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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머나먼 동쪽을 찾아온 선교사들: 1945년 해방까지 광주교구의 골롬반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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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2 ㅣ No.665

머나먼 동쪽을 찾아온 선교사들


- 1945년 해방까지 광주교구의 골롬반 선교회 -

 

 

1. 들어가는 말

2. 골롬반 선교회의 창설과 영성
3. 골롬반 선교회의 한국 진출 배경
4. 골롬반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준비 과정
5.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선교 환경
6.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활동
7. 일제 강점기 때의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고난
8.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한말 · 일제강점기 때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천주교”라는 큰 주제 아래 각 선교회의 역할을 성찰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에 진출했던 선교회에 대한 연구는 초창기 한국교회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광주대교구 출신으로서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이하 ‘골롬반 선교회’로 약칭) 선교사들이 광주대교구 내에서 어떻게 선교의 삶을 살아왔는지 성찰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부분을 맡았다. 그런데 1933년 10월 29일 골롬반 선교회의 한국 진출 이후로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12년 동안의 삶을 성찰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연구기간과 활동기록의 부족)이 많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로마 포교성성 문서고를 찾아가서 한국 교회와 포교성성 사이에 오고 간 문서라도 살펴보려 하였으나 아직 1927년 문서까지만 열람이 개방되고 있어 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곳 빛고을 광주에 복음화의 씨앗이 뿌려진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들을 통해 시작된 선교는 방인 사제들과 골롬반 선교회 사제들을 통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이후 과달루페 선교회 사제들도 광주에 진출하여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골롬반 선교회만 보았을 때,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 광주대교구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고 순교하였으며, 몇 분은 고국으로 되돌아가고 그 외 남은 분들은 여전히 활동적으로 사목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되돌아 볼 때, 한국 교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생겨났지만 그동안 선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초창기 신앙의 뿌리를 만드는 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광주대교구 50년사》와 각 본당사(북동, 산정동),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그리고 골롬반 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The Far East에 언급된 내용들 속에서 선교사들의 상황과 활동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선교사 개인이 지닌 선교 정신도 살펴보고자 하는데, 무엇보다도 에드워드 피셔(Edward Fischer)의 Light in the Far East가 큰 도움이 되었다. 선교사 개인의 책들도 이번 글에서 참조하여 선교사 개인이 지닌 선교 정신도 살펴보고자 한다. 심포지엄의 주제가 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범위로 설정하고 있기에, 본 연구를 통해 드러난 국가와 종교 사이의 관계도 편협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 본고는 종합적인 연구결과라기보다는 연구과정 속에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골롬반 선교회의 특성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선교회의 방향성 안에서 결론 부분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2003 한국진출 70주년을 기념하여 골롬반 선교회 총장 블랜단 오설리반 신부는〈씨앗은 작지만 나무는 크다〉라는 글을 통해 골롬반 선교회 취지와 전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는 선교사로 파견되어 그곳 사람들과 기꺼이 함께 삶을 나누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의도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간 곳의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했고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일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선교사의 수가 많이 줄었지만 우리는 계속 선교활동을 하면서 사회에서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알코올 중독, 도박, 농업, 상담과 같은 분야는 교구의 손길이 미치기 힘든 곳입니다. 청년사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와 같은 일들이 선교사를 필요로 합니다. 골롬반 선교회는 다른 단체들이 갖기 힘든 유연함을 가지고 개척자 정신을 요구하는 곳을 찾아서 투신할 것입니다.1)

시대의 변천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유연성을 가지고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골롬반 선교회의 모습을 본고를 통해 성찰해 보고자 한다.


2. 골롬반 선교회의 창설과 영성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는 1916년 아일랜드의 에드워드 갤빈(Edward Galvin) 신부가 창설한 선교 단체로 본래 중국 선교를 목표로 하였으나 포교성성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 선교를 맡게 되었다. 갤빈 신부는 본래 미국 뉴욕 교구 브룩클린 지구에서 사목하던 선교사였으나 1912년부터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면서 그곳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1916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메이누스의 성 페트릭 대학교수로 있던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와 함께 골롬반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처음 회원들이 진출한 지역은 중국에 국한되었으나, 이후 필요에 따라 그 선교 지역은 아일랜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뉴질랜드, 필리핀, 한국, 미얀마, 일본, 피지 등지로 확장되었다. 이 중 맨 처음 시작한 중국 선교는 1950년 중국 정부에서 선교사들의 입국을 거절함에 따라 중단되어야 했다.

그러자 당시의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골롬반 선교회에 라틴 아메리카 선교를 요청하였고, 이때부터 회원들은 페루, 칠레 등지에서 가난한 도시 정착민들을 찾아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파키스탄, 대만, 브라질, 자메이카, 벨리즈 등지로 선교 지역을 넓혀 왔다. 골롬반 선교회의 설립 목적은 우선 국경과 언어, 종족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삶과 문화 안에 스며들어 있는 역사의 서열을 인정하고, 가난한 이들과의 결속을 굳게 함과 동시에 하느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면서 회원들을 세계 각국으로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부 사항으로 첫째,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 둘째, 그 지역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이 복음화 될 수 있을 때까지 그 교회의 성장을 돕는 일, 셋째, 다른 종교의 전통과 그리스도 신앙 사이의 대화를 증진시키는 일, 넷째, 지역 교회들과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일, 동시에 특히 본 선교회를 파견한 지역과 파견된 지역 사이의 교류를 돕는 일, 다섯째, 선교 대상 지역의 신자들 또한 선교의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도록 돕는 일 등을 손꼽고 있다.2)

골롬반 선교회의 영성과 지향은 설립자들이 채택한 초기 선교사들의 좌우명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igrinari pro Christo)라는 짧은 표어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자신을 비우는 사랑을 우선으로 하며, 주보 성인 골롬바노(Columbanus, Bobbio)가 6세기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한 일과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Christi simus non nostri)라고 가르친 데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선교사들은 이러한 영성을 통해 첫째, 다른 나라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데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둘째, 다른 종교, 문화, 역사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민감히 들으며, 셋째, 선교회 내 다른 회원들과는 물론 지역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삶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서 배우려는 열정을 지니고, 넷째,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조절하며, 다섯째, 어느 곳이든 파견된 지역에 기여하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을 선교 정신이요, 사명으로 삼고 있다. 골롬반 선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영성과 정신을 실현할 인적 자원으로 우선 ‘종신회원’으로서 ‘선교사제’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들은 선교사로서 일생동안 하느님께 몸 바쳐 봉사할 의향을 지닌 사람들로, 1982년 총회에서는 영어 문화권이 아닌 지역 출신자들도 이 회원으로 영입할 수 있도록 명시하였다. 다음으로 일정 기간 동안 타국의 문화 속에서 일할 뜻이 있는 교구 출신의 ‘자원 사제’들이 있다. 이들은 골롬반 선교회 준회원의 자격을 갖고, 사목 활동에서는 그 지역 교구장의 지도 아래 활동하면서 골롬반 선교회 회원들과 동등한 결정권을 지니며, 계약 기간이 종료되고 본 교구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 세 번째의 인적 자원으로는 ‘평신도 선교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선교 성소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으며, 평신도 선교 단체들과 협력하고 아울러 각 평신도 선교사들의 상호 교류를 촉진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원회원’은 직접 외방 선교사로서 활동할 수 없는 경우 선교회를 지망하는 성소자들과 선교사들을 영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뒷받침해 줌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복음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3)

골롬반 선교회 회원들의 영성을4) 살펴보는 데는 신학교의 삶을 성찰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수련기를 지낼 때, 수련자들은 엄격한 30일 피정으로 고행을 해야 했다. 당시 피정 지도신부였던 해리스 티모시(Harris Timothy) 신부는 피정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곳 도서관에서 저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몸무게를 한 번 재 보십시오. 그리고 피정이 끝나는 날, 다시 한 번 재 보십시오. 확실한 표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몸무게가 줄어들었다면 아마도 좋은 피정을 했다는 것이며, 몸무게가 늘어났다면 그것은 형편없는 피정이 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5)

티모시 신부는 음식물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강론을 자주하였고, 학생들은 먹기 싫은 음식에 대해서도 훈련을 해야 했다. 후에 광주교구장이 된 헨리 하롤드 (Henry Harold) 대주교도 해리스 신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언제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는 것이다”, “예수회의 수도자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젊게 죽으십시오”, “확실히 선교사들은 편안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들은 티모시 신부의 영성 지도에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중국 선교 중에 고난을 겪으면서도 쉽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순교의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6) 당시 상황은 선교사의 꿈을 지닌 수도자들에게 금욕 생활이 어느 정도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신학교의 학장 존 맥파든(John McFadden) 신부도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방이 좋다며, 차가운 겨울에도 난방기를 끄고 생활할 정도였다.7) 또한 신학생들은 신문을 볼 수 없었다. 선교회 신부들의 엄격한 삶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하나의 방편이었고, 개별차는 있었지만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이 살았던 사제관은 비좁고 중앙 복도식 구조여서 햇볕이 잘 들지 않았지만 그러한 것은 사목자로서 감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엄격함을 신학생 양성에도 적용하여 사실 한국 신학생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3. 골롬반 선교회의 한국진출 배경

인류복음화성 장관이었던 반 롯숨(W. Van Rossum) 추기경은 1926년 8월 4일자로 드망즈(Mgr. Florian Demange) 주교에게 공문을 보내 대구교구에서 전라남도 지역을 분리하여 다른 선교 단체에 이양하도록 지시하였다.8) 이에 대해 드망즈 주교는 9월 6일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와 이 편지를 읽고 새 수도회에 전라도를 이양하는 문제를 생각하며 성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3일 광주에 공소가 설립되었고(현재 북동성당 : 3가족 10여 명의 교우) 이미 들어와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섬을 돌며 선교에 힘쓰고 있었다. 이듬해 1927년 12월 1일 원산교구에 덕원신학교가 설립되어 방인사제 양성이 본격화 된다. 또한 1928년 8월에는 평양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어 메리놀 선교사들에게 맡겨진다.

사실 뮈텔 주교나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당시까지 한국 교회의 운영권을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맡길 생각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교황청의 뜻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자 뮈텔(Gustave Mutel) 주교는 1928년 1월 6일 황해도를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하고, 김명제(金明濟, 베드로) 신부를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 이 소식에 드망즈 주교는 대구교구의 분리시기가 다가왔다고 생각하였지만 성직자와 전교 회장 수가 부족한데다가 교세가 절반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당장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드망즈 주교가 교구 분리를 결심하게 된 것은 1928년 6월 26일부터 치료차 유럽을 여행하면서였다. 1930년 11월까지 계속된 이 여행에서 그는 포교성성 장관 반 롯숨 추기경을 만나고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장차 교구를 분리하고 한국인 교구를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어 드망즈 주교는 파리 외방선교회 총장 게브리앙(de Guebriant) 주교에게 전라도 감목대리구의 설정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1926년에 11명의 사제를 배출한 데 이어 1929년에 8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한 것도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1931년 5월 4일부터 10일까지 대구에서는 한국인 성직자 피정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는 5월 8일에 〈회람 73호〉(1931년 5월 10일자)를 통해 ‘전라도 감목대리구’의 설정을 발표하고 5월 10일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9)

더불어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었던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929년 중국의 상황은 공산주의가 득세하여 ‘종교는 외국인의 술책이며 제국주의 체제에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데 사용된 도구’라고 주장하여 신자들이 선교사들을 멀리하도록 종용하였다. 1929년 6월 티모시 레오날드(Timothy Leonard) 신부가 젊은 공산당 무리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은 선교를 준비하던 신학생들에게는 충격을 주었다.10) 또한 패트릭 라프판(Patrick Laffan) 신부와 제임스(James Linehan) 신부가 공산당에 의해 생포되어 7개월 동안 억류되어 몸값을 요구받고 있었다. 결국 갤빈 주교는 5,000달러를 주어 사제들을 구출했지만 사제들은 상처 투성이었고 고문으로 병에 걸려 있었다. 또한 공산당들은 코르넬리우스 티어니(Cornelius Tierney) 신부를 체포하였다. 당시 95세로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제를 체포해, 몸값을 요구하기보다는 심한 매질과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다. 코르넬리우스 티어니 신부는 1931년 2월 28일 포로로 생을 마감하였다. 1931년 여름에는 휴 샌드(Hugy Sands) 신부를 붙잡아 17,000 달러의 몸값을 요구하였고 굳센 갤빈 주교조차도 이러한 절망적인 사태에 대처할 방안을 못 찾고 있었다.11) 경제적인 곤궁은 교회가 처한 또 다른 어려움이었고, 굶주림은 백성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도 어려운 문제 중 하나였다. 선교사 10명이 한꺼번에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골롬반 신학생들은 ‘중국’을 선교사명의 목적지로 알고 있었고 투신을 각오하였다.

1931년 전라도 감목대리구가 설정되고 2년이 지나면서 드망즈 주교는 커다란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는 한국인 신부들의 선교 정신 결여와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그들이 교우들만을 대상으로 사목할 뿐 외교인 전교에 관심을 갖지 않고, 민족주의 입장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교구 운영 문제였다. 특히 전라남도와 제주도는 섬이나 오지가 많아 선교 활동비가 엄청나게 필요하였으며, 본당 수가 적어 신부도 부족한데다가, 경제난까지 겹치게 되면 한국인 성직자들이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짊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감목대리구의 교구 승격 대안으로 전라남도를 기존의 감목대리구에서 분리하여 수도회나 선교회로 이양해 줄 생각을 하였다.12)


4. 골롬반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준비 과정

골롬반 선교회가 광주대교구에 들어오게 된 역사적인 계기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졌다. 당시 중국 선교 임무를 맡아 상해(上海)로 가는 도중 10명의 골롬반 선교회 사제들은, 골롬반회 장상인 맥골드릭(McGoldrick) 신부로부터 한국으로 가라는 통지를 받고 머나먼 동쪽 땅 한국에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러 오게 된다.13) 그들 중에는 아무도 한국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한국의 지리적인 위치조차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고을 광주의 복음화가 아일랜드 출신의 골롬반 선교사들에게 맡겨진 것은 참으로 섭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조선어 공부가 어느 정도에 이르자 드망즈 주교는 1934년 3월 13일자의 대구교구〈회람 90-3〉호를 통해 그 동안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공포한다.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남·북의 감목대리구로 나누고, 지난 3월 8일자로 맥폴린(Owen Mcpolin)14) 신부를 전라남도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 감목대리구 설정 당시 제주를 포함한 전라남도 지역에는 목포(산정동) · 나주 노안(양천리 계량공소) · 광주 북동 · 순천 · 제주 · 홍로 본당 등 6개 본당에, 교우 수는 3,143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대구에 머물던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은 1934년 4월 1일, 전라도 지역의 각 본당으로 임명되어 4월 3일부터 9일까지 모두 대구를 떠났으며, 감목대리 맥폴린 신부는 교우 수가 가장 많던 목포로 가서 골롬반 선교회 한국 지부의 터전을 닦기 시작한다.15) 1939년에는 새로 설정된 춘천지목구장으로 퀸란(Tomas Quinlan)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에 착좌하게 되었다.16)

한편 골롬반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글이 1934년 7월호 The Far East라는 회보에 실렸는데, 한국인들의 순교자적인 자세에 부합하려 자신들도 한국인들과 함께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어갈 것이며 이들의 신앙을 지켜오고 있음을 알렸다. 또한 한국 선교의 미래는 신학생과 신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신앙심 깊은 한국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청년들을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한국 신자들의 성직자에 대한 열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사제가 부족하여 사제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801년과 1827년에는 교황에게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 일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리고 현재 시복되어 순교자로 그 이름을 남긴 젊은 사제들의 대담한 열정과 복음을 위한 한국인들의 노력은 선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역사 인식에 있어서도 비록 아일랜드 출신의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시각은 아니었지만,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들이었기에 일본의 압제하에 놓여진 한민족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17)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은 상해(上海)로 가서 임 맥폴린 신부를 만나고, 10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배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갔다가 이어 기차로 시모노세키에 이르러 다음날 아침 10월 29일 6시경 부산에 도착하였다.18)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중국 선교를 위해 오는 도중 선교지가 한국으로 바뀌어 그들 중 누구도 지도상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 중 지도자 자격이었던 임 맥폴린 신부는 당시 45세 정도였고 1920년경 중국 개척 첫 골롬반 선교회 회원 중 한 사람으로 중국에서 이미 13년 동안 전교하였다. 이 신부들은 부산에서 대구까지 약 세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하여 문(Mousset) 신부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환영을 받았다.19) 이어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20)에서 윤 요셉으로부터 간단한 한국어를 6개월 동안 공부한 후 전라남도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전라남도로 파견되었다. 1934년 4월 3일 그들을 데리러 온 정수길(鄭水吉, 요셉) 신부와 지(Brian Geraghty : S.S.C) 신부와 간(Thomas Neligan : S.S.C) 신부가 보좌로서 순천으로 출발하였다. 매(Gerrard Mari nan : S.S.C)21) 신부는 송남호(宋南浩, 요셉)와 광주로, 하롤드 현(Harold Henry : S.S.C) 신부는 나주로, 파트리치오 손(Patrick Dawson : S.S.C) 신부와 아우구스티노 서(Jerome Sweeney : S.S.C)22) 신부는 제주읍으로, 명(Delvin McMenamin : S.S.C) 신부와 라(T.D. Ryan : S.S.C) 신부는 제주 홍로(현 서귀포 본당의 전신)로 임지를 맡아 떠났으며, 이어 4월 9일 임(Owen Mcpolin : S.S.C) 신부와 모(Patrick Monaghan : S.S.C) 신부가 목포로 향하였다23).

당시 지도자 자격이었던 임 맥폴린 신부는 골롬반 선교회의 한국 본부를 목포에 두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목포 시내와 인근 주변 시골 마을에 약 800명의 신자가 있었던 반면에, 광주는 전남의 도청소재지였으나 겨우 20여 세대의 신자 가족이 있었을 뿐 신앙상으로 별 의미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는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는 항구였기에 목포에 골롬반 한국 본부를 두게 된 것이다. 골롬반 선교회에 전라남도의 사목을 맡긴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에 따르면, 당시 전라남도는 4명의 조선인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으며, 모든 교회는 다소간 목포 본당과 연결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언어상의 어려움도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오(Joseph O’Brien : S.S.C) 신부24)와 도일(James Doyle : S.S.C) 신부25)가 전남 지역에 더 배당되었으나, 임 맥폴린 신부는 이들 두 신부가 일본어를 배우도록 그들을 도쿄로 보낸다.26) 첫 번째 이유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 신자들을 위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관공서와의 교류를 위해서였는데,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언어로 여러 공적 업무를 해야 했기에 이를 위해 대변자로서 준비를 해둔 것이다.27) 그래서 이들은 2년간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후에 서(Jerome Sweeney) 신부도 일본으로 파견된다.28) 이렇게 이 세 명의 신부들은 일본에서 약 5년 동안 머물면서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여러 교회에서 다양하게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일본 본당 신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의 교육, 문화, 인간성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의 영향에 대해 적대감을 지닌 일본의 군부 세력들은 그리스도교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주만 공격 때 세 명의 신부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도일 신부는 홍천에 감금당하며,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지닌 서 스위니 신부는 전쟁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오 신부와 도일 신부는 일본 도쿄로 되돌아 갔다.29)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평양교구를 정식 주교구로 올리고, 그해 10월 29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국 메리놀 전교회의 오세아(오, F. O’shea) 신부를 평양교구의 주교로 임명하고, 그 성성식을 거행한다.


5.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선교 환경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이 선교의 꿈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동방》(The Far East)이라는 잡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미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선교사들의 소식은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에게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현지의 사정은 선교 잡지가 전해주던 것처럼 모험 가득하고 낭만이 넘치는 선교 활동이 아니라 가난과 배고픔, 알파벳을 사용하지 않는 언어와의 싸움 등으로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한편 중국을 향해 선교의 꿈을 가지고 출발했던 선교사들은 한국이라는 새로운 땅, 한국에서 선교하라는 명에 처음부터 힘겨운 출발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중국선교를 하다가 최초로 한국에서 수도원장을 맡은 맥폴린 신부도 새로운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9명 중 유일하게 그나마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었던 맥폴린 신부는, 젊은 사제들과의 삶이 평탄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음식과 언어였다. 그런데 이 둘 다 쉽지 않은 숙제였다. 아시아의 공기 속에 무겁게 깔려있는 감내하기 힘든 냄새와 가난, 그리고 사람들의 배설물 냄새, 김치 냄새는 그들을 힘들게 했다. 특히 선교사들은 고백성사를 줄 때 사람들의 김치 냄새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선교를 위해 문화적응이 우선되어야 하며 특히 무엇보다 삶을 위한 음식 적응이 급선무였다. 언어에 대한 적응은 더욱 참담한 것이었다.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교육이 아니라 영어를 모르는 교사의 몸짓과 행동, 그리고 판서로 이뤄진 언어교육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의 강제 점령을 당하고 있던 현실이었기에 일본어 공부도 해야 한다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현 하롤드 신부는 “이것이 선교활동이라면 나를 풀어달라!”는 말을 되풀이 하며 “《동방》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모든 기사는 이런 면에서는 그를 하나도 준비시키지 못했다”고 말하였다.30)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배우면서 겸손을 체험했고 “조선말 모릅니다”라는 말을 할 때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체계적인 언어교육 기관이 생겼다. 새로온 선교사들은 서울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신부가 운영하는 명도회와 장로파가 운영하는 연세대학에 들어가 언어공부를 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기본 활동이 그러하듯이 복음화에 초점을 두고 세례와 미사 거행을 통한 본당 운영이 기본활동이 되었다. 물론 당시의 한국처럼 특수한 경우에는 강제 점령을 하고 있던 일본인 신자들을 더불어 사목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6.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활동

목포를 거점으로 한 선교 중심에 학교가 있었다. 1937년 7월의 The Far East에는 교육 선교의 효과를 이렇게 묘사했다.31)

신부님들의 감독 아래 2명의 여선생님이 가르치는 야간 여성학교는 84명의 학생들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뿐만 아니라 독서, 글쓰기, 바느질 등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교도들도 이 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전 가족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야간 학교에 다니는 한 소녀는 너무도 신앙심이 강해 12살이지만 2주마다 고백성사를 하고 기도도 매우 열심히 합니다. 한 아주머니는 병으로 몸이 많이 아픈데, 우리가 집에 갈 때마다 머리맡에는 교리책들이 있고 우리의 두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부활절에 우리는 24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하롤드 헨리 신부가 보낸 The Far East에 실린 소식에 의하면 가정집을 리모델링하여 학교를 만들고 여학생들은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에 수업을 하고 남학생들은 오후 7시에서 10시까지 수업을 했는데 주로 수학, 교리, 일본어, 한국어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들은 집중하여 가르침을 잘 따랐다고 묘사하고 있다.32) 하지만 선교사들은 음식과 언어 문제가 좀 풀리자 현실적으로 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선교사로서의 본당신자들에 대한 우월감을 제거하는 일과 신자들이 낮선 외국인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는 일이 그것이다. 낮선 한국 땅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한국인처럼 삶을 바라보도록 노력하고 그들처럼 행동하고 함께 느끼도록 노력해야 했다.33) 그러나 이것을 결코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었다. 선교사들은 유대 그리스도교 문화와 앵글로 색슨 문화, 그리고 오래전에 그리스와 로마에서 형성된 틀에 의해 살아왔는데 반해, 한국의 문화는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 등 종교적 · 문화적 성향이 중국과 일본, 그리고 강대국의 영향권 아래 다양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같은 시선으로 풍습을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사회의 각종 행사나 생일 잔치, 결혼식, 그리고 명절 차례 등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런 잔치에 . 참석하면서 한국인들의 의식과 문화 안에서 유교적 체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본당 안에서 신자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점차 동화되어 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들을 예의 주시하고 늘 질문을 던지며 감시하였다. 때로는 버스나 기차를 탈 때도 신분증을 요구하면서 행선지와 여행 목적, 그리고 언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해 낱낱이 따져 물었다. 때때로 여행 중에 사복차림의 형사들이 옆자리에 앉아서, 도착지에서는 다른 경찰들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곤 했다. 더욱이 신자들이 사제관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나가면 반드시 형사들이 대화의 내용을 물으면서 감시하였다. 엄격하게 말해서 종교의 자유가 국가 통치기관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분개하였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식민통치의 상황에서 통치자에게 반감을 사게 되면 선교는 그만큼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종교의 자유는 현장에서 잘 이뤄지지 않았다. 1919년 3월 나주에서 학생들이 일본인에 대항하여 싸움이 일어나고 이 일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일본인들은 나주가 피폐해지도록 행정적으로 보살피지 않고 방치하였다.34)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한글 읽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아이들부터 시작하여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학교도 일본 군부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학생 수를 제한하고 6개월마다 허가를 갱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식민지 국민들을 무지하게 만드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졸업생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점심을 준비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떡을 사주었다. 또한 원조금으로 성당을 세우고 공소를 방문하며 교세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무엇보다도 공소를 방문하여 신자들의 허름한 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천천히 한국 신자들과 동화되어 갔다.35) 하지만 신자들이 늘어갈수록 일본은 더 강제적인 압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하롤드 신부가 미국의 골롬반 회원 패트릭 오코너 신부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그들은 성당에서 일본 국가를 부르기 원합니다. 또한 매주일 일요일 미사 전에 일본 제국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반대하자 일단 양보했습니다.36) 또 사람들이 군인으로 징집되어 갈 때마다 기차역에 나오라고 강요를 하고 있어서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학교 어린이들은 하루에 무려 다섯 차례나 기차역에 나간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당국에서는 좀 늦추었습니다.37)

이 글을 통해 1939년 당시의 일제의 탄압상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더욱이 일본 고등계 형사들은 편지들을 검열하여 사제들에게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되묻곤 하였다. 신자들이 늘어나서 공소를 짓기 위해 땅을 사려고 하면, 지역 주민들은 일본 경찰이 무서워 땅을 팔지를 않았다. 그래서 신자 명의로 땅을 사서 성당에 기증하는 형식을 갖추었는데, 일본 경찰은 격분하여 성당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연행하였고 외국인 신부와 더 이상 관계를 맺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이럴수록 사람들은 믿음을 더 갖고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성탄절 자정에 축하 잔치 가운데 3명의 여자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의 가사가 “자유의 꽃은 한국에서 다시 필 것”이라는 내용이라고 해서 세 명의 여자아이를 감옥에 가두는 일도 있었다. 한편 일본 경찰은 전쟁이 가까워지자 은행에 있던 돈마저 통제하여 5달러 정도만으로 생활을 하도록 하였고 신자들은 닭이나 달걀, 배추 등 음식을 본당 신부를 위해 성당으로 가져왔다. 이제 선교사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았다. 한국인들도 이제는 신부님의 발길이나 코의 크기에 대해 개념치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하는 질문도, 언어가 어느 정도 숙달되었는가에 대한 비평도 하지 않았다.38)

또한 당시에 나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성당 근처에 움막집을 짓고 새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당시 일본 군부는 소록도에 별도의 나환자촌을 만들어 수용하려 했지만 그 수용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병 환자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일반인의 집에 들어가 구걸을 하며 생활하였다.

목포에서 사목하던 모 바트리시오(Patrick Monaghan) 신부는 성당 구역에 불법 침입한 나병 환자를 머물도록 해주었다. 또한 그에게 가톨릭 서적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패닉상태가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내보내게 되고, 그는 다른 나병 환자와 마을에서 떨어진 사람이 없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가톨릭을 절실하게 믿게 되고 세례도 받게 되었다. 그는 비록 동료의 도움 없이는 책도 읽을 수 없었으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모 바트리시오 신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미래에 광주교구에 나환자 정착촌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39)


7. 일제 강점기 때의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의 고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은 강원도 홍천에서 가택연금을 당한 채 지내야 했다. 광주교구 4대 교구장을 지낸 현 하롤드 대주교의 삶도 일제 강점기 때 고난을 당해야 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을 모두 스파이로 간주하고 있었다. 돈벌이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벽지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것이었다. 현 신부는 나주 본당 초대 주임을 지내면서 일주일에 두 번 사상계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목포에 있던 다른 골롬반회 신부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고해성사를 의심하던 일본 경찰은 “당신이 스파이가 아니라면 왜 작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서 애기를 나누는가? 그들이 알아낸 정보를 남의 눈을 피해 알려주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들이 한 말을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가?”라고 물으며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신자 수도 늘어갔다. 현 신부는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열었고 한국말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도 구하였다. 일본 경찰은 학교 운영은 위법이라며 방해하였지만 현 신부는 학교가 아니라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기에 허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뜻을 굳히지 않았다. 1941년 전쟁이 발발하자 강제 추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되돌아왔다.40)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한국에는 30여명의 골롬반 신부가 21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다음날 12월 8일에는 적성국(敵性國) 사람이라는 이유로 모두 체포되어 호주, 미국, 뉴질랜드 출신의 7명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남은 아일랜드 신부들은 준적성국(準敵性國) 국민이라 하여 가택연금 당한다.41)

현 하롤드 신부와 톰 칸(Tom Kane) 신부는 목포에서 나주로 이송되어 나주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광주에 감금되었다. 광주에는 맥폴린 몬시뇰(Monsignor MacPolin)과 패드릭 모나한(Patrick Monaghan),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신부가 감금되었고, 토마스 네리간(Thomas Neligan)과 브라이언 게라티(Brian Geraghty) 신부는 춘천 북동쪽에 새로 설립된 집에 억류되었으며, 손 패트릭 도우슨(Patrick Dawson) 신부와 나 라이언(Thomas D. Ryan) 신부, 서(J. Augustine Sweeney) 신부는 제주도에서 혹독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1942년 봄, 아일랜드인 골롬반 신부님들이 연금된 상태에서 풀려난 뒤에도 미국인인 현 신부와 칸 신부 그리고 호주의 캐빈 망간(Kevin Mangan) 신부는 사제관에 계속 갇혀 있었다. 같은 해 5월 두 분 현 신부와 칸 신부는 미국에 있는 일본인 포로와 교환을 위해 기차로 부산으로 향하였다. 부산에서 패트릭 브렌난(Patrick Brennan) 신부를 만나 서로 껴안았다. 6월 1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일본인들이 준비한 배는 수감자들을 동아프리카의 포르투갈에 있는 로렌코 마르케스에 데려다 주기로 되었고, 다시 그립스홈 호에서 아사마 마루 호로 이동되어 미국인들은 스웨덴 배를 타고 뉴욕으로 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배에는 900여 명의 개신교 선교사, 150명의 사제, 약 200명의 수녀, 약 200명의 외교 종사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42)

연금 상태에서 길 헨리 신부는 장티푸스에 걸렸으나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광복을 일주일 앞둔 1945년 8월 6일 사망한다. 또 제주도에서 활동하던 나 토마스 신부와 손 파트리치오 신부, 서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간첩 혐의로 징역형에 처해졌다.43) 세월이 흐른 뒤 1999년 광복절을 맞아, 정부에서는 옥고를 치른 이 3명의 신부에게 독립 유공자 훈장을 수여하였다.44)

좀 더 자세하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 조선 총독부에서는 태평양 전쟁 발발 수개월 전부터 전국적으로 외국인의 여행을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선교사들은 여행증명서를 소지하지 않고서는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목포 본원에서는 다른 골롬반 신부들과 손 파트리치오 신부가 이 사건의 대처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밤 10시 반경 갑자기 20여 명의 경찰이 와서 신변을 보호해 준다는 명분으로 신부들을 끌고 갔다. 그러나 감옥 경비들은 신부들에게 스파이 혐의로 총살될 것이라고 했다.45) 한편 제주도로 이송된 손 파트리치오 신부는 이송된 곳에 나 토마스 신부와 서 아우구스티노 신부도 끌려와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누가 잡혀왔는지 심지어 같은 건물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사실 세 신부들이 잡혀온 까닭은 그들이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면서 일본 해군기지가 확장되고 중국을 폭격하기 위한 공군기지가 세워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본국으로 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군부에서는 세 신부들을 스파이로 몰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함께 끌고 와서 심한 고문과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이기에 끝까지 신부들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모진 고문에 죄를 인정한 몇몇 사람들의 조서를 모아서 서류를 작성했고, 신부들에게 그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 신자들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신부들은 신자들의 고통을 생각한 나머지 도장을 찍어 주었다. 한편 이듬해 10월 25일, 공판이 열려 군사기밀을 염탐한 스파이 혐의로 14명의 신자가 함께 끌려왔다.46) 그들 모두는 고문과47) 공포로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히며 신부들의 혐의를 벗게 해주려 노력했지만 항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모두 유죄판결을 받고 형량도 늘어났으며, 그 후 중앙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비록 한 감방에 있게 된 것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막아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추운 겨울 내내 세 명이 담요 두 장으로 추위를 견디어야 했고 모두 영양실조에 걸려 고생하였다. 결국 1943년 7월 나 신부는 병으로, 1944년 서 신부는 형기를 마치고 목포로 보내졌다.

손 파트리치오 신부의 증언을 들어보자.

1945년 8월 15일 죄질이 가장 나쁜 공산당원과 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강당에 모아놓고 전쟁이 끝났다고 발표했다. 다른 죄수들이 감방으로 돌아가면서 이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든 죄수가 소리 높여 다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이틀 후 석방이라고 했다. 나는 즉시 광주로 가서 3년 9개월 만에 첫 미사를 드렸다. 그 날은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날이다.48)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증진시키고자 종교적인 단체들을 다루는 특별한 기술을 개발하였다. 즉 자신들이 만든 ‘새 질서’를 증진시키는 데 있어 종교적인 인물들을 어떤 분야에서 활동하게 하느냐 하는 문제에 당면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은 선교사들에게 당분간 그리스도교는 한쪽으로 제쳐놓고 국가주의 이념에 전념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은 어떻게 외국인이 올바른 국가방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는 교구장이었고 선교의 수반으로서 모든 신자들이 법률적 지위에 따르는 것을 보고 일본 정부도 그렇게 인식하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을 먼저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 일본 당국의 이러한 정책은 경찰들의 교구장과 선교사, 그리고 신자들의 가택수색을 통하여 곧 명백하게 드러났다. 일본 경찰들은 지도자가 외국인인 이상 선교사들에게나 선교사들의 동료들에게나 모든 일들이 좋지 않을 것임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이미 일본에서는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에 일본 내의 모든 외국인 주교를 추방하였다. 한국에서도 종교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그리스도교인으로서 교구장이고 선교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애가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교구장과 선교사 자신들에 의해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만일 교구장들이 자신들의 집무실에 머무르기를 주장하고 로마 교황청이 그들의 추방에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종교 박해는 쉽게 결정이 되었을 것이다. 교구장들의 추방은 교회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호된 시련의 방법이었다. 일본 당국은 새 교구장의 서임을 완전히 로마 교황청의 자유에 맡기고 새로운 일본 출신 교구장들이 집무실을 인수함에 있어서 종교적이며 사회적으로 필요한 정식 절차를 수행하는 데 어떠한 장애도 주지 않았다.49)


8. 나가는 말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광주교구 골롬반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그리고 그들의 고난 등을 살펴보았다. 한국 교회의 자발적 선교와 발전에 이의를 제기한 몇몇 연구자들이 있었지만50) 역사적 사실은 자발적 선교 아래 선교사로 들어온 선교사들의 순교와 그들의 피땀이 이 땅에 복음화의 빛을 가져왔다는 공로를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 입장에서 선교사들이 조선 민중의 소리를 듣기보다 기득권 세력 즉 일본 군부의 소리를 듣고 그들 입장에서 선교를 해왔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하지만 광주에 들어와 활동하던 골롬반 선교회의 선교사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민중과 함께 고난당하고 박해받으며 하느님의 복음 말씀을 전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성원 대다수가 아일랜드와 미국출신으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무엇보다 이들은 언어의 장벽에서 무력감과 두려움, 그리고 적응하지 못한 음식 등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때라는 현실 속에서 선교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굳게 믿고 신자들에게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데 노력하였다.51) 이처럼 선교사들은 ‘조선은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 아일랜드처럼 독립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나 성당의 (제대에서) 강론할 때나 망설임이 없었다. 행사 때 내건 만국기 중에서 일장기를 떼 내 발로 밟아 교우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도록 했고, 학생 교우들에게는 ‘일본어를 배우기는 하되 쓰지는 말라’고 가르쳤다.52)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견해도 피력하면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전쟁이 길어지면 틀림없이 일본군은 물자부족으로 결국 패전할 것이고 또 당연히 패전해야 하며, 독일과 영국의 전쟁도 영국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신자들과 시국담을 나눌 정도였다. 제주의 일본 경찰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제주의 군사 기밀이 유출될 것을 우려하여 1941년 10월에 손 도슨, 서 스위니, 나 라이언 등 3명의 선교사들을 체포하였다. 체포한 이유는 첫째 조선 독립에 대한 시국담을 나누고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출했다는 것과 둘째, 제주 지역에 건설될 예정인 일제의 군사 기지에 관한 기밀을 유출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신자들을 앞세워 고문을 가한 뒤 교회 활동과 선교사들의 행위를 고발토록 하였으나 신자들이 반대하자 군기 보호법 위반이란 혐의를 씌워 선교사들을 체포하여 광주 형무소에 투옥시켰다.53)

오늘날 광주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골롬반 사제들은 다양한 분야, 특히 교구사제들이 맡기 힘든 영역에서 자신들의 일을 해내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골롬반 선교사들의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엠마우스 복지관은 광주교구의 소외된 이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이 공동체의 동반자 천 노엘 신부는 이 사회의 소외된 이들 실패자나 문제아로 취급받는 정신지체인들로부터 21세기 사회와 문화, 그리고 교회를 향해 하느님의 길을 보여주는 예언자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54) 공소처럼 작은 시골 본당에서 사목하며 물질적 혜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삶도 마다하지 않고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에드워드 피셔의 책 《동방의 불빛》에서 현 신부는 일본군 포로와의 교환이 확정되자 자신의 첫 사목 임지였던 나주 본당을 방문하고 그날의 소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일본인 포로와 교환을 위해 부산으로 향하기 전 현 신부는 몇 가지 개인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나주로 호송되었다. 남겨둔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가 사제관에서 나왔을 때 어린이들이 학교 운동장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일본인 호송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 신부는 어린이들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몇 마디를 못하고 말이 막혔다. 어린이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완전적응을 향해서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걸어왔다는 것을 알았다.55)

이렇게 골롬반 선교사들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고 오늘날은 시대적 적응을 위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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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랜단 오설리반, 〈씨앗은 작지만 나무는 크다〉, 《변방선교》 49,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2003, 7쪽.
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1, 450쪽.
3) 한국교회사연구소, 같은 책, 451쪽.

4) 골롬반 회원들의 영성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창립자와 초창기 사제들의 삶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선교를 먼저 시작한 메리놀 선교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지만, 아일랜드 출신 사제들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문화와 많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골롬반의 창립자들이라고 말할 때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와 에드워드 갤빈(Edward Galvin) 주교를 말하는 데 덧붙여서 초창기 사제들도 함께 언급한다. 에드워드 멕카티(Edward J. McCarthy) 신부, 에드워드 매귀어(Edqard Maguire) 신부, 존 해나간(John Henaghan) 신부, 미카엘 오디워(Michael O’Dwyer) 신부, 패트릭 클러리(Patrick Cleary) 신부, 요셉 오레리(Joseph O’Leary) 신부, 코르넬리오 티어니(Cornelius Tierney) 신부 등 초창기 멤버들로부터 영성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영성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로는 폴 왈드론(Paul Waldron) 신부, 파드레이그 코놀리(Padraig Connolly) 신부,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신부, 해리스 티모시(Harris Timothy) 신부 등을 언급한다. James McCaslin, The Spirituality of our Founders - A Study of the Early Columban Fathers, Society of St. Columban Maynooth Mission to China, 1986, pp. 15~16.

5) Edward Fischer, Light in The Far East - Archbishop Harold Henry’s Forty-Two Yeras in Korea, New York: The Seabury Prss, 1976, p. 9.

6) 같은 책, pp. 10~11.

7) 하롤드는 자신의 서품식에 자신의 가족들을 초대하고자 요청했을 때 맥파든 신부는 함께 서품 받게 될 아일랜드 출신의 두 사람에게는 생존한 친척이 없어서 초대하지 못하니 하롤드 역시 초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같은 책).

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드망즈 주교일기》, 가톨릭 출판사, 1987, 1926년 9월 6일.

9) 파리 외방전교회의 첫째 목적은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고 교구를 이양하는 것이다. 조선교구 설정과 동시에 외방전교회가 한국 교회를 담당한 지 꼭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박해와 한국인 사제 수의 부족으로 교구 이양 준비가 지연되어 왔다. 이제는 그것을 준비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불초가 20년 전부터 대구교구를 관리하면서 신학교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왔고, 결실이 없지 않았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한국인 교구 설정 준비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일의 중요성에 비추어 신중을 기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 포교성성 장관과 서면으로 또는 직접 만나 여러 번 상의하였고, 교황 알현 때에도 말씀드렸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들러 교황사절을 만나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문의하였다. 이에 전라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는 바이다. 감목대리구는 자치 교구를 향한 수련기와 같다. 이 수련기는 감목대리, 사제, 신자들의 활동 여하에 따라 기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본 교구장과 교황사절의 보고를 바탕으로 교황 성하가 그 시기를 판단하실 것이다. 양심상 또는 경험에 비추어 주교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을 제외하고는 감목대리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대구교구, 〈회람 73호 ‘전라도 감목대리구 설정령’〉, 1931년 5월 10일).

10) 1929년 11월 갤빈(Galvin) 주교는 신학교로 어려움을 나타낸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내용은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크게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완전히 싫증을 느끼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거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선교 활동에 있어서는 불모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모든 일을 보아야 하며, 주님께서 당신 뜻대로 일을 이루시며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Edward Fischer, 앞의 책, pp. 14~15).

11) 갤빈 주교가 돈을 마련하여 1,500달러의 돈을 보냈다. 그러나 돈이 도착했을 때, 골롬반 사제들은 늙고 심한 병이 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나제리(Nazzeri) 신부를 가리키며 “대신 그를 내보내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샌드 신부는 6개월 동안 석방되지 않았다(Edward Fischer, 앞의 책, p. 15).

12)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1, 151쪽.

13) The Far East 16, 1933년 11월, p. 241. 맥폴린 신부를 포함해서 10명의 사제가 새로운 임지 한국에 도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예전에는 중국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상황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에 대한 배척이 강하고 몰래 선교한 선교사들은 동물처럼 처형되었으며 일본의 지배로 사회가 안정되어 한국의 외진 곳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14) 1889~1963. 골롬반회 신부로 초대 광주교구장. 1934년 전남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자 감목대리로 임명되었고 1937년 전남 감목대리구가 광주 지목구로 설정되자 초대 광주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제의 탄압을 받고 광주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가 행방 후 다시 광주교구장에 취임하였으나, 1948년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63년 선종하였다.

15)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앞의 책, 153쪽.

16) 1939년 4월 25일 경성대목구에서 춘천지목구가 분리되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었다. 그리고 1937년 4월 13일 이미 대구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설정된 광주 지목구장이었던 임 맥폴린 신부가 겸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얼마 후 춘천에 와 있던 퀸란 신부를 대리로 임명하였고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제2대 춘천 지목구장에 임명된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11, 8293쪽).

17) The Far East 1934년 7월호 ; 〈새싹이 대지에서 솟아오를 때〉, 《변방선교》 49호,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2003, 9쪽 ; David M. Sheehan, A Columban Missioner Forty Years in Korea, Kwang-ju : Chonnam National University, 2001, p. 72. 간 다윗(David M. Sheehan) 신부는 동료 골롬반 사제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한국에서의 4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나의 고민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들, 특히 나의 동료 골롬반 선교회 신부님들의 마음속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봉사적 삶 안에서 드러난 영웅적인 행위들은 그 모든 것을 말하여 주었으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골롬반회 신부님들의 내적인 신념과 동기는 뚜렷하지만 드러나 있지 않고 숨겨져 있다. 아마도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한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봉사로 쏟아 버리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보도록 허락하지는 않는 아일랜드 사람의 기질 때문일 것이다.”

18) Jeremiah F. Kelly ed, The Splendid Cause, seoul : Benedict press, 1984, p. 12.
19) The Far East 17, 1934년 8월, p. 156.

20) 오수성, 〈부족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변방선교》49, 2003,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14쪽.

21) 매 신부는 부임 초 1,300평의 성당 부지를 더 매입하여 37평의 목조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어 1935년 2월 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사제관을 건립하여 그동안 제주 서홍리 본당에서 사목하였던 명 신부(Daniel McMenamin)가 보좌신부로 거주하며 사목할 수 있게 되었다. 매 제랄드 신부는 무엇보다 한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편함과 대구 신학교에서 배운 한국어 실력으로는 의사소통하는 데 문제가 있었으며, 음식문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이 컸다(《북동본당 발자취-70년사》, 천주교 광주대교구 북동주교좌 성당, 아름다운 세상, 2006, 75, 83쪽).

2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드망즈 주교일기》, 1933년 10월 29일. 도착자 명단에는 스위니 신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934년 4월 4일자 일기에는 제주도로 파견되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10명으로 언급 되어 있다.

2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같은 책, 697, 701쪽, 1934년 4월 3일, 4월 4일, 4월 9일, 6월 26일, 6월 30일자.

24) Missionary Society of Saint Columban, Those who Journeyed with us, p. 31.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 일본으로 되돌아가 41년간 사목하다 1989년 건강이 악화되어 아일랜드로 되돌아갔다가 은퇴하고 1990년 3월 2일 선종하셨다.

25) Missionary Society of Saint Columban, 앞의 책, p. 42.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일본 선교의 개척자로서 들어가 일본 새 지역의 원장을 지냈고 1982년 3월 26일 구마모토에서 사목하시다 선종하셨다.

26) 맥폴린(Mac Polin) 신부가 오디워(O’Dwyer)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34년 6월 13일, 그리고 답신으로 오디워 신부가 맥폴린 신부에게 보낸 답신 : 1934년 7월 4일. 그리고 이에 대한 맥폴린 신부의 편지 : 1934년 7월 29일 편지(《골롬반 문서 목록 및 요약본》 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사 사료실, p. 147》).

27) 중국에서 선교 중이던 맥카티(McCarthy) 신부는 맥골드릭(McGoldrick) 신부에게 편지를 통해 일본어는 한국 공립학교에서 허락된 유일한 언어이기에 일본어를 배워야 하고 선교사들이 일본어를 배우지 않으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세미나를 통해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한국인 신부들에게서 위신을 잃게 된다고 말하였다(앞의 책 1, p.16, 1938년 5월 31일 편지).

28) Edward Fischer, Japan Journey - The Columban Fathers in Nippon, New York Company : Crossroad, 1984, p. 3 ; Missionary Society of Saint Columban, 앞의 책, p. 42. 한국에 진출한 초창기 맴버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카나가와(Kanagawa) 지역의 원장을 지냈고, 일본 골롬반회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의 동생 J. Augustine Sweeney도 목포와 제주도에서 사목하였다.

29) Edward Fischer, 앞의 책, p. 4.

30) Edward Fischer, Light in The Far East - Archbishop Harold Henry’s Forty-Two Yeras in Korea, pp. 26~27.

31) The Far East 20, 1937년 7월, p. 152.
32) The Far East 20, 1937년 9월, p. 208.
33) Edward Fischer, 앞의 책, pp. 32~33.
34) 같은 책, p. 38.
35) 같은 책. pp. 40~41.
36) ‘황성요배’라 하여 일본 황제의 궁을 향하여 절을 하도록 하였다. 1940년 8월부터 강요.
37) Edward Fischer, 앞의 책, p. 47.
38) 같은 책, p. 50.

39) The Far East 21, 1938년 1월, p. 14. 현재 광주교구는 이러한 나환자 정착마을 배경을 지닌 공소가 6개 있다(현애공소, 호혜공소, 성진공소, 영민공소, 재생공소, 도포공소).

40) 민수왕,〈스파이가 아니라면?〉,《변방선교》52,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2004, 12~13쪽.

41) 평양교구의 오세아 주교를 비롯하여 미국인 신부 35명과 목포, 춘천의 두 지역 외국인 교구장 및 32명의 신부 총 67명의 성직자들을 구금함. 목포 성당은 일본군의 막사로 사용하여, 시내의 국취관을 빌려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2) Edward Fischer, 앞의 책, pp. 65~69.

43) 1940년을 전후하여 강요된 창씨개명, 신문폐간, 국민 총력연맹 조직 등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천황의 신격화 운동 즉 천황숭배가 종교의식화 되어 갔고, 신사참배가 더욱 강요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곧잘 신자 유지들에게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더 높으냐?고 물으면서 신자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들었다. 일제는 전시 체제 아래에서 징병, 징용, 학병, 보국대, 정신대 강요와 물자 배급 등을 통해 한국인들을 예속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앞의 책, 156쪽).

44) 손 파트리치오,〈다 함께 부르는 노래〉, 《변방선교》 49호,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2003, 10쪽. 제주 교회의 도슨, 스위니, 라이언 신부에 대한 재판 기록은 최근에 발견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제주 보훈지청에서는 제주 교회와 시민 단체, 학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광복 54주년을 맞이한 1999년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한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정부에 서훈을 신청하였고,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도슨 신부는 1989년에, 스위니 신부는 1980년에 사망하였으며, 라이언 신부는 1971년 목포 성 골롬반 병원에서 사망하여 서귀포 서홍리 교회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5년 11월에 제주시 황사평 성직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같은 책, 161쪽).

45)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은 날씨가 춥고 흐린 12월의 새벽에 손발이 굳어지고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그들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간수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게끔 되었다. 그들에게는 씻는다든지 수염을 깎는다든지 하는 등의 잠깐 동안이라도 감방을 나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는 담배도 읽을 책도 없었다. 간수가 제시한 규칙의 하나는 낮에 마루 위를 성큼 성큼 걸어 다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는 있지만 동양인들이 하는 식으로 엎드려 있을 수도 없었다(Edward Fischer, 앞의 책, p.55).

46)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에는 30여 명의 지도층 교우들이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서귀포 본당사》에는 강성건(아타나시오), 강군평(시몬) 회장, 허묵(아우구스티노), 고순지(콘체사), 김남구(멜키올), 당덕윤(요셉), 이가순 등의 언급이 되어 있다(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앞의 책, 157쪽).

47) 혹심한 고문을 가할 때 신부들은 자기가 받는 혹형보다도 옆방에서 사랑하는 교우들이 형벌을 받으면서 부르짓는 비명 소리가 마치 예리한 칼끝이 가슴을 찌르는 듯 견디기 더욱 어려웠다(《경향잡지》 978, 1946년 9월 1일, 23쪽).

48) 손 파트리치오, 앞의 책, 11쪽.
49) 광주대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광주대교구 50년사》, 천주교 광주대교구, 126~127쪽.

50) 메디나 저, 박철 옮김, 《한국 천주교 전래의 기원》,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9 ; 이 책의 저자와 이 책을 작성토록 자료를 제공한 로페스 가이 신부와 몇몇 예수회 신부들은 자발적 선교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었다.

51) 아일랜드 출신 골롬반 회원들은 영국과의 오랜 독립 투쟁 끝에 1921년 아일랜드가 자유국이 되었으며, 1937년에는 새 민주국가로서 헌법을 채택하였다.

52) <조선일보> 24448, 1999년 8월 14일 ;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앞의 책, 159쪽 재인용.

53)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 위원회 편, 같은 책, 159쪽.
54) 기리암, 〈엠마우스로 가는 길〉, 《변방선교》 49,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2003, 20쪽.
55) Edward Fischer, 앞의 책, p. 66.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옥현진(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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