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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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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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1-17 ㅣ No.1131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악당

 

 

영화 안에는 수많은 캐릭터(Character, 등장인물)가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갈등의 중심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바로 ‘악당(惡黨, villain)’이다. 악당은 액션, 스릴러 혹은 범죄 영화에만 등장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멜로나 가족, 어린이 장르까지 모든 영화에 등장한다. 왜냐하면 악당은 갈등을 발생시키고 갈등을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음모를 꾸며 주인공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분노를 일으켜 어느새 주인공과 관객자신을 동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습게도 예전에는 영화에서 악당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 현실에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불편한 상황을 겪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쨌든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가 끝나면 악당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악당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성경에도 많은 악당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뱀,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등장하는 형 카인, 이집트 상인들에게 막냇동생 요셉을 팔아먹은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못살게 굴던 이집트왕 파라오 등 수많은 악당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마태 23,33)라는 심한 표현까지 쓰시며 지목하신 최고의 악당은 누구였을까?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왕일까? 동족들에게 세금을 뜯어 이익을 챙기던 세리들일까? 아니면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내린 빌라도 총독일까? 아니다. 예수님에게 최고의 악당으로 비난받은 이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유다사회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위치에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몇 백 개나 되는 율법조항을 지키려 했고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했으며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성구갑에 넣어 머리에 두르고 다녔고 항상 기도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마태 23,1-36)라는 표현을 여덟 번이나 쓰시며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셨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인(義人)처럼 말과 행동을 하고 자신들처럼 살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 취급하였지만 정작 그들의 속은 율법조항 문구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경제적 이익을 탐하고 권력을 위해 음모와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최고의 악당 캐릭터였던 이유, 그들이 악당이면서 악당이 아닌 척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2000년도 훨씬 지났지만 우리는 주위에서 악당이면서 악당이 아닌 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니 이해하라.’는 식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모든 언행을 선의(善意)로 정당화시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거나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악당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들먹이는 이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과 같은 진짜 악당들이다. 그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그랬듯이 회개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는 착각,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악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악당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사람에게는 다윗처럼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들은 본연의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없기에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자신만 모른 채 온갖 추악함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약(弱)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악(惡)한 사람이다. 영화에서는 수퍼히어로들이 등장해서 악한 이들에게서 약한 이들을 구해주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악(惡)한 이들 앞에서 약(弱)해지면 안된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마태 5,37) 하면 된다. 그들은 악하지만 강하지는 않으며 용기는 커녕 객기조차 없기 때문이다. 악이 나를 함부로 하도록, 우리 공동체를 함부로 하도록 약해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약함이 그들의 악을 정당화 시키고 우리의 약함이 악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기도 안에서 깨어 있기를 소망한다.

 

[월간빛, 2018년 11월호,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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