렇게 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은 어떠한지요? 우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나 청소년들이나 청년들 안에, 혹은 후배들 안에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살고 계시다는 이 신학적, 영성적 진리를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고 발바닥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살이를 해오면서 교회에서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요. 이것만 제대로 알면 다 압니다. 이것만 제대로 살면 다 삽니다.

 

“내 이름 예솔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아니, 너 말구 네 아범!”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아니, 너 아니고 네 엄마!” 아버지를 어머니를 “예솔아” 하고 부르는 건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 계시기 때문일거야! 이런 노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가운데 어디인가는 하느님을 닮은 데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모습으로”(창세 1,26) 곧 “당신의 모습으로”(창세 1,28)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점에서 하느님을 닮았는지, 어떤 점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찾아보면서, 우리가 함께 사는 그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닮지 않은 모습 말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관상하는 기쁨과 축복이 우리 신앙 공동체에 충만하기를 바라면서 5월을 맞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이 모든 창조물의 공동의 기원(96항)이시고 “공동의 도착점”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83항) “공동의 기원”이라는 말은 “같은 부모”이시다는 말이고, “공동의 도착점”은 “동일한 목표점”이라는 뜻이겠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 사회가 하느님의 온 살림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89항)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온 생명의 원천인 “아버지로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과 관계를 맺어주십니다.(96 항)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사람은 물론 우주 만물도 새롭게 변화시키셔서, 온 창조물이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충만”(83항)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빛나는 현존”으로 가득 차게 해주셨습니다.(100항)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온 창조물과 “우주적 가족”(89항)이 되고, “우주적 형제애”(92항)와 “우주적 친교”(76, 92, 220항)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산에 갈 때마다 경외와 충만, 기쁨, 감사, 아름다움, 신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산의 모습이, 그리고 산에 사는 모든 생명과 존재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제각각 담고 있고 하느님의 솜씨를 증거하며 하느님과 예수님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234, 84항 등 참조)

 

살아 있는 모든 풀은 겨울을 겨우겨우 살 줄 아는 생명의 지혜로 차가운 바람과 눈을 견뎌 내고 봄을 맞을 줄 압니다. 이런 깊은 생명력으로 땅에서 물을 받아서 싹을 틔울 줄 알고 여를 무더위를 견디며 씨앗을 익혀 갈 줄 압니다. 나무들도, 저 새들도, 개와 길고양이들도 이런 생태적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저 산과 들과 강과 바다는 그 많은 생명을 품고 봄을 맞고 여름을 나고 가을을 맞고 겨울을 넘어 다시 봄으로 이어줍니다.

 

이 모든 생명과 존재들에게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 주시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살리심에 얼마나 가까이 있겠는지요. 그들은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기쁠 때, 그리고 우리가 외로울 때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다양한 거울들, 이 사람 거울, 저 사람 거울, 이 사건 거울, 저 사건 거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거울들을 통해서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모습도 보면서, 그리고 자연에 비쳐지는 그분의 모습도 함께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시는 깊은 사랑을 체험하는 아름다운 날들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일터에서 성당에서 길을 가면서 어디서든 만나는 모든 존재들의 얼굴에서 풀과 나무와 새와 벌레와 동물들에서 흙과 물과 빛과 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번 자연 나눔을 위해서 한 분께서 “땅”과 “물”을 가깝게 느끼시는 것으로 선택하시고, “천둥”을 꺼리는 것으로 선택하셔서 보내주셨습니다. 물과 땅을 선택하신 이유는 삶에서 가장 가까이 느껴지기 때문이라 하셨고, 천둥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물처럼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중심을 지켜 가시면서 땅처럼 온유하게 그러면서 하늘의 기운을 받을 줄 아는 열린 마음으로 그분의 살림에 아름답게 참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한 분은 가깝게 느끼는 자연물로 “불”과 “바람”을 선택하시고, 꺼리는 것은 “천둥”이라 하셨습니다. 이 분은 불과 바람의 상관관계를 자신의 신앙 살이와 연결하여 이렇게 성찰하십니다. “내 마음 안에 십자가의 사랑이 피어오르다가도 탐욕과 교만의 바람이 조금만 불어와도 작은 불꽂은 이내 시들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믿음의 불꽃이 흔들리게 만드는 “바람이 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라는 “불씨”를 만날 때 이루어지는 일들을 기억하시면서 이렇게 감사를 피력하십니다. “하지만 고해성사의 불씨는 샛바람에도 다시 난로가 되어 나와 주위를 따뜻이 데워준다. 불과 바람은 고마워라.”

 

이번에는 성금요일과 연결해서 천등을 묵상하시면서 올라온 성찰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천둥. 우르릉 꽝! 소리에 가슴 한켠이 무너지듯 놀란다. 뭘 잘못했을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언중에 대화를 나눈다. 저 때문은 아니겠지요. 변명을 하면서 고개를 떨굽니다. 성금요일을 묵상하면서.” 불과 바람과 천등에 대한 묵상을 마치고 나서 “색다른 묵상이었다.”고 하시면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셨습니다.

 

우리가 가까이서 늘 만날 수 있는 바람과 불을 보면서, 탐욕과 교만의 바람과 고해성사의 불씨를 살려주시는 하느님의 바람을 대비시켜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믿음의 불꽃과 고해성사의 불꽃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읽어내고 이에 대해서 성찰하신 것을 함께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들을 새롭게 만나도록 초대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부활로 새롭게 충만해진 주님의 자연 만물 안에서 날마다 아름답게 주님과 함께 사시는 믿음의 축복을 더욱더 깊게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샬롬! 죽음에서 일으켜지신 주님의 현존 안에서요.

 

[월간빛, 2021년 5월호,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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