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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 TV - 연속극과 자본, 그 불순한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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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3 ㅣ No.862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TV


연속극과 자본, 그 불순한 동맹



MBC 드라마 ‘여자를 울려’ 한 장면.(MBC 제공)


드라마 비평가들이 과도한 PPL(배경, 협찬 소품을 이용한 간접광고)을 지적하기 시작한 때가 약 10년 전이었다. 당시 PPL은 조연들이 감당할 일종의 필요악이었다. 예컨대 ‘파리의 연인’(2004년)에서 주인공은 절절한 로맨스를 연기하고, 주인공 친구는 갖가지 소품을 사용하며 장점을 자랑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채널 간 경쟁이 심화된 지금, 협찬사에서 많은 비용을 끌어와야 하는 제작자들은 주인공뿐 아니라 드라마 배경까지 기업 광고의 제물로 바치는 처지가 됐다. 그 대표적인 장르가 장기간 제작비를 대야 하는 연속극이다.

6개월마다 작품이 교체되긴 하지만, 최근 연속극들의 설정은 대동소이하다. 인물과 사건은 달라도 빠지지 않는 배경은 대기업이다. 기업 자본은 ‘제작지원’이라는 미명 아래 드라마 속 세상을 장악하고, 시청자는 퓨전 요리(‘여왕의 꽃’), 골프용품(‘여자를 울려’), 아웃도어 의류(‘위대한 조강지처’, ‘돌아온 황금복’) 등을 감상당한다. 배경에 딸려 오는 인물들―기품 있는 회장님, 욕심 많은 사모님, 젊고 유능한 후계자, 불운을 이겨낸 신데렐라, 후계자를 노리는 악녀 등은 대기업 브랜드, 신데렐라의 서민 가족들은 소자본으로 개업할 수 있다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모델이 된다. 배경이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배경을 위해 존재하는 격이다.

‘대기업 연속극’에 따라오는 또 다른 단골 설정은 기업 승계 경쟁과 권선징악 구도다. 선한 후계자와 신데렐라는 경영 능력이 검증된 바 없어도 훼방꾼들을 물리치고 건전한 기업주로 등극하고, 신데렐라의 악한 라이벌과 탐욕스런 회장 사모님은 처절한 몰락 끝에 죄를 뉘우친다. 이러한 갈등과 결말은 시청자의 정의감을 충족하는 동시에 부조리를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아무리 가상의 각본이고 현실도 일면 그렇다지만, 수천 명 직원의 헌신, 정부의 지원, 소비자의 신뢰로 성장해 온 회사가 기업주 일가의 전유물로 남는 결말을 보노라면, 드라마 제작진이 기업 대변인을 자처하며 “회장님의 회사는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당연하니 남들은 상관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극 중 회사의 실무자와 중간관리자들이 주인공을 음해하거나 경영권을 노리는 식의 왜곡된 설정은 현실의 노동자들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연속극과 기업 자본의 동맹은 점점 공고해질 것이다. 드라마는 제작비가 필요하고 기업은 대중적 인지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PPL 확산 초기에는 제작지원 기업들이 브랜드를 살짝 변형하는 정도의 염치는 있었지만, 지금은 브랜드의 로고가 그대로 반복 노출되는 상황이다.

드라마는 환상이지만 화면 속 상품은 실재하는 것이기에, 간접광고 상품들은 선남선녀 배우들의 후광을 타고 시청자의 의식에 파고든다. 드라마의 비윤리적 묘사와 상투성에 대한 비난은 작가와 연출자에게 떠넘긴 채, 오늘도 기업 자본은 사회적 책임을 배제한 부에 대한 맹목적 선망과 소비욕을 대중에게 주입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
김은영(TV칼럼니스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향잡지 기자를 거쳐 미디어부에서 언론홍보를 담당한다. 2008년 <매거진T> 비평 공모전에 당선된 뒤 <무비위크>, <10아시아> 등에 TV 비평을 썼고, 2011년에 단행본 <예능은 힘이 세다>를 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일,
김은영(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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