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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노상추일기의 신유박해 기록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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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20 ㅣ No.1449

『노상추일기』의 신유박해 기록 검토

 

 

국문 초록

 

『노상추일기』는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에 대해서 매우 자세한 내용을 남겨주고 있어 주목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내포 지역에 살았던 천주교 신자들의 동향에만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노상추가 내포 지역의 홍성에서 무관으로서 직접 경험하였던 천주교와 관련된 또 다른 내용들에 대해서도 새롭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 거의 언급되지 못하였던 서울에서의 신유박해에 대한 기록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노상추일기』가 당시 서울과 내포의 두 지역이 서로 연결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때 서울과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준 움직임에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를 함께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천주교에 비판적이었던 노상추가 지역적으로는 영남을, 당파로는 남인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영남 남인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변화를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충청도에 대한 노상추의 인식이 반영되고 있음을 또한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상추일기』는 노상추라는 영남 남인이 이해하였던 한국 천주교회사 속의 초기 박해사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1. 머리말

 

필자가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를 만나게 된 것은 문숙자,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 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후기의 삶』(2009)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무관이었던 노상추(1746~1829)가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난 1801년 당시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내포 지역의 홍주(洪州)에서 영장(營將)을 역임하였으며, 『노상추일기』에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黃嗣永)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황사영에 대한 기록이 어떠하며, 『노상추일기』에 그 이외의 또 다른 천주교 관련 사료들이 얼마큼 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졌다. 즉시 『노상추일기』를 빌려서 천주교 관련 사료들을 확인하였는데, 많은 내용이 있음을 알게 되어 놀랐다.

 

이에 필자는 『노상추일기』의 천주교 관련 사료들을 분석해 보고 싶었으며, 다른 교회사 연구자들에게도 조선후기의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료임을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노상추일기』는 교회 측 자료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관찬 자료도 아닌 천주교를 박해했던 한 개인의 일기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노상추일기』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해서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를 더욱 확대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이후 1790년대 초반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박종악(朴宗岳)이 정조에게 보낸 편지인 『수기(隨記)』로 이어졌다. 따라서 천주교 사료에 대해 보다 시야를 넓히는 작업은 앞으로도 더욱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가운데 『노상추일기』를 통해서 홍주를 포함한 내포 지역의 천주교회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1)

 

그러나 신유박해가 일어난 1801년에 집중되고 있는 『노상추일기』의 천주교 관련 기록들은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경상도 선산 출신의 양반으로, 영남 남인이라는 당파를 가지면서 천주교에 비판적이었던 노상추의 인식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 영남 남인들의 천주교 인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2) 그뿐만 아니라 『노상추일기』에서 서술되고 있는 서울에서의 신유박해에 관한 정보들에 대한 분석이 거의 언급되지 못하였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서울의 천주교 상황을 통해서 노상추라는 영남 남인이 이해하였던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속의 박해사를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노상추가 내포라는 지역에서 경험하였던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도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았던 주제인 내포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의 존재 양태만을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이다. 여러 다른 내용까지를 알려주고 있는데, 이는 서울과 내포가 함께 맞물려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노상추일기』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검토된다면 영남 남인의 천주교 비판이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박해사와 관련해서 서울과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의 움직임에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등을 다양하게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영남 남인의 천주교 인식과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노상추일기』 가운데 「신유일기(辛酉日記)」를 중심으로 서울과 홍주의 신유박해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노상추일기』에 보이는 신유박해 기록들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2. 노상추의 천주교 인식

 

노상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 이후 일어난 1795년의 을묘박해 시기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찾아진다. 노상추는 그 몇 해 전에 만난 일이 있었던 족숙(族叔) 억(澺) 씨의 말을 빌려서 자신의 천주교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3)

 

노상추의 인척은 천주교 서적을 구해서 읽어 본 사람이었다. 그는 천주교를 사학이라고 하지 않고, 천주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천주학을 오랑캐의 말이라고 한다. 인륜의 대의를 모르는 조잡한 말이라고 설명하면서, 전생과 후생의 이치를 논의한 내용이 특히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는 천주교를 노자와 불교와도 비교하고 있다. 천주학이 노자나 불교의 허무함보다 더욱 심하여서 사군자(士君子)가 구해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간간이 이치에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 대강(大綱)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도 나라의 금령이 있고 나서 관부의 뜰에서 그 책을 불태워서 시비를 초래할 여지를 없애버린 일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 노상추는 훌륭한 견해라고 소개하면서 오래도록 감탄했다고 말한다.

 

노상추는 정조의 말을 빌려서 천주교에 대해서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4) 정조가 천주학이라는 용어 대신에 서학(西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역시 서학에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모두 포함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도교가 서양의 나라에 다녀온 듯하다고 말하였던 그가 천주교를 서양의 것이라고 하면서, 형성된 시기나, 사람들이 이 종교를 본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 사실을 덧붙여주고 있다. 이에 노상추는 천주학을 잡문(雜文)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재주 있는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유교 경전은 공부하지 않고, 제가(諸家)의 잡문만을 숭상하고 이것을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점도 언급한다. 그 결과 거기에 들어있는 사악하고 편벽된 글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책 사이에 섞이게 되었으며, 서로 전해 읽으면서 기이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상추는 천주교를 사설(邪說)로 파악하였다. 그는 당시 도의(道義)가 사라진 상황을 한탄하면서 정학(正學)인 유교가 천주교와 같은 사설 사이에서 황량하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 서학을 하는 자들이 흉악한 역적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그 시비가 이미 판가름이 났다는 것이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본 사람들이 모두 사학의 무리로 규정되었다고 하면서, 천주학 혹은 서학이 이에 사학(邪學)이 되었다는 것이다.6) 그는 “두 흉적은 호남의 윤(尹)과 경기의 권(權)에서 나왔지만”이라고 하여,7) 그것이 1791년에 유교적 조상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이 역적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천주교가 사학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노상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정학과 이단 및 사학에 대한 견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798년의 일이다. 그는 홍백순과 대화를 할 때,

 

홍백순(洪百順) 생(生)이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번 상소문에서 사학(邪學)에 대해 논한 말은 사도(邪道)와 정도(正道)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것이네. 저들이 말하는 천주학(天主學)은 묵씨(黑氏)의 학문과 같으니 이단(異端)임이 분명하다. 사도는 정도와 비슷하지만 정도는 아니다. 정인홍(鄭仁弘) · 송덕상(宋德相) · 홍계능(洪啓能) 등의 역적 무리들이 정도의 면모를 갖추고서 고관직을 차지했지만, 마침내 그 자신들이 역적으로서 주륙을 당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학이 바로 역적의 학문이라는 단서이네.”라고 하였다. 홍 생이 이에 크게 탄복하였다.8)

 

라고 하여, 정학과 정도, 이단과 사학 및 사도에 대해서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천주학을 논의할 때 정도와 사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있다. 천주교가 묵씨(墨氏)의 학문과 같은 이단이 분명하다는 것이다.9) 그리고 정도와 사도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천주학이 이단을 넘어서, 사도로, 다시 말해서 역적의 학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계기를 거쳐서 이단에서 사학으로 전환되었는가 하는 변화의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10)

 

노상추는 “하지만 지난날에 그런 책을 본 사람을 모두 사학의 무리로 규정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는 실로 흑과 백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형수를 몰래 데려다가 음란하게 간음했다는 무고가 있더라도 하루 아침에 판별하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참으로 우습고 한탄스럽다.”라고 하여,11) 서학 관련 서적을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를 사학의 무리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비판하였다. 흑과 백처럼 분명하게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서학에서의 천주교와, 서학에서의 과학기술을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노상추가 당시에 유행하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함께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방법이 어찌 사설을 하는 사람들을 죽여서 금지시키는 데에 있겠는가. 형정(刑政)은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데에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은 말단의 방법이니, 그 근본은 정학에 힘쓰는 것이다. 정학에 힘쓰는 방법은 인륜을 밝히는 것이고, 인륜을 밝히는 방법은 『소학(小學)』의 도리를 강구하여 밝히는 것이다. 사대부가 되어 『소학』을 읽고 외우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니, 주부자(朱夫子)가 ‘아마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 어찌 지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영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집안에서 도학(道學)을 배우고 익혔으면서도 무신(武臣)의 신분이 되었으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으며 실로 개탄스럽다.12)

 

그는 사설을 물리치는 방법이 어찌 사설을 하는 사람들을 죽여서 금지시키는 데에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다. 그는 형정은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데에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교화(敎化)보다는 말단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정학에 힘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정학에 힘쓰는 방법은 인륜을 밝히는 것이며, 인륜을 밝히는 방법은 『소학』의 도리를 강구하여 밝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주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영남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도학(道學)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의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까지 한다.

 

1801년 홍주의 영장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그의 천주교에 대한 발언은 더욱 구체적으로 나온다.

 

지금의 사학은 양주(楊朱)·묵적(墨翟)·노자(老子)·석가(釋迦)와는 다른데, 모든 대상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에서 양주 · 묵적 · 노자 · 석가보다도 더 평등하게 대한다. 참으로 크게 걱정스러운 것은 윤리와 기강을 모르고 형벌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빠져서 믿는 사람들은 남녀에 차이가 없으며 상놈이 대부분인데, 믿음을 법으로 삼고 있으니 말세의 폐단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 형벌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적(夷狄)도 꺼리는 것이고 금수(禽獸)도 겁내는 것인데, 사학에 미혹된 이 무리들은 형벌도 겁내지 않으며 죽임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천주학이 처음 전해진 뒤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처럼 빠졌다. 그러므로 정학(正學)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여기에서 극도에 이르렀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같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서 대사헌(大司憲)이 된다면 사학을 물리치고 정학을 세우는 것을 어찌 크게 걱정하겠는가. 우리 조정은 세종조 이후로 정학이 크게 밝혀져서 사림(士林)이 미혹되어 믿는 것에 대해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년(1504)·기묘년(1519)·을사년(1545)의 변고가 계속 이어졌지만, 사대부들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조대(宣祖代)에 나라를 중흥(中興)한 업적은 전적으로 정학의 창명(倡明)에 힘입은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저 천주의 학설이 사학으로 명명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백성이 빠져서 믿는다고 하니 어찌 만세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뼈에 사무치도록 통탄스럽기 그지없다.13)

 

그는 천주교를 사학이라고 바로 표현하면서 양주(楊朱) · 묵적(墨翟) · 노자(老子) · 석가(釋迦)와 다시 비교한다. 이때 그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천주교가 모든 대상을 가장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천주교에는 남녀의 차이도 없으며, 신자들도 상놈이 대부분이라고 하며, 이들이 믿음을 법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와 기강을 모르는 것도 문제이지만, 형벌과 죽음까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실을 더욱 우려하였다. 이적도, 금수도 형벌과 죽음을 겁내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노상추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러한 천주교에 빠져서 믿는다는 사실이 만세의 수치이며, 뼈에 사무칠 정도로 통탄스럽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그는 정학이 올바르게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극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에 그는 무너진 정학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조광조 같은 사람의 등장이나 선조대와 같은 정학의 번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정학인 유교의 새로운 부흥을 도모함으로써 사학인 천주교를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노상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영남 유학자들의 이해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게 해준다. 조선 후기 영남지역의 벽이단론(闢異端論)은 대체로 근본주의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것은 신유박해 이후의 현상으로, 그보다 이른 초기에는 온건한 포용주의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선보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강조하며 보다 풍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14) 조선 중기까지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등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대체로 불교나 무속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급진적이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말살하는 근본주의적 배타주의 방식이 아니라, 유교적 규범을 유지하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단의 사회적 존재를 규제하는 포용주의적 교화를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인이었던 경상도 성주 출신의 학가재 이주(李紬, 1564~1636)에게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단의 종류에 대해서 섬세한 구별을 시도했던 그가 이단을 철저히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치유해야 할 사상적·사회적 ‘병’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때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 출신인 조술도(趙述道, 1729~1803)의 천주교 인식이 크게 참고가 된다.15) 유교의 천주교에 대한 비판을 담은 『운교문답(雲敎問答)』을 저술한 그는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에는 정조의 교화와 형벌의 균형을 통한 포용적 정책에 따라 ‘그 책은 불사르고 그 학문만 금하되’, 사람은 상하지 않게 하여 효과를 거두었다고 칭찬하면서도, 온정적으로 지엽적인 사안만 따지고 근본적인 발본색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남겨두었다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를 통해서 엿볼 수 있듯이, 천주교 문제에 대한 초기 영남 지식인들의 반응은 교화의 대상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근본주의가 아니라, 먼저 교화의 주체가 반성하고 내실을 배양하겠다는 포용주의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영남 남인의 벽이단론은 모범적 실천을 통한 교화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교라는 사상적 권위에 기댄 정치적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로 바로 전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상적 공간에서 천주교를 용인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영남 남인의 이러한 입장은 유교적 조상제사를 거부한 1791년의 진산 사건 이후에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조술도의 경우처럼 천주교를 교화시켜야 할 이단이 아니라, 철저하게 제거되어야 할 사도(邪道)로 재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학과 이단과 사학을 구별하는 그의 이해가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었다. 이단의 경우에는 교화의 대상이라는 포용주의가 논의될 수가 있었지만, 사도의 경우에는 형정의 대상이라는 배타주의만이 선택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신유박해 이후의 시기인 1833년에 나온 류건휴의 『이학집변』으로 이어졌는데, 그가 사학에 대해서 더욱 강경한 근본주의적 배타주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조대인 1801년에 있은 정순왕후의 사학 금지령에서나, 헌종대인 1839년에 나온 『척사윤음(斥邪綸音)』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영남 남인들이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에 대해서도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서양의 그것들이 뛰어나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신기함에 취해 오히려 서학에 빠져들지 모른다는 경계심 때문에 그것조차도 수용하지 말자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6) 이에 이들은 정학인 유교 이외의 학문, 특히 천주교를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영남 남인의 천주교 인식에 대한 변화를 고려할 때 노상추가 영남 남인으로서 천주교를 이단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사학으로까지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용주의적 입장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3. 서울에서의 신유박해 정보 기록

 

노상추는 일기를 통해서 서울에서의 한국 천주교회사 흐름을 서술하고 있다. 우선 한국 천주교회의 성립과 관련되는 주요 인물인 이벽(李檗)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벽의 아우 이격(李格)은 사학(邪學)을 하는 사람의 동기(同氣)인데도 아직까지 숙위(宿衛)의 반열에 있으므로, 직소(直所)의 군사들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합니다.…이격은 이벽의 동기로서 진실로 깨끗이 씻고 벗어나 스스로 달라진 자취가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 엄숙한 대궐에 어떻게 이런 무리가 거리낌 없이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臺諫)이 상소한 대로 시행하소서.17)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집의 류경(柳耕)이 상소하여 ‘향리로 쫓아낸 죄인 이격(李格)을 원지(遠地)로 유배하고, 도배한 죄인 오석충에게 다시 엄한 추국을 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격은 스스로 사학을 했지만 드러난 자취가 없어서 향리로 쫓아내는 법을 시행하였습니다.”18)

 

이벽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동생 이격(李格)도 드러난 자취가 없지만, 역시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 이에 노상추는 이격이 숙위(宿衛)의 반열에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향리로 쫓겨나는 과정을 서술해 주고 있다.

 

노상추는 1791년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에 대해서 간단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남인(南人) 중에서 윤(尹)과 권(權) 두 흉적이 이미 처형되었는데도… 그리고 두 흉적은 호남의 윤(尹)과 경기의 권(權)에서 나왔지만, 남인의 명색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19)

 

유교적 조상제사 거부와 관련하여 윤지충(尹持忠)과 권일신(權日身)의 죽음을 언급하였다. 두 사람의 당파가 남인임을 말하고 있다. 이들을 흉적이라고 하면서, 남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밝힌다.

 

이때 노상추는 천주교와 관련해서 남인들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남인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상추의 관심은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에 대한 내용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이승훈에 대한 기록은 1792년 3월 15일 일기에서 찾아진다.

 

서얼 권위(權瑋)라는 사람이 평택 현령 이승훈(李承薰)을 무함하여 사학의 거두이며 사문난적이므로 문묘에 배알하지 않다고 하였다. 임금께서 특별히 엄한 교지를 내려서 안핵어사 김희채(金熙采)를 보내서 조사하게 했는데, 정말 무고였다. 권위를 잡아다가 심문하니, 그의 공초에 진사 김중순(金重淳)이 사주하여 무고하게 고소했다고 하였다. 김중순은 김문순과 같은 집안사람이므로 형조의 당상관들이 잘못 처리했다고 한다. 이승훈은 남인이고, 김중순은 서인이다.

 

이승훈과 관련된 내용은 3월 24일 자 일기에서도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때 노상추는 당파와 신분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평택의 서얼이 서울의 서인과 함께 모의하여, 남인인 평택 현령 이승훈을 천주교 신자라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당쟁의 산물임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승훈의 동생은 형의 무고를 밝혀달라고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노상추 역시 같은 남인인 이승훈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의 무고함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노상추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에 일어난 1795년 을묘박해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근래에 또다시 저 사학(邪學)에 들어간 무리로 양근(楊根)의 중서(中庶) □□ 세 사람이 있었는데, 또 임금께서 은밀하게 포도청에 하교하여 하룻밤 사이에 체포하여 장(杖)을 때려죽였다고 한다. 대사간(大司諫) 권유(權裕)가 상소를 올려서 우의정 대감을 지목하여 배척하면서 “은밀히 포도청에 사주하여 사학 무리 세 사람을 장을 쳐서 죽여서 입을 막았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아뢰기를, “이미 연석에서 아뢴 뒤에 포도대장에게 분부했지만, 내부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대사간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괴이할 것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20)

 

경기도 양근 출신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천주교 신자인 지황, 윤유일, 최인길 세 사람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정조가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처형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을묘박해 직후에 쓰인 『노상추일기』에 이가환이 등장하고 있다.

 

아침에 승지 이지영(李趾永)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들으니, 전임 승지 박장설(朴長卨)이 상소를 올려서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을 정동준(鄭東俊)의 혈당(血黨)이라고 하면서 배척하고,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사학(邪學)의 우두머리로 논척했는데, 그 상소에서 스스로 “신은 이현도(李顯道)처럼 본래 타향에서 벼슬살이하는 신하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금께서 전교하시기를, “저들은 유구국(琉球國)이나 일본국(日本國)에서 귀화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니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서유방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를 내가 잘 알고 있다. 이가환은 근래에 연석(筵席)에서 말하면서 그가 남보다 수십 배나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어떤 무리가 지휘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셨다고 한다.21)

 

들으니, 반촌(泮村)의 유생(儒生)들이 상소를 올려서 판서 이가환(李家煥) 대감을 사학(邪學) 소굴의 주인으로 논척했다고 한다. 대체로 그 일이 사실인가 거짓인가 논란이 되고 있는 와중에 남인(南人) 중에서 윤(尹)과 권(權) 두 흉적이 이미 처형되었는데도 뒷말이 아직도 있으니, 이는 크게 한심한 일이다.22)

 

박장설의 상소와 반촌의 유생들의 상소를 전해주고 있다. 남인 공서파(攻西波)인 박장설 등이 남인 신서파(信西派)인 이가환을 천주교 신자라고 비난한 내용이다. 이가환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노상추는 이가환이 남보다 수십 배나 공부를 한 사람이라고 하며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견해라고 비판한 정조의 말을 들려주고 있다. 또한 이가환이 사학 소굴의 주인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인가 거짓인가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뒷말이 있다는 것이 한심하다고까지 말한다. 역시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이가환에 대한 노상추의 우호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다음 날인 7월 26일 자 일기에 의하면,

 

이날 판서 이가환(李家煥)이 충주(忠州) 목사로 좌천되었고, 승지 정약용(丁若鏞)은 금정(金井) 찰방으로 좌천되었으며, 평택 수령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에 정배(定配)되었다.…오늘날에는 서학을 하는 자들이 흉악한 역적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시비가 이미 판가름이 났다. 하지만 지난날에 그런 책을 본 사람을 모두 사학(邪學)의 무리로 규정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는 실로 흑과 백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다.

 

라고 하여, 이가환과 정약용의 좌천과, 이승훈의 유배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정약용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노상추는 여전히 천주교 관련 서적을 본 사람을 모두 사학의 무리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역시 우습고 한탄스럽다고 주장하였다.

 

노상추의 이러한 서술은 신유박해 이후 영남 남인들이 보여준 태도와는 다른 이해라고 할 수가 있다.23) 당시 영남 남인들은 기호 남인들과 천주교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생각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이들은 공서파라고 할 수 있는 기호 남인들의 천주교 비판보다도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노론들이 신유박해를 일으켜 기호 남인들을 대거 축출시키자, 영남 남인들은 그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방도를 찾는 가운데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집권하고 있는 노론으로부터 영남 남인들을 보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1801년에 이르러 홍주의 영장으로 부임한 노상추는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유박해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롭게 전개된 상황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부임한 이후 조선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1801년 1월 10일에 이르러 수렴청정하고 있던 정순왕후가 하교를 통해서 천주교가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엄금시켰기 때문이다.24) 이제 집권 노론 세력이 천주교에 대해서 교화를 통한 종식이 아니라, 형벌을 통한 박멸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그동안 노상추가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근기 남인 천주교 신자들의 동향이 궁금해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오늘 들으니 사학이 서울에서 다시 일어나서 죄수가 좌포도청, 우포도청, 형조에 가득 찼다고 한다. 또 천안군의 사학 우두머리 이존창을 포도청에서 잡아갔다고 한다.25)

 

그가 서울로부터 전해 들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천주교가 서울에서 다시 일어나서 감옥에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식에 이어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내포 지역의 여사울 출신인 이존창(李存昌)의 체포도 함께 전하고 있다. 이러한 소식들은 그에게 서울의 상황과 홍주를 비롯한 내포 지역의 상황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서 움직여가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다시 서울의 천주교 동향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서 2월 13일부터 그가 파직되어 그만두는 7월 말까지 관련된 내용들을 지속적으로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노상추가 서울에서의 신유박해 상황을 파악하는 데 참고한 자료란 그가 직접 들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관문(關文)이나 비변사의 초기(草記)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홍주목에 도착한 조보(朝報)를 통해서였다. 조보란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되어 지방 관아를 포함한 각급 관청과 관료들에게 배포된 자료들이다. 지방 관아로의 배송은 5일분을 묶어서 역로를 통해 보내졌다고 한다.26) 따라서 노상추는 서울에서 매일 발행되는 조보를 접하면서, 당시 권력층의 정국 동향이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리 등에 대한 정보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노상추일기』의 신유박해 기록에서 참고된 조보 기록에 대해서는 새로운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조보에 『노상추일기』에 서술되지 못한 어떤 천주교 관련 내용이 있으며, 그러한 내용들이 다른 관변 자료와는 어떠한 차이가 나는 것인가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신유박해 정보를 기술하면서 그가 가장 주목한 내용은 채제공(蔡濟恭)과 남인 신서파에 대한 부분이다.

 

초9일 조보.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 고(故) 영부사(領府事) 채제공(蔡濟恭)에게 관작을 추탈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사헌부에서 새로 올린 계사에 “이가환·이승훈·정약용이 사학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이가환은 악한 마음을 품고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이승훈은 구입한 요사스러운 책을 그 아버지에게 전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 법을 수호했으며, 정약용은 상소를 올려 실상을 자백한 뒤에 몰래 요사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 도리어 전보다 심해졌습니다. 전임 판서 이가환, 전임 현감 이승훈, 전임 승지 정약용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먼저 엄하게 국문하여 실상을 알아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학을 느슨하게 다스린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에게 현고(現告)를 받고서 모두 책임을 물어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소서.”라고 하였다.27)

 

노상추는 채제공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다. 채제공의 관직을 추탈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그가 채제공을 언급한 이유는 “옥천군 수령과 서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그가 채제공 재상 역시 사학을 옹호했기 때문에 사학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이 말의 뜻을 들어보니 이 무리들이 채 재상과 당론이 다르므로 사학을 가지고 공격하여 모욕할 의도였다. 그 마음이 음험하므로 오랫동안 대화할 수가 없었다.”라고 한28) 내용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노론 벽파가 채제공을 천주교와 남인 신서파를 옹호한 인물로 지목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서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채제공을 오해하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천주교를 명분으로 채제공을 공격하고 모욕할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상추는 채제공이 그러한 인물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그와 천주교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영남 남인들의 입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신유박해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하와일록(河窩日錄)』이 말해 주고 있듯이, 당시 집권 노론 세력들이 그들의 세도(勢道)를 위해서 채제공을 그와 같이 역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29) 『노상추일기』는 빈번하게 채제공이 서술되고 있을 정도로 그와 채제공은 오래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채제공이 노상추가 조부인 노계정(盧啓禎)의 사적을 적은 ‘죽월헌 유적’의 서문을 부탁하자 흔쾌히 허락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30) 이에 노상추는 일기에서 정조가 채제공에게 내린 금령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이 순조대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과, 이후에도 계속해서 관직 추탈에 대한 시도가 끊이지 않았음을 기록하는 등 그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았다.31)

 

노상추는 채제공에 이어서 바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계속해서 서술하고 있다. 역시 남인 신서파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순조대 사학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가장 먼저 탄핵된 인물이었다. 당시 노론 세력은 정약종-정약용-이가환-채제공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통해서 실상을 알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사학의 본거지라고 비난을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조사가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최창현, 최필공, 권철남, 정약종, 임대인, 조동섬, 홍낙민, 김백순, 오석충, 홍치영, 이학규, 유이환, 이준신, 홍교만, 이존창 등에 대한 조사를 함께 알려주고 있다.32) 이때 노상추는 신유박해 이전과 달리 이들에 대한 조사에 대해서 별다른 주장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조사 과정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 이전과 달리 그들이 무고하다든지 하는 자기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그 역시 이제는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노상추는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같은 날 이가환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은 내용을 일기에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존창의 경우만 공주에서 참수될 것임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1801년 4월 1일 자 일기를 통해서 정약전이 신지도로, 정약용과 김백순이 장기현으로, 오석충이 임자도로, 이기양이 단천부에 유배된 사실과 함께, 양사(兩司)에서 이들에 대한 조사가 새롭게 실시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33)

 

그런데 노상추가 그의 일기를 통해서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남인 신서파에 대한 동향만이 아니라, 황사영과 주문모 신부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남인 신서파에 대한 공격이 신유박해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3월 12일에 자수한 주문모 신부의 등장은 신유박해의 확대를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상추는 주문모 신부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새롭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노상추의 서울에서의 신유박해 기록 가운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801년 3월 6일 자 일기에 의하면 포도청으로부터 주문모 신부와 황사영을 체포하는 것에 대한 관문이 순영에 도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전에 서울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죄인 주문모(周文謨)는 바로 서양 사람으로서 머리를 기르고 역관에게 우리말을 배운 다음에 몰래 우리나라에 와서 도당(徒黨)과 결탁하여 사학을 가르치면서 안동방동(安東坊洞)에 거처했는데, 그 일당들이 3천 금의 큰 집을 사서 그를 높여서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사영(黃嗣永)은 서울 서부(西部)의 성(城) 밖에 사는 사족(士族)으로 16세에 성균관 생원에 오른 자인데, 올해 나이 27세로 망명(亡命)하였다고 한다.…그들로 하여금 면과 리마다 샅샅이 조사하여 망명한 죄인을 찾아내도록 하였다. 만약 다른 진(鎭)에서 또한 이러한 규정을 쓴다면 바다를 건넜으면 어쩔 수 없어도 우리 경내에 있다면 어찌 붙잡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34)

 

주문모 신부를 서양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사영의 경우 바다를 건너 망명할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노상추가 이제 천주교를 국내 정치세력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외국과의 관련 문제까지 일으키는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새로운 전교를 전하고 있는 1801년의 4월 1일 자 일기를 통해서 그러한 사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다름 아니라 천주교 신자의 섬 유배와 관련된 것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을 섬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면 앞으로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섬으로 보내지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장차 연해의 끝없는 근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방의 섬은 뜬소문이 나오는 곳인데, 천주교 신자들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어내는 근거 없는 말이 틀림없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어 민심이 안정될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섬 사이에는 다른 나라의 상선이 표류하여 정박할 때가 많은데, 천주교 신자들이 반드시 외국과 서로 통할 염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을 섬으로 유배보내는 것은 장차 바깥에서 강한 적을 오히려 모두 섬에 모이게 만든다고 이해하였다. 이에 이들을 따로 흩어 놓아서 한 고을에 각각 한 명씩 유배시키게 하라는 조치를 내리고 있다

 

이에 노상추는 4월 1일 자 일기에서는 은언군 이인(李䄄)의 처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와 왕래하여 서로 만났기 때문에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역시 주문모 신부를 외국인으로, 흉추(凶醜)라고 부르고 있다. 이인과 그의 아들에 대한 사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5월 7일 자 일기에서는 대왕대비가 이인과 그의 아들을 다른 집으로 옮겨 안치하고 천극(栫棘)의 형율을 추가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같은 날의 일기부터 김렴, 김건순, 김이백, 이희영, 이상영 등에 대한 조사를, 4월 5일 자 일기에서는 강이천과 김려, 김선에 대한 조사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고서 「이희영 결안(結案)」과 「김백순 결안」의 내용과 함께, 이들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희영은 황사영과 주문모 신부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2월에 남인 신서파의 인물들과 함께 체포된 김상용의 자손인 김백순을 조상제사를 거부하였으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했다고 한다.

 

4월 6일 자 일기에는 강이천이 의금부에서 사망했음을, 4월 8일 자 일기에서는 이술범에 대한 조사를, 4월 28일 자 일기에서는 강이문, 김종억, 김정신, 최우문, 김선, 이정, 김종억 등이 조사를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주문모 신부에 대한 정부의 처분 결정을 알려주고 있다. “주문모를 효시하기 위해 어영청으로 내보냈는데, 어영청에서 주문모는 서울과 지방의 군병과 방민(坊民)을 모래밭에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효시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겠다는 내용의 초기가 올렸다.”라고 하여, 주문모 신부에 대한 효수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날에 「김이백 결안」과 「김건순 결안」을 소개하면서, 서소문 밖에서의 참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죄인 김이백, 나이 28세, 결안(結案)〉 “…흉악한 짓을 저지른 전말은, 저는 김건순의 서족(庶族)으로서 강이천(姜彛天)을 소개받았는데, 그는 평생의 기량이 오직 허황된 말을 하는 것이어서 도처에 전파하는 말이 모두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바닷속에 어떤 섬이 있고 섬에는 도주(島主)가 있는데 병마(兵馬)가 힘이 세고 건장하다고 하며, 등불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강이천을 가리켰습니다. 또 김건순이 주문모에게 가서 만나본 뒤에 사학(邪學)에 들어가서 강이천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다 사람인 곽남옹(郭南翁)을 데리고 다니면서 은밀하고 요사스러운 말을 많이 했는데,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고 현혹시켰습니다. 죄상은 연전에 조사한 문서에서 이미 드러났고, 정황은 이번 추국 진술에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그 죄악을 논한다면 죽이는 것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요사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지만(遲晩)하였습니다. 당일에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부대시(不待時)로 참수하소서.

 

〈죄인 김건순, 나이 26세, 결안〉 “…흉악한 짓을 저지른 전말은, 정사년(1797) 8월에 정광수(鄭光受)라는 자가 여주로 저를 찾아와서, 저에게 서울의 어떤 사인(士人)이 저와 만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과거를 보러 갈 때, 정광수 등이 양근(楊根)의 나루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함께 배를 탔습니다. 상경한 뒤에 그가 또다시 저를 찾아와서 함께 한 사람을 방문할 것을 요청했는데, 지난번에 말했던 어떤 사인은 바로 주문모였습니다. 함께 예를 행하고 이어서 사학의 원류를 물었습니다. 그 뒤에는 홍익만(洪翼萬)이라는 자가 와서 주문모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그 뒤에 몇 해 동안 가서 만난 것이 두 차례입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 주문모에서 가서 만나 두세 번 사학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미혹되어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김이백이 강이천에게 전파하고 강이천이 시골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시켰습니다. 바다 사람이라고 하는 여자도(呂字島)의 곽남옹 등은 수많은 요사스럽고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저를 구실 삼아 했으니, 제가 지은 죄는 죽고도 남을 죄입니다. 요사스러운 글과 요사스러운 말을 친구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지만하였습니다. 죄는 부대시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하소서.35)

 

김이백과 김건순은 모두 주문모 신부와 연결된 인물이며, 「결안」의 내용에서도 이들의 처형 이유를 바다와 섬과 관련된 내용과 연결시켜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노론 집권 세력이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함께 천주교 신자들이 외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자수 이후 체포되어 그 밖의 인물들에 대한 처리를 함께 전해주고 있다. 몇 사람만 석방되었을 뿐 대부분은 유배형을 받았다. 5월 15일 자 일기에서는 주문모와 관련되는 중요한 인물인 내포 출신의 강완숙(姜完淑)이 포도청에서 죽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7월 22일 자 일기에서는 제주도에서 위리안치형을 받고 있던 홍낙임이 사사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볼 때 노상추가 서울에서 전개된 신유박해뿐만 아니라,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의 흐름에 대해서 중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물론 그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는 신유박해 후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의 기록이 신유박해와 함께 천주교 관련 기록이 더 이상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일기에서 서술한 내용은 마치 황사영 백서 사건이 한국 천주교회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켜주는가를 예고해 주는 듯하다. 비록 황사영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주문모 신부를 통해서 천주교와 외국과의 관련 여부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함께 진행된 신유박해의 확산 과정에 대한 그의 서술이 매우 상세하다는 사실은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박해 당시 이승훈 등 남인 신서파의 처리 과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련 인물들에 대한 심문 과정이나 처벌을 다룬 내용의 서술에서 그러하다. 이들을 매우 엄중하게, 신속하게 처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면 『노상추일기』에서 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량으로 이와 같은 서술로 나오게 되었는가 대해서 조금 더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상추일기』에서 주문모 신부와 관련해서 처형된 대표적 인물들로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김건순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례적으로 결안을 소개하고 있는 김건순이나, 김백순이나 김이백 등은 모두 인척 관계이며, 이희영도 그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때 주목되는 사실은 이들의 당파를 모두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윤지충이나 권일신이나, 이승훈 등이 남인이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기존의 연구에서 잘 지적되고 있듯이, 노상추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기록할 때 당파를 꼭 서술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도 그러하다.36) 물론 김백순과 함께 처형된 이희영이 중인이라는 사실만을 기록하면서 천주교 신자에 중인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희영을 제외하고서 다른 중인 신분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서술은 더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는 그가 서울에서 일어난 신유박해를 양반 사이에 일어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때 노상추는 김건순이 안동 김씨 가문의 노론이라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고서 신유박해의 확산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건순과 천주교 및 당파의 문제에 관해서는 최근의 연구가 도움을 준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가 집권하면서 상당수 천주교 신자들이었던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신유사옥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조대 입지가 강화되었던 남인들은 정치적으로 제거될 수밖에 없었다. 김건순은 주문모 신부의 심문 과정에서 언급되며 체포되어 천주교 신자인지, 세례를 받았는지, 강이천이 꾀한 바 있는 사건을 통해 반역을 꾀했는지 집중 심문을 받았다. 김건순은 철저히 천주교인인 것을 부정하였고, 세례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주문모 신부만 만난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배교로 볼 수 있고, 천주교회에서도 김건순을 순교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김건순은 안동 김문 명문 세족 출신 양반 사대부이지만 참수형을 당하였다. 김건순은 천주교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샤를르 달레나 황사영 등 당대인들은 그를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김건순에 대한 엄한 처분은 두 가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안동 김문에 대한 정순왕후의 견제이며, 또 하나는 신유사옥이 남인을 처벌하는 정치적 숙청이라는 시각에 대한 반증으로 노론 김건순에 대한 엄한 처벌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천주교 측에서는 노론도 천주교 신자라는 또 다른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에 당대에는 김건순을 순교자로 인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37)

 

노론 출신의 김건순에 대하여 엄한 처분이 내려진 것은 신유박해가 남인 세력만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숙청이라는 시각에 대한 반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보기만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이해란 집권 노론의 입장에서 김건순의 죽음을 살핀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영남 남인이라는 노상추의 시각에서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남인 신서파를 옹호한 인물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가 노론 출신의 김건순 등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남인 신서파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노상추는 노론이 천주교 신자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제거하려고 한 남인 신서파의 움직임에 못지않게, 자신들의 세력 속에 속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더 큰 위험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름 아니라 김건순과 관련된 사람들은 정부 측이 가장 우려한 것처럼 바다나 섬을 통해서 외국 세력과 결탁하려는 가능성까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남인들의 유교적 조상제사에 대한 거부가 이들 천주교 신자를 역적의 무리로 규정한 것을 고려할 때, 김건순을 포함한 노론 신서파의 움직임이란 그보다 오히려 더 심각하고 무거운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남 남인으로서 홍주의 영장이라는 현직에 있던 노상추가 서울에서의 신유박해를 정리하면서 노론 출신의 김건순과 천주교의 관련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서술한 것은 남인 신서파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노론 세력에 대한 그의 간접적인 비판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4. 내포에서의 신유박해 활동 기록

 

노상추는 천주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무관으로서 천주교 신자들이 크게 활동한 내포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게 하고 직접 심문한 인물이었다. 1800년 1월 홍주에 도착한 이래 1801년 7월에 교체될 때까지 홍주의 영장 겸 토포사(討捕使)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노상추에 의하면 홍주 지역은 천주교 신자가 많은 곳이었다. 정순왕후의 하교에도 서울과 경기지역만이 아니라, 내포 지역이 나올 정도였다. 이곳에서 천주교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볼 때 홍주가 사학에 가장 심하게 물든 지역으로 지목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38) 그 가운데에서도 그는 “홍주의 북쪽 다섯 개 면(面)인 현내(縣內) · 합남(合南) · 합북(合北) · 신남(新南) · 신북(新北)은 덕산(德山)과 면천(沔川)으로 구불구불 넘어가고 홍주의 운천면(雲川面) 하나는 해미(海美)로 넘어가서 땅의 경계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심이 간교하고 흉악하기로 이보다 심한 곳이 없다.”라고 하여,39) 홍주의 월경지가 그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그는 정순왕후의 사학 금지령이 내린 이후부터는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할 정도로 천주교 신자의 색출에 전념했다고 말한다.40)

 

7개월에 불과한 짧은 재임 기간이지만, 노상추의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가 있다. 첫 번째 시기에는 정순왕후의 하교에서 제시된 대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통해서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고자 했다.

 

부임 뒤에 금령에 대한 일을 스스로 헤아려 보니 오가작통(五家作統)만 한 것이 없었다. 통수(統首)는 오가(五家)의 기찰장(譏察將)이 되고, 한 면(面)의 기찰장은 모든 통(統)을 도맡아서 거행한다. 그러므로 기찰하여 염탐할 조목 10조를 쭉 적어서 답인(踏印)하고, 각 면의 도기찰장(都譏察將)을 맡은 면임(面任)에게 나눠주고서 면임의 벽에 붙여두고 거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1. 면기찰(面譏察)은 오가의 통수를 총괄하여 맡는다. 2. 통수는 사학(邪學)에 빠진 무리를 염탐하고 와서 고한다. 3. 도적 무리를 기찰하고 염탐한다.41)

 

오가작통법과 관련된 사학 금지령이란 천주교 신자의 색출을 위해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천주교를 염탐하는 방법으로는 오가작통법보다 요긴한 것이 없다고 평가한다.42) 통수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천주교 신자를 염탐하고 보고하는 일이었다는 점이 잘 알려주고 있다. 염탐과 보고가 있으면, 영장은 장교나 나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체포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은 ‘적(賊)’으로도 표현되고 있어 주목된다.43) 따라서 『노상추일기』는 홍주 지역에서 오가작통법을 통해서 지방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염탐과 체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시기는 황사영이 홍주 지역에 숨어 있었는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신자들을 체포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4월 4일에 이르면 황사영의 체포를 위해서 움직였던 것이다.

 

어제 포도청(捕盜廳) 장교와 나졸 및 어영청의 별군관(別軍官) 이(李)□□도 도착하였다. 이□□이 알현을 청하기에 불러서 보았는데, 바로 수군절도사 이엽(李燁)의 서자였다. 들으니, 황사영(黃嗣永)을 추적하여 붙잡기 위해 연해(沿海)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날 청양(靑陽)으로 나갔다. 김중근(金重斤)을 용천면(用川面)의 기찰장(譏察將)과 함께 바다의 여러 섬으로 들여보내서 샅샅이 조사하고 염탐하도록 분부하였다.44)

 

황사영을 추적하기 위하여 연해로 내려온 포도청과 어영청의 장교 및 나졸들과 함께 협력하여 바다의 여러 섬을 샅샅이 조사하고 염탐하였다. 그것은 4월 8일에 오면 노상추는 자신의 관할 지역 전체에 대한 조사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초 5일에 부지런한 장교를 뽑아서 27개 면(面)을 샅샅이 조사하고, 면, 리(里), 호(戶)마다 5일 간격으로 엄히 신칙하고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전임 집사 박연수(朴延壽)를 금동(金洞)과 홍안송(洪安松) 두 면으로 내보냈고, 전임 집사 김호재(金浩載)를 상전(上田)과 흥구향(興口香) 두 면으로 내보냈다. 전임 순영 천총(巡營千摠) 이상복(李相福)을 얼방(乻方) · 화성(化城) · 유곡(酉谷) 세 면으로 내보냈고, 전임 집사 강주영(姜周榮)을 오사(烏史) · 성지(城枝) 두 면으로 내보냈으며, 전임 파총(把摠) 강성복(姜成福)을 용천(用川) 한 면에 내보냈다. 전임 순영 천총 김경로(金慶老)를 번천(番川) · 궁경(躬耕) 두 면으로 내보냈고, 전임 집사 김태봉(金太奉)을 고남(高南) · 고북(高北) 두 면으로 내보냈으며, 토포(討捕) 군관 최경로(崔慶老)를 운천(雲川) · 치사(雉寺) 두 면에 내보냈다. 토포 군관 김일복(金日福)을 홍천(洪天) · 대감개(大甘介) 두 면으로 내보냈고, 주군관(州軍官) 장제성(張齊聲)을 신남면(新南面)으로 내보냈으며, 주군관 이만번(李萬番)을 신북면(新北面)으로 내보냈고, 주군관 박종복(朴宗福)을 현내면(縣內面)으로 내보냈다. 주군관 최준민(崔俊民)을 합남면(合南面)으로 내보냈고, 주군관 김창욱(金昌郁)을 합북면(合北面)으로 내보냈으며, 전임 병방(兵房) 장교 이언오(李彦五)를 송지(松枝) · 평리(坪里) 두 면으로 내보냈다. 주남(州南)과 주북(州北)은 가까운 면이어서 일단 그대로 두었다.

 

또, 포교(捕校) 김중근(金重斤)과 홍주목의 좌병방(左兵房) 이우번(李羽番)을 용천면 소속의 섬에 들여보내서 16개 섬을 조사하도록 했는데, 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저두도(猪頭島)가 으뜸으로 1백□□호百□□戶이며 모두 4리다. 소도(蔬島)는 모두 5리로 1백□□호다. 외연도(外烟島)는 □□호, 고대도(古代島)는 □□호, 장고도(長古島)는 □□호, 녹도(鹿島)는 □□호, 어청도(於靑島)는 □□호, 호도(狐島)는 □□호, 오도(梧島)는 □□호, 삽시도(揷時島)는 □□호, 황도(黃島)는 □호, 눌도(訥島)는 □호, 추도(抽島)는 □호, 조도(鳥島)는 □호, 파소도(把所島)는 □호이며, 횡도(橫島)는 호(戶)가 없다고 한다.

 

또 아홉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포교 최효항(崔孝恒)을 보령(保寧) · 남포(藍浦) · 홍산(鴻山) 세 고을에 내보냈고, 포교 이경운(李景雲)을 임천(林川) · 한산(韓山) 두 고을에 내보냈으며, 전임 집사 최석주(崔石柱)를 비인(庇仁) · 서천(舒川) 두 고을에 내보냈고, 병방 장교 권덕행(權德行)을 청양(靑陽) · 정산(定山) 두 고을에 내보냈다. 그들로 하여금 면과 리마다 샅샅이 조사하여 망명한 죄인을 찾아내도록 하였다. 만약 다른 진(鎭)에서 또한 이러한 규정을 쓴다면 바다를 건넜으면 어쩔 수 없어도 우리 경내에 있다면 어찌 붙잡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이는 오가작통법을 통한 천주교 신자의 색출 과정과도 크게 달랐다. 노상추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활용하여 홍주 관할의 27개 면 전체에 대한 조사를 합동으로, 동시에 실시하였던 것이다. 특히 관할 16개 섬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였다. 그는 황사영이 바다를 건넜다면 어쩔 수가 없지만, 홍주 지역에 있다면 체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사영은 홍주 지역에서 체포할 수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내포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내포 지방에서 체포된 신자는 노상추의 말을 따른다면 60여 명에 해당된다고 한다.45) 현재 『노상추일기』에 나오는 천주교 신자는 모두 83명으로, 그 가운데 63명이 새로운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46) 지역별로도 구분되고 있다. 오늘날의 홍주와 당진, 덕산, 청양 지역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홍말불이나 김덕상은 노상추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로 볼 수가 없다.47) 이운경과 이원경의 경우도 동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48) 유학(幼學) 출신인 김성경의 경우에도 한때 신자라고 했지만, 당시 그가 체포에 협력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대로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49) 이방자나 김만기의 경우도 신자임이 확인되지 않는다. 배대득의 경우에는 배관겸이 맞다면50) 면천이 아니라 당진에 속하는 천주교 신자라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노상추일기』에서 언급되는 내포의 인물로서 이존창과 강완숙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노상추는 홍주를 비롯한 내포 지역에서 활동한 천주교 신자의 신분에 대해서 서울과 달리 이해하고 있다. 양반 신자는 두 사람만 나온다. 감옥에서 강완숙의 존재를 이야기한 이방혁을 양반으로,51) 그리고 이름을 숨겨서 자세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결성에서 체포된 사람으로, 성은 홍가라는 인물을 역시 양반이라고 한다.52) 그 때문에 그는 내포 지역의 신자들 대부분을 2월 13일 자 일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 상인(常人)으로 파악하고 있다.53) 물론 역촌의 사람들[驛人]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는 하다.54) 또한 속노(贖奴)까지 찾아진다.55) 이들의 경우 남녀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내포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과 달리 양반이 아니라, 천민이 포함되지만 평민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56)

 

이와 함께 노상추는 이들의 신앙 형태에 대해서도 관련 내용들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일선은 진술하기를, “저의 아우 감선(甘先)이 먼저 이 학문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감선의 가족이 우리와 한집에서 모여 살았기 때문에 문적이 과연 그들이 가져왔던 물건 속에 있었다가 남겨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위 문적이라는 것은 언문으로 쓴 책자와 발기(件記), 명주(命珠) 등의 물건이다.57)

 

최말재가 진술하기를, “저는 15년 전에 같은 마을의 김복성(金卜成) · 김복수(金卜守)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글을 몰랐기 때문에 입으로 외워서 학습하다가 불과 3개월 만에 그만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네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구슬 고리는 과연 무슨 물건인가?”라고 하자, 최말재가 진술하기를, “이 구슬은 김복수가 준 것인데, 김복수가 말하기를 ‘이 구슬을 지니고 자주 입으로 외는 것이 공부다.’라고 했으므로 그때 받았습니다. 과연 집에 남겨두긴 했으나 김복수와 김복성 등이 상경하고 나서 저는 그대로 그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58)

 

그는 내포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한글로 된 교리서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59) 특히 묵주에 대한 내용을 자주 전해주고 있다. 최말재의 경우 글을 몰라서 입으로 외워서 학습했으며, 묵주기도 역시 그러한 기도라는 것이다.60)

 

노상추는 홍주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 보통의 백성과는 다른, 즉 ‘평범한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여 강조하고 있다.61)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앙을 법으로 삼는 이들이 형벌이나 죽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상추가 홍주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직접 만나고 심문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62) 이와 함께 천주교 신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등 인정하고 승복하지 않는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천주교 신자들이 입으로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마음속으로는 신앙을 유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더 검토할 여지가 있다.63)

 

더욱이 홍주 지역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반발까지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른바 목패(木牌) 사건이다.

 

통인(通引) 박시손(朴時孫)이 작은 목패(木牌) 하나를 가지고 와서 바치면서 말하기를, “동문(東門) 문지방 밖에 꽂혀 있어서 뽑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패의 표면에 어떤 말이 쓰여 있었는데, 사학 무리들이 쓴 흉악한 글이었다. 그러므로 감옥(監獄)과 향소(鄕所)의 관리 및 하인에게 엄하게 신칙하고, 남관리(南官吏)와 북관리(北官吏)의 민인(民人)으로 하여금 모두 4명씩 매일 밤 돌아가면서 수직하도록 분부하였다.64)

 

어제 목패(木牌)에서 운운한 것은 “천주학은 처음에 작은 나라에서 출발했지만 차차 큰 나라가 될 것이니, 적발한다고 해서 어찌 천주학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일로 정해진다면 모두에게 죽음이 베풀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사당(邪黨)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으며 결국 다 체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으니, 밤낮으로 심란할 뿐이다.65)

 

제 생각에는 그 무리는 목패(木牌)를 만들어 흉한 글을 써서 동쪽 성문에 꽂아두고 공갈했는데 그 내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감옥이 사당(邪黨)으로 가득 차서 잔당을 체포하지 못하니, 외부에서 공갈하는 것입니다.66)

 

동문의 문지방에 글씨가 적힌 목패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쓴 것으로, 그 내용은 천주학을 한 나라가 점점 큰 나라가 될 터인데,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박해를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이 적혀 있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세력이 더욱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 신자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에서는 『노상추일기』에서 홍주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에서 순교한 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67) 『사학징의』를 통해서 8명만이 유배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노상추의 천주교에 대한 포용주의적 인식이 작용하였는지는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오가작통법의 시행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오가작통(五家作統) 문서를 비로소 다 거둬들였는데, 백성들은 연례적인 일로 여기고 있으니 괴롭다. 백성을 위해서 효과가 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도리어 힘들게 만들었으니 염려스럽다.68)

 

조보를 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달 초5일 조보. 입시(入侍)한 우승지 최헌중(崔獻重)이 아뢰기를, “사학(邪學)을 염탐하는 방법으로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보다 요긴한 것이 없으니, 처벌을 갑절로 하는 형률을 쓰고 그 얼굴에 글자를 새겨서 그 무리를 구별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체에 가하는 형벌은 지금 시행할 수 없다. 그 나머지 조건은 묘당(廟堂)에 내려 보내서 나에게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기필코 사학(邪學)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효과가 있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69)

 

오가작통법의 시행이 백성들에게 효과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계속해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을 가중시키고, 얼굴에 글자를 새겨서 무리를 구별하자는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기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측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형벌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노상추의 충청도에 대한 인식과도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에 대해서 빈번하게 언급하기 시작한 1795년에 있은 노상추의 말이다. 그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도학을 정학으로 규정한 다음, 형벌로서는 사학인 천주교를 다스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자로 전해주는 도를 정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왕(文王) · 무왕(武王) · 주공(周公) · 공자(孔子) · 맹자(孟子)에서 주자(朱子)로 전해지는 도(道)를 정학(正學)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유종(儒宗)으로 삼았으며, 오현(五賢)의 여파(餘派)에 대해서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라의 풍속을 보면 유학을 숭상하는 도리에서는 영남이 최고이며,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에서는 사족(士族)들이 벼슬살이하는 것만 중하게 알고 유림(儒林)에 대해서는 몰라서 부질없이 명예만 추구하고 실제로 도학(道學)을 닦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다른 도에서 서원을 세우고 선현을 배향하는 것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함이니, 오상(五常)을 위해서 행한다는 것은 실상보다 과장된 말인 듯하다.70)

 

이때 그는 유교를 숭상하는 도리에서는 영남이 최고이며, 호서와 호남에서는 사족들이 벼슬살이하는 것만 중하게 알고, 부질없이 명예만 추구하고 실제로 도학을 닦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이들이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그는 충청도의 유교가 보여주는 문제점을 언급하였다. 즉 도학을 제대로 닦아야 천주교를 물리칠 수가 있다고 보았다. 홍주 영장에서 물러난 1801년 8월 5일 자 일기에서도 그는 호서와 영남의 인심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홍주의 영장으로 있는 1801년 4월 16일 자 일기에서도 계속된다.

 

대체로 충청도라는 한 도는 본래 백제의 봉토(封土)였는데, 예로부터 인심이 굳세지 못하며 들뜨고 허황하였다. 이에 선비를 숭상함에 근본을 굳게 하는 뜻이 없고, 과거에 합격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 이외에는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뜻이 없으며, 권세를 믿고 자신을 높이며 남을 쉽게 업신여긴다. 습속이 여전히 이와 같으니 사학을 막을 수가 없다.

 

그가 충청도의 인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수양하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권세를 믿고 자신을 믿고 영화롭게 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사학인 천주교를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청도의 습속이 천주교의 확산을 낳는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5월 5일 자 일기71)에서도, 5월 20일 자 일기72)에서도 계속해서 찾아진다.

 

이러한 가운데 노상추는 천주교 신자의 처리 문제와 관련해서 파직을 당하게 된다. 6월 8일에 덕산의 천주교 신자였던 조성득이 감옥에서 도망을 친 것이었다.73) 이후 그는 사람들에게 독촉하여 조성득을 잡아들이고자 노력하였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 충청도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성득(曺成得) 놈이 도망간 지 대략 이틀이 지났으니, 빨리 잡아들이는 것에 대해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각 진(鎭), 읍(邑)에 이르기까지 이목(耳目)의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해서 정령(政令)을 펴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사람의 사지에 비유하면 풍(風)을 맞아 불구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병방(兵房) 장교 권덕행(權德行)은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자 해도 얻을 수 없어서 잠시 내버려두고 미룬 지가 오래되었다.

 

충청도의 습속으로 말하자면, 이 충청도 한 도는 실로 국가에 쓸모없고 대수로울 것이 없는 지역이다. 명색이 선비라고 하는 자들이 향교와 서원을 함부로 차지하고서 교생(校生)과 원생(院生)을 한없이 모으고 있다. 또 향교의 보군(保軍)에 명목 없는 양정(良丁)을 채우는데 그 수 또한 한정이 없으니, 이런 모든 것들이 토색질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이곳은 한 고을에서 부릴 만한 부류들이 모두 고된 역(役)을 피하는 소굴이 되었다. 그중에서 조금 여유가 있는 부류는 다 세력이 있는 집안에 붙어버렸다. 그래서 읍과 진영에서 사역하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대부분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이니, 이 때문에 진영과 읍이 모양새를 이룰 수가 없다. 도 전체의 습성이어서 어찌할 수 없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매우 한탄스럽다.74)

 

그는 지금 조선의 상황은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각 진과 읍에 이르기까지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해서 정령을 펴지 못하는 불구의 상태라는 것이다. 충청도의 분위기도 역시 그러하다고 보았다. 홍주에서 부릴만한 사람들은 모두 역을 피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은 다 세력이 있는 집안에 붙어버렸기 때문에 진영에서 사역하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로 채워지는 바람에 진영의 모양새를 제대로 갖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진영의 일을 맡을 적합한 사람도 없고, 이들에 대한 처우도 그러하며, 일도 많다고 한다. 홍주의 진영에서도 장교 가운데 현재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경우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을 선택해도 얻을 수 없는 형편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75) 더욱이 그는 진영의 군관들이 천주교 신자의 체포만이 아니라, 도적을 잡아들이는 일에도 매달려야 해서 일이 많다는 것이다.76) 조성득이 도주한 까닭도 여러 장교가 홍주의 도적을 잡으러 나가는 바람에 여유가 없다 보니 그 사이에 일이 지체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그는 충청도의 이러한 상황이 천주교의 세력 확대를 막아야 하는 그의 공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노상추는 부임 초기부터 이러한 현상에 대한 개선을 순영과 감영에 요구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내가 정월에 순영과 병영의 두 영에 치진(馳進)하는 날에 토포 장교들이 형편없고 군뢰(軍牢)들은 액수도 채우지 못하므로 공무를 거행할 방도가 전혀 없다는 폐단을 말씀드렸다. 또 폐단을 구할 방도를 말씀드리기를, “진영에 소속된 장교나 나졸들은 한 해 동안 명령을 받고 나가서 부지런히 일해도 논의하여 상을 줄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명령을 받고 나가서 일하는 장교와 나졸들을 모두 도적이라 하면서, 위에서는 권장하는 일이 없고 아래에서는 모두 원망하는 마음만 있으니 이것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순영에서 유고곡(留庫穀) 5백~6백 섬을 떼어서 환곡을 함께 나눠주고, 그 모곡을 진교청(鎭校廳)에 주어서 사명을 받고 나가는 장교와 나졸들에게 옷감이라도 나눠주어서 장려하는 방도를 만든 뒤에야 토포 장교와 나졸들에게 잘 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 영에서 대답하기를 “변통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씀드리기를 “그렇다면 영장인 토포사(討捕使) 역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서는 진영으로 돌아왔다. 지금 두 영에서 잘하라는 요구가 갈수록 심해지지만 그 마음은 공정하지 않으니, 참으로 매우 우습다. 하지만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흔들리겠는가.77)

 

그는 1월에 토포 장교가 형편없고, 군뢰의 액수도 채우지 못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공무를 거행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이에 그 대책으로 이들에게 포상을 주는 한편, 환곡을 나누어주고, 옷감이라도 주면서 일을 장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순영과 병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노상추 역시 어찌할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노상추는 순영이나 병영을 비롯해서 진영의 장교 등과 계속적인 대립을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른 곳에 있을 때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던 병마절도사와의 갈등이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이다.78) 마침내 5월 초에 이르면 그의 파직을 도모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79) 6월에 이르러 조성득이 도주하고 체포하지 못하게 되자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파직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파직을 낳은 포폄 문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오후에 나에 대한 병영(兵營)의 포폄 문서가 이내 도착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질박하고 진실하지만, 정사(政事)에 대해 꾸짖고 비난하는 말이 많다.’라고 하여 중(中)을 맞았다. 그래서 좌기를 마치고 관아로 돌아왔다. 대체로 ‘정사에 대해 꾸짖고 비난하였다’[誚謗]는 두 글자는 의도를 갖고 한 포폄이다. 진(鎭)에 부임한 지 6개월 동안 다른 정령(政令)을 내리지 않고 한마음으로 사학(邪學)을 다스리고 잡아들인 자가 거의 60여 명이다. 3월 초3일에 사학의 무리가 익명의 글을 목패에 써서 내아의 동쪽 담 밖에 꽂아두었는데, 사학 무리들의 심한 원망과 비방이 이미 극도에 달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정사에 대해 꾸짖고 비난하였다’라고 나쁘게 평가했으니 병영의 처분은 사학 무리들을 위해 설욕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고 한탄스러웠다.80)

 

병마절도사가 당초에 ‘하(下)’를 매겨서 순찰사에게 보내자 순찰사가 크게 놀라서 ‘중’으로 고쳐서 돌려보냈던 것이다.81) 이때 파직에 대한 이유로 노상추가 부임 이래로 “정사에 대하여 꾸짖고 비난하는 말이 많았다.”는 말은 들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에 일어났던 사정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자신에 의하여 박해를 받던 천주교 신자들의 자신에 대한 설욕이 병마절도사를 통해서 마침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병영에서는 노상추에 대한 파직을 합리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이번에는 천주교 신자가 도주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동안 천주교 신자를 함부로 잡아들였다는 잘못이 지적되기에 이르렀다.82) 4개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가 체포했던 내포 지역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석방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그가 60여 명을 체포하였다고 했는데, 6월 18일 자 일기에 의하면 “들으니 사학(邪學) 죄수 스물여덟 놈을 풀어주고, 영문(營門)으로 올려 보낸 자가 네 놈이고, 갇혀 있는 자가 16명이라 한다.”83)

 

이러한 조치들은 천주교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정학인 유교를 일으키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는 이를 “6개월 동안 사학을 애써 다스린 노고가 하루아침에 도리어 삼태기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고 말았”84)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7월 25일 자 일기에서 후임 영장이 결정되자, 그는 “나는 여기서 끝나는구나. 나는 여기서 끝나는구나.”라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는 영남 남인으로서 출세를 지향했던 노상추는 홍주 영장으로서 천주교 신자의 체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노론 집권 세력에 타협하려고 했지만, 그의 뜻대로 진행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이다.85) 8월 1일에 그는 영장직을 인수인계하고 경상도로 떠났다. 그리고 이후 그의 일기에서는 천주교와 관련된 기록들이 더 이상 나타나고 있지 않게 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노상추일기』에 보이는 신유박해 기록들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다. 거기에는 영남 남인인 노상추의 천주교와 충청도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볼 때 앞으로 조선후기 척사론에 대한 다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최근에 간행된 동국역사문화연구소 편, 『조선시대 서학 관련 자료집성 및 번역―해제』 6권(2020)과 관련해서이다. 이 자료집에는 천주교에 대한 호교론적 서적과 척사론적 서적이 함께 묶여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척사론에 대해서만 또 다른 자료집이 다시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더욱이 노대환의 척사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이래,86) 이러한 자료집의 발간과 함께 몇몇 척사론에 대해서도 새롭게 검토되었다는 사실도 크게 주목되는 것이다.87) 이 역시 척사론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심이 요구됨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이러한 연구의 흐름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를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여겨진다. 호교론과 척사론이라는 두 방향에서 구체적으로 접근할 때 조선후기의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더욱 풍부한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정해은 외 역, 『국역 노상추일기』 6권, 2018 ; 『국역 노상추일기』, 8권, 2019.

방상근, 「18세기말 내포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시론」,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2000.

김수태, 「조선후기 내포지역 천주교의 확산과 이존창」, 『지방사와 지방문화』 7-1, 2004.

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노론 척사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46, 2008.

김수태, 「이존창의 신앙과 배교 문제」, 『김성태 신부 고희 기념 논총』, 2011.

노대환, 「19세기 중반 이호면의 『원도고』와 척사론」, 『교회사연구』 36, 2011.

유영옥, 「『이재난고』를 통해 본 ‘조보’의 유통과 함의」, 『동양한문학연구』 33, 2011.

차기진,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 『내포 천주교의 역사와 문화』, 2012.

방상근, 「『수기』와 『노상추일기』를 통해 본 18세기 말 충청도 교회」,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2014.

차기진,「조선후기 홍주지역의 천주교사 연구」,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2014.

김순미, 「대야 류건휴의 『이학집변』에 나타난 천주학 비판에 관한 연구」, 『교회사연구』 45, 2014.

김선희, 「19세기 영남 남인의 서학비판과 지식권력 : 류건휴의 『이학집변』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51, 2015.

박종천, 「조선후기 영남 유학자들의 벽이단론 - 온건한 포용주의에 대한 재평가」, 『철학연구』 138, 2016.

박종천, 「조선후기 유교적 벽이단론의 스펙트럼」, 『종교연구』, 76-3, 2016.

원재연, 「정조대 처사 홍정하의 천주교리서 비판과 천주교 인식 - 『성세추요증의』를 중심으로,『동국사학』 6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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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헌, 「19세기 후반 당파정치와 당파기록물의 이중성 - 승정원일기(초)와 조보(초)의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105, 2019.

정해은, 「조선후기 무관 노상추의 중앙 관직생활과 그 의미 - 오위장과 금군장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73, 2019,

임혜련, 「정조말~순조초 김건순의 행보와 신유사옥」, 『한국학논총』 51, 2019.

 

……………………………………………………………………………………

 

1) 방상근, 「18세기말 내포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시론」,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2000 ; 「『수기』와 『노상추일기』를 통해 본 18세기 말 충청도 교회」,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2014 ; 차기진,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 『내포 천주교의 역사와 문화』, 2012 ; 「조선후기 홍주지역의 천주교사 연구」,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을 또한 들 수 있다.

 

2) 조선 후기 영남 남인의 천주교 인식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안동 출신의 류건휴(柳健休, 1768~1834), 『이학집변(異學集辨)』(1833)에 쏠리고 있다. 그러나 류건휴의 천주교 인식은 노상추의 활동보다 늦은 시기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순미, 「대야 류건휴의 『이학집변』에 나타난 천주학 비판에 관한 연구」, 『교회사연구』 45, 2014 ; 김선희, 「19세기 영남 남인의 서학비판과 지식권력 : 류건휴의 『이학집변』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51, 2015 ; 박종천, 「조선후기 영남 유학자들의 벽이단론―온건한 포용주의에 대한 재평가」, 『철학연구』 138, 2016 등이 참고가 된다.

노상추가 집중적으로 서술한 신유박해에 대해서는 1806년 안동 하회의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이 1796년부터 1802년까지 7년에 걸쳐 쓴 『하와일록(河窩日錄)』(1806)을 통해서도 엿볼 수가 있다(박종천, 앞의 논문, 120~121쪽). 이 경우 그 내용은 노상추의 그것과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하고, 풍부하지도 않다. 그러나 영남 남인으로서 노상추처럼 신유박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기록으로서는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10일 자 일기. 이하의 내용에서 번역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정해은 외역, 『국역 노상추일기』 6권(2018)과 8권(2019)을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4)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6일 자 일기.

5)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5일 자 일기.

6)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6일 자 일기.

7)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5일 자 일기.

8) 『노상추일기』, 1798년 8월 16일 자 일기.

 

9) 노상추는 천주교 신자의 모습이 불교를 공부하는 거사의 태도와 비슷하다고 보기도 하였다(『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8일 자 일기).

 

10) 정학과 이단과 사학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박종천, 「조선후기 유교적 벽이단론의 스펙트럼」, 『종교연구』 76-3, 2016이 참고가 된다.

 

11)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6일 자 일기.

12) 『노상추일기』, 175년 7월 26일 자 일기.

13)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3일 자 일기.

14) 박종천, 「조선후기 영남 유학자들의 벽이단론―온건한 포용주의에 대한 재평가」, 133~134쪽.

15) 박종천, 위의 논문, 119쪽·130~133쪽.

16) 김선희, 앞의 논문, 172~173쪽.

17)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17일 자 일기.

18)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1일 자 일기.

19)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5일 자 일기.

20)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10일 자 일기.

21)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10일 자 일기.

22)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5일 자 일기.

23) 김순미, 앞의 논문, 192쪽.

24) 『순조실록』 2, 순조 1년.

25)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3일 자 일기.

 

26) 조보에 대해서는 유영옥, 「『이재난고』를 통해 본 ‘조보’의 유통과 함의」, 『동양한문학연구』 33, 2011 ; 김덕헌, 「19세기 후반 당파정치와 당파기록물의 이중성 - 승정원일기(초)와 조보(초)의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105, 2019를 참고할 것.

 

27)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22일 자 일기.

28) 『노상추일기』, 1801년 8월 3일 자 일기.

29) 『하와일록』, 1801년의 3월 18일 자 일기 및 5월 30일 자 일기.

 

30) 정해은, 「조선후기 무관 노상추의 중앙 관직생활과 그 의미 - 오위장과 금군장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73, 2019, 208~209쪽.

 

31)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22일 자 일기 및 4월 8일 자 일기.

 

32) 이승훈에 대해서는 동생 이익운이 1801년 5월 9일 자 일기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승훈이 사형을 당한 뒤에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당파를 두둔하고, 나라를 원망한다는 소문이 낭자하므로, 삭직하고, 문초하여 죄목을 정하라.

 

33)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6일 자 일기에 “형조에서 사학(邪學) 죄인으로 32세의 최필제(崔必濟), 30세의 정인혁(鄭仁爀), 25세의 운혜(雲惠), 23세의 정철상(丁哲詳), 32세의 이합규(李鴿逵), 54세의 복혜(福惠)를 당일에 서소문에서 참수할 것을 아뢰었다고 한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34)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8일 자 일기.

35)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28일 자 일기.

36) 정해은, 앞의 논문, 211~212쪽.

37) 임혜련, 「정조말~순조초 김건순의 행보와 신유사옥」, 『한국학논총』 51, 2019, 313~314쪽

38)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17일 자 일기.

39)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2일 자 일기

40)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11일 자 일기.

41) 『노상추일기』, 1801년 1월 18일 자 일기.

42)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6일 자 일기 및 2월 22일 자 일기.

43)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26일 자 일기.

44)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4일 자 일기.

45) 『노상추일기』, 6월 16일 자 일기.

46) 방상근, 「18세기 말 내포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시론」, 276~279쪽.

47)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12일 자 일기.

48)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6일 자 일기 및 3월 7일 자 일기.

49)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12일 자 일기.

50) 차기진,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 116쪽.

51) 『노상추일기』, 1801년 5월 15일 자 일기.

52)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3일 자 일기.

 

53)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6일 자 일기에서는 김악지를 ‘상놈’이라고 한다. 4월 9일 자 일기에서는 궁경면 신촌의 류공이금을 ‘민’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합남면과 합북면의 세 천주교 신자가 ‘양민’이라고 말한다.

 

54)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6일 자 일기에서는 “흥구향면 월내동(月乃洞)의 최말재(崔唜才)와 최동금(崔同金)은 역인(驛人)이고, 기부리(其夫里)의 최흥성(崔興成)도 역인이며”라고 한다.

 

55)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21일 자 일기.

56) 김수태, 「조선후기 내포지역 천주교의 확산과 이존창」, 『지방사와 지방문화』 7-1, 2004를 참고할 것.

57)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23일 자 일기.

58)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8일 자 일기.

59)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27일 자 일기와 4월 10일 자 일기.

60)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23일 자 일기 및 2월 27일 자 일기에서도 묵주를 언급하고 있다.

61)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19일 자 일기.

62) 『노상추일기』, 1801년 4월 7일 자 일기.

 

63) 이존창의 배교와 관련해서 이른바 ‘혁면(革面)’, ‘혁심(革心)’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태, 「이존창의 신앙과 배교 문제」, 『김성태 신부 고희 기념 논총』, 2011이 참고가 된다.

 

64)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3일 자 일기.

65)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4일 자 일기.

66) 『노상추일기』, 1801년 3월 21일 자 일기.

67) 차기진, 「조선후기 홍주지역의 천주교사 연구」, 251쪽.

68) 『노상추일기』, 1801년 1월 26일 자 일기.

69) 『노상추일기』, 1801년 2월 26일 자 일기.

70) 『노상추일기』, 1795년 7월 25일 자 일기

 

71) “그런데도 홍주의 아전과 백성들이 목상만 설치하고 예에 맞는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은 충청도의 인사(人士)들이 그저 벼슬만 알고 덕의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풍속이 이미 이와 같으니 다른 일이야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72) “대체로 홍주(洪州)의 풍속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어서 백성이 일정한 뜻이 없다. 그래서 관령(官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참으로 걱정스럽다.”

 

73)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8일 자 일기.

74)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9일 자 일기.

75)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9일 자 일기.

76)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7일 자 일기.

77)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6일 자 일기.

 

78) “병마절도사가 나를 음해하는 말은 일찍이 동료 관리로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노상추일기』, 1801년 6월 16일 자 일기).

 

79)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7일 자 일기.

80)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16일 자 일기.

81)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21일 자 일기.

82) 『노상추일기』, 1801년 7월 12일 자 일기.

83)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18일 자 일기.

84) 『노상추일기』. 1801년 6월 11일 자 일기.

 

85) 그러나 그는 2년 뒤에 어영총 천총으로 다시 재기한다. 그의 경력에 대해서는 정해은, 앞의 논문, p. 199를 참고.

 

86) 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노론 척사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46, 2008 ; 「19세기 중반 이호면의 『원도고』와 척사론」, 『교회사연구』 36, 2011.

 

87) 원재연, 「정조대 처사 홍정하의 천주교리서 비판과 천주교 인식 - 『성세추요증의』를 중심으로」, 『동국사학』 64, 2018 ; 이명제,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 성호가문의 서학관 고찰 - 『벽이연원록』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앞의 책 ; 송효후, 「김평묵의 『벽사변증기의』에 나타난 척사사상에 대하여」, 앞의 책 등을 들 수가 있다.

 

[교회사 연구 제58집, 202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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