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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독일 교회의 쟁점: 생명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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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6

[세계 교회는 지금] 독일 교회의 쟁점, '생명의 선물'

 

 

생명의 선물(Donum Vitae)’이란 한 평신도 단체가 요즘 독일 가톨릭 교회를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현재 격렬하게 벌어지는 이 논쟁을 이해하려면 ‘곤란에 빠진 임신여성을 위한 상담과 도움’을 제공해 왔던 독일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먼저 그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독일교회는 지난 30여 년 동안 사회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빠진 임신여성을 위한 상담과 도움 서비스를 운영해 왔다. 가톨릭 신자 여성이 임신한 뒤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면, 이 여성들은 매우 간단한 절차를 거쳐,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상담과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현재도 주교회의의 공식 승인을 얻은 두 단체가 이 일을 전담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교회에도 잘 알려진 카리타스(Caritas)이고, 다른 하나는 에스카에프(SkF: Sozialdienst katholischer Frau: 가톨릭 여성의 사회봉사)라는 단체다. SkF는 우리에게는 이름이 조금 낯설지만, 독일에서는 전국적인 조직과 자원을 지닌 가톨릭 교회의 공식단체로서, 이 밖에도 활발한 여성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곤란에 빠진 임신여성들이 원할 경우, 체계적인 상담과 도움을 제공해 주고, 엄격한 조건에 따라서 상담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문제는 이 ‘증명서’였다. 낙태가 연방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독일에서, 이 ‘증명서’를 지니면 어떠한 처벌도 없이 합법적으로 낙태가 가능하다. 그래서 교황청과 독일교회 내 보수파는 이 ‘증명서’를 ‘낙태증’이라 부르며, 교회기관이 이런 ‘살인증’을 공식적으로 발급하는 일을 조건없이 즉각 중지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곤란에 빠진 임신여성들에게 상담을 제공하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낙태를 가능하게 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하는 일에선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이에 대해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이들 단체의 상담과 도움은 철저하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낙태를 방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고, 대학 등에서 체계적으로 육성된 유급 전문가들이,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상담 ‘증명서’를 발급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진 소수의 여성들을 위한 도움도 반론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낙태와 관련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현 교황 임기 동안 철저하게 강조되어 왔다. 교황청과 오랜 기간 대화한 뒤, 독일 주교회의는 드디어 작년 교황청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교회기관에서 이런 ‘증명서’를 발급하지 못하도록 공식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있자, 곧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카리타스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증명서’ 발급업무를 중지했고, 현재 SkF도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SkF의 일부 평신도 회원들이 ‘증명서’를 계속해서 발급할 수 있는 단체를 교회 밖에 독립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단체의 이름이 바로 ‘생명의 선물’이다. ‘생명의 선물’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된 세속단체이지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곤란한 처지에 빠진 신자 임신부를 위한 상담과 지원업무 등을 계속해 오고 있고, 물론 ‘증명서’도 발급했다. 그리고 독일에선 ‘생명의 선물’이 발급한 ‘증명서’가 있을 경우, 지금도 아무런 처벌 없이 낙태를 할 수 있다.

 

독일교회에서 ‘생명의 선물’은 지금 매우 큰 화두다. 가톨릭 교회에서 독립한 세속단체라고는 하지만, ‘생명의 선물’은 가톨릭의 조직으로 널리 인식된다. 가톨릭계 신문들은 연일 이 단체와 관련된 기사를 싣고, 독자투고란에는 이 단체에 대한 찬반토론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 ‘생명의 선물’ 관련 기사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신문들의 진보-보수 성향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한 신문에선 ‘증명서’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반대편 신문에선 이 ‘증명서’의 반복음적 성향을 역설한다. 한마디로, ‘생명의 선물’은 지금 가톨릭 교회의 뜨거운 감자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쟁이 단기간에 수그러들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생명의 선물’ 현상은 몇몇 평신도 집단의 반란으로 치부되기 어려운,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독일교회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껴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우선, ‘생명의 선물’은 가톨릭 교회 내에 뿌리깊이 퍼져있다. 대부분의 주교들이 이 단체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고, 적잖은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이 단체와 음으로 양으로 관련하고 협조하고 있다. 몇몇 성직자는 아예 공개적으로 이들을 지지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림부르크 교구의 캄프하우스 주교를 들 수 있다. 캄프하우스 주교는 아직도 자신의 교구에서 SkF가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해주고 있을 정도다.

 

독일의 거의 모든 교구에 사무실을 낼 정도로 전국적인 규모를 갖춘 ‘생명의 선물’은 현재 가톨릭 교회의 지원금을 받지 않는다. 종교세에 기대지 않고 조직을 꾸려나가기란 독일의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회원들의 회비와 국가보조금만으로 이 단체를 꾸려가고 있다. 이는 ‘생명의 선물’이 사회와 교회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반증한다.

 

또한 ‘생명의 선물’과 관련된 평신도들은 교회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직을 자주적으로 만들고 활동하면서도 그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는 교회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로 거론된다. 교황청은 이 단체에 대한 명백한 반대의사를 거듭 표명했다. 아마 현 교황 임기 중 교황청의 수요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지 않을까. 하지만 ‘생명의 선물’ 관련자들은 지금도 교회 조직 내에서 깊숙하게 관련하고 있다. 한 사람이 ‘생명의 선물’에서 직간접적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SkF나 교구청 등의 직원인 경우가 흔하다. 이들 대부분은 ‘생명의 선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교회 공식조직에서 해고 등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일부 교구에서는 SkF와 ‘생명의 선물’이 한 건물에서 나란히 (디자인까지 통일된) 간판을 내걸고 일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 내 보수파들은 많은 주교들이 이들을 실질적으로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생명의 선물’ 관계자들은 스스로 경건한 가톨릭 신앙인이며,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활동하며, 자신들도 무분별한 낙태에 찬성하지 않고, 낙태의 수나 그 후유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한편 반대자들은 실질적인 낙태증인 ‘증명서’는 반생명적이고 반복음적이며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단체에 관계하는 모든 평신도, 성직자들에게 교회가 응분의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라칭거 추기경은, 대표적인 가톨릭 성향의 바이에른 주(州) 주지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생명의 선물’이 발급한 ‘증명서’를 인정해 주는 국가법을 비판했다. 한 중도적 가톨릭계 신문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국가와 사회의 관계’라는, 윤리신학의 전통적 논쟁을 다시 제기했다. 또 비판과 주장이 교차하고, 신학적 문제제기와 토론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쨌든, 이 ‘생명의 선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며 독일 가톨릭 교회의 곳곳에서 활발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생명의 선물'과 관련된 독일교회의 동향은 아래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생명의 선물(www.donum-vitae.org)

● 독일 주교회의(www.dbk.de)

●가톨릭계 언론사 ·Publik Forum(진보적) (www.publik-forum.de) · Die Tagespost(보수적) (www.die-tagespost.com)

 

* 주원준 토마스 데 아퀴노 - 지금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신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1년 3월호, 주원준 토마스 데 아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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