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성령칠은7: 지식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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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52

[성령칠은 제7강의] 지식(知識, knowledge)의 은혜 (9월 8일 화요일 오전)

 

 

성령께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성향을 주는 선물이다.

 

창세 2:15-17/3:1-13:

 

(창2: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창2: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창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3:1)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창3: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창3:3)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창3:4)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창3:5)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창3: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창3:8)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3: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창3: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3:11)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창3:12)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창3:13)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두려움의 은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관상하는 어떤 성향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크시고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가! 하느님의 편재하심!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이런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우리는 경탄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자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만물 앞에서 하느님의 놀라움에 경외심 갖는 초대를 받았다. 효경의 은혜를 받음으로 두려움의 은혜를 보완하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보완하는 성향입니다. 하느님의 편재하심은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곳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서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와 사랑의 계약을 맺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사랑의 통교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이에 예수님과 함께 통교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의 사랑의 공동체와 사랑의 친교를 이루어서 복되신 성삼의 친교에 참여하라고 초대받은 것입니다. 이런 인류사의 사랑의 친교를 통해서 복되신 성삼의 친교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아빠’라고 부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이 초대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약에 근거를 둔 것이다. 영원토록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가 있다. 이 지식의 선물은 성령께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성향을 주는 선물이다.

 

이 지식의 은총을 살펴보자. 우리는 창세기 아담 설화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내용을 읽었다.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 선과 악의 지식을 이해할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지식을 우리 스스로 이해할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다. 우리는 이 양심을 통해서 빛을 받았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빛은 양심을 통해서 받는다. 여러분이 복잡한 기계를 받았다고 합시다. 거기에는 설명서가 있지요. 이 설명서를 주의 깊이 읽어서 사용하면 오랫동안 자유롭게 잘 사용할 수 있지만,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다 알아’ 하면서 마구 사용하다 보면 그 기계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없어진다. 선과 악을 아는 선물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호소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유에 따라서 우리 자유가 신장되기를 바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참된 자유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열매는 따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는 말씀에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탄의 계략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왕입니다. 그는 거짓말만 합니다. 진리를 항상 왜곡시킵니다. 인간에게 “왜 하느님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네 자신 스스로 왕이 되어라”고 꼬인다. 네 자신의 말을 들어라. 그러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선과 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길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갇혀 버린다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사탄의 계략은 항상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항상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려고 한다. 그런 유혹에 빠진 결과는 즉시 반대로 나타납니다. “네가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속삭인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결과로 우리는 책임성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선악을 구별하려면 우리 양심에 귀를 기우리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교육할 지 압니다. 사탄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왜 열매를 따먹었느냐?” 내가 아니라. 아담이. 아담은 내가 아니고 악마가 라고 책임을 떠넘깁니다. 결국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분간하기가 모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심리학의 영향으로 죄를 짓고도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운명 때문이라고 하고 콤플렉스나 구조 문제나 스트레스나 개인 심리적인 병때문이라고 하며 죄책감을 없애 버린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어떻게 인격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창조될 때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실재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언제 ‘예’할지 언제 ‘아니오’ 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성령의 특별한 선물인 지식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은혜이고. “예와 아니오”를 아는 은혜이고, 좋고 나쁨을 아는 은혜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은혜이고, 어둠에 속하는지 빛에 속하는지를 아는 은혜입니다. 요한 성인은 어둠과 빛의 관계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서 안에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의 비전을 바꾸어 주시기”를 바라는 열망이 나타납니다.

 

에제키엘 36장에서 새로운 영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에제36: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 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28)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금요일마다 성무일도에서 아름다운 시편을 낭독한다. 시편 51편 1-4 / 10-13을 보자.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새로운 정신을 주시기를 빌며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시51:1)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시51:2)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말끔히 씻어 주소서. (시51:3)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시51: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시51:10)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소서. (시51:11)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 내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소서. (시51:12)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시51:13)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빗나갔던 자들이 당신께로 되돌아 오리이다.

 

첫 구절에서는 “제가 무언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지만 완전히 잘못했다고 고백하지는 않는다. 제가 사랑의 계약에 완전히 응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하느님의 영이 있습니다. 나의 의지를 새롭게 창조하실 하느님의 영이 계십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단호하게 하는 꿋꿋한 뜻(영)을 내려 주십시오. 당신께 ‘예’할 수 있는 너그러운 영을 항상 간직하게 해주십시오. 하느님께 ‘예’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영’을 주십시오. 계속해서 진리를 추구하겠습니다. 또 보완하는 은혜는 사탄과 싸우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관상하는 은혜입니다.

 

마태 4:1-11 :

 

(마태4: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11)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공관복음 : 마르 1:11-13/ 루가 4:1-13)

 

이 유혹 사화를 주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반복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려 갈 때 침묵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 때마다 자주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성체성사 앞에서 머문 다음에 저에게 오는 유혹은 분심과 잡념의 유혹이다. 우리는 항상 유혹을 받는다. 기도를 재빨리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렇게 유혹을 받는다면 기도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서 광야에 나가셨는데 “유혹을 받으러” 나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스승의 제자로서 유혹을 받을 때에 놀라지 맙시다. 하느님은 유혹을 통해서 우리를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혹이 많은 세상에 사는 교구 사제에게 그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는데 ‘세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을 어떻게 쫓아내는 것인지”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악을 식별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악을 쫓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악한 세력을 쫓아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과 사랑의 힘을 청하는 기도로서만 가능합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어려운 묘기를 보이려고 할 때에 몇 번이고 그것을 연습하듯이 우리도 반복해서 유혹을 물리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유혹을 물리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 사랑의 능력을 청하고 구해서 그 하느님의 힘으로만이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유혹은 예수님이 받은 유혹과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유혹이 분명하지만 어떤 때는 모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복잡성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악에 이끌려 가 버립니다. 우리 안에 악의 뿌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악에 자꾸 이끌리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이런 상태에서 기도하고 싶지 않아서 “기도해 보아야 소용없구나”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확하게 그 유혹을 통해서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성별하고 굳세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이것이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면제받기를 바랍니까?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게 이 유혹을 이기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필요한 훈련입니다. 유혹 앞에서 기도하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탄은 기도하는 우리를 유혹을 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유혹한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편안하게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습니다. 편안함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사탄의 제안 앞에서 예수님은 늘 어떻게 할지를 아셨습니다. 성서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하느님의 뜻으로 악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까지 이어지는 전 삶을 아버지께 “예”하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5:37)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나 머리 속에 ‘예’나 ‘아니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지속적인 기도만이 우리를 순화시킵니다. 실재로 적용할 수 있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첫째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잘못된 것을 고백합니다. 어떤 때는 그 잘못이 무엇인지 그 뿌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이것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니오라고 물리쳐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겸손되이 “무언가 잘못되었고 제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한다. 성령은 뉘우치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 무언가 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은총을 줄 것이다. 나는 이런 잘못된 것을 원치 않지만 스스로 고치거나 보상할 수 없음을 압니다. 주님께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체험이 된다.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을 느낀다. 성베드로는 물 속에 가라앉을 때에 외쳤고 예수님이 그 순간 구세주이심을 체험한다. 우리가 잘못할 때에 “주님 잘못했습니다 당신을 신뢰합니다 주님만이 저를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자. 이것이 첫 단계이다.

 

2. 두 번째 단계는 빛을 찾고 빛에 매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작은 빗줄기를 보자 마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은 빛이라도 큰 빛인 양 받아 들어야 한다. 그 빛에 이끌려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은 우리가 점점 빛에 이끌리도록 은총을 주신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자유롭게 한다. 세상으로부터는 올 수 없는 빛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왜냐하면 악마는 항상 빛을 가장하고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없는 죄는 없다. 죄의 밑바탕에는 거짓이 있고 핑계가 있다. 악마는 항상 진실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하느님의 빛과 성령의 빛에 이끌리도록 기도하자. 아이들이나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감각이 있다.

 

3. 세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이 복음의 빛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복음을 읽으면 말씀이 하느님의 빛을 가져다줍니다. 성서를 가까지 할수록 예수님의 빛나는 정신을 그대로 받게 된다. 우리는 죄의 기회를 피하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 죄가 멀리 있을 때에는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되는데 죄가 가까이 있으면 약해진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초대하신다.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데 깨어 있으라는 것은 죄의 기회를 피하고 죄를 의식하라는 것이다. 묵시록에 보면 악마가 어떻게 하는 지 볼 수 잇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나온다. 죄를 피하려고 싸우려고 할 때에 자신의 약함을 느끼고 여러 번 죄에 빠지기도 하고 같은 죄를 반복하여 범하므로 실망하기도 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16:3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죄를 이기는 겸손한 방법은 “예수님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께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지식의 은총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의 힘”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할수록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성탄 축일입니다. 마리아는 원죄의 면제를 받았습니다. 마리아의 양심은 깨끗했지만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서 오는 구원의 결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 이 은총을 주시라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모든 죄를 극복해 내실 것입니다. 성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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