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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7: 크리스토프 쇤보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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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2-14 ㅣ No.36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27) 크리스토프 쇤보른 (하)

그리스도, 인간 사고 넘어선 하느님의 새로움 알려주는 분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거부되고 박해받았다. 쇤보른은 초대교회가 혹독한 박해와 몰이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던 확신에 주목한다. [CNS]


쇤보른의 그리스도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신의 역작 「나자렛 예수」 제2권 머리말에서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그리스도론 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크리스토프 쇤보른을 언급한다. 쇤보른이 2002년 출간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라는 제목의 그리스도론 작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스위스 루가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앙리 드 뤼박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신학자들이 현대 신학 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가톨릭신학교과서협회(AMATECA)를 설립한다. 여기에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 스페인어권과 영어권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종교학, 철학에서부터 기초신학,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성사론, 전례학, 사목신학, 교회법, 교회사, 인간학, 영성신학, 윤리신학, 사회교리, 종말론 등을 망라하는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신학교재 23권을 기획했고, 각 저작은 현재 꾸준히 출판 중이다. 이 시리즈물은 현대 신학의 전망 위에서 신학 개념을 충실히 소개하며 신학 교육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세계 각국 언어로도 번역 중이다. 쇤보른은 가톨릭신학교과서협회 대표로 교재 편찬 작업에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시리즈의 제5부 그리스도론 부분을 집필했다.
 

위기의 그리스도

쇤보른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많은 이가 종교를 심리학적 투사물이라고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만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만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계신 주님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리스도론을 한 채의 건물로 비유한다면, 이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은 성경과 전승, 경험이라 하겠다. 성경의 근거와 교회의 가르침, 믿는 이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이래 이 세 기둥이 차례차례 흔들리며 무너져 간다. 그 시작은 전승의 기둥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순수 복음을 왜곡한다고 전제하며 전승을 버리고 성경만으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승의 확실성이 파괴된 것이다. 그 다음 계몽주의가 도래해 역사학의 방법으로만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 또한 오류와 조작의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성경 역시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어서 심리학이 등장해 종교적 경험을 다만 인간 욕구의 투사라고 이해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을 심리적인 작용으로만 설명했다. 신앙 경험은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이다. 전승과 성경과 경험의 세 기둥이 무너져가는 이때, 그리스도론이라는 건물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는가.

여기에 더해 쇤보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긴장감을 조성한 세 가지 위기를 언급한다. 먼저 자연과학이 가져온 위기다. 근대 이전 세계상에서 인간은 창조계의 화관이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된 강생의 신비는 우주의 중심인 지구 위에서 피조물의 정점인 인간을 수용하는 사건으로 이해돼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명체의 유구한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이고, 지구는 우주의 극미한 한 부분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강생을 우주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구원사건이라고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두 번째는 역사의 위기다.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역사의 우연 진리는 필연적 이성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 퍼졌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한 사건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또한 모든 역사 사건에 매여 있는 근원적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과거의 다른 역사적 인물이 현재에 던져주는 교훈 그 이상의 의미를 그분에게서 찾아내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쇤보른은 여기서 '신-아리우스주의'를 말한다. 많은 이가 예수님에게서 위대한 한 인간을 바라볼 뿐,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주님이신 그분의 신원을 망각하고 훼손하며 또 이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장 심각한 실존적 위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선포하는 교회의 구성원은 과연 그 진리를 증언하며 살아왔는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며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가. 메시아가 왔다고 하는데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점철돼 있는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마주 대할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신앙은 조작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 예수를 하느님으로 신격화한 교회의 음모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줄기차게 감싸고 있었다. 그 근원적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3)라고 밝혔다. 율법의 백성인 유다인에게 십자가는 하느님 저주의 표징이요, 지혜로운 그리스인에겐 어리석음의 상징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2,22-23 참조).

희랍 철학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고통을 겪을 수도 배신을 당할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십자가 위에 죽으신 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은 사람들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 초대교회 시대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는 그리스도교를 조롱하며 말한다. "자신이 약속한 바를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 그 사람을, 우리가 고발하고 심판하고 형벌 받을 죄인으로 단죄했을 때 숨어있던 그 사람을, 비겁하게도 도망쳤다가 소위 자기 제자 일당에게 배신당해 붙잡힌 그 사람을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하느님이라면 도주하지 말았어야 하고 체포되지 않았어야 하고 배반당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구원자, 위대한 하느님의 아드님, 기쁜 소식의 선포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가?"

켈수스의 말은 일리가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관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초대교회 구성원 역시 이를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처음 예고하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한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흠모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죽임을 당하리라 말씀하시는데 과연 어떤 제자가 베드로처럼 행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사람의 생각에서 보면 베드로나 켈수스의 입장이 훨씬 더 합당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여전히 하느님의 생각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가 아무리 치밀하게 사유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생각을 결론으로 도출해내지 못한다.
 

초대교회 믿음에 주목

신학은 우리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생각을 구축하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를 신앙으로 수용하고 이성으로 성찰하면서 심화된다.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 당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로 이뤄내시는 행위를 인간 편에서 속박할 수 없다. 신학은 하느님의 사건을 대면하며 그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 논리를 찾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 이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분을 신격화해 하느님이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화 됐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의 및 예수님의 강생, 부활, 동정 마리아로부터 탄생 교의는 교회가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작하거나 미화한 내용이다.

그런데 역사적 궤적을 따라 진지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거부되고 박해받았다. 초대교회로선 혹독한 박해와 몰이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조작할 이유가 없었다. 쇤보른은 바오로 사도를 주목한다. "그분(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주님, '호 퀴리오스'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한 분 하느님께만 드린 호칭이다. 바오로 역시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선포한다고 박해했는데,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근본적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건은 바오로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이전의 그는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위험분자, 신성모독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는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분명히 밝힌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부활하신 분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의미가 있다고, 그분의 죽음과 지상 행적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지탱되고 또 의도됐다고, 그분의 말씀은 참되고 그분의 가르침은 올바르다고, 이는 모두 하느님 그분의 행위 자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고와 관습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알려주신다. 하느님은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둡고 절망스러운 곳,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오시어 죄와 고통, 유한성과 죽음을 당신 품 안에 껴안으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어둠을 아래에서부터 끌어안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생명과 진리가 드러나고 전해지는 자리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성령의 거처로 성장해 나간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5일, 노
우재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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