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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로 살펴본 예수회 선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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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7 ㅣ No.524

책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로 살펴본 예수회 선교역사

예수회 선교는 이게 달랐다, 토착문화 존중 보완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서강대 출판부), 김혜경 박사 저.
 

성직수도회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선교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16세기 종교분열의 혼란과 사회적 격변 속에서 교황청이 반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때, 그 선봉에 선 단체가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1534년에 설립한 예수회다.
 
예수회는 종교분열의 불길이 알프스 이남으로 번지는 것을 막은 일등공신이다. 또 오스트리아 폴란드 독일 등 복음주의 개혁파(개신교)의 영향권에 들어간 곳에서는 영주들과 접촉해 그 지역을 재가톨릭화했다. 예수회원들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교육하고, 협상했다.

예수회는 가톨릭이 세계종교가 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 항로를 개척하자 곧바로 달려가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인도 고아와 중국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동아시아 선교여정에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발리냐노, 마테오 리치라는 걸출한 선교사를 배출했다.

과라니족 원주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밀림 속 계곡에서 오보에를 연주하던 가브리엘 신부(영화 '미션')와 일본 막부시대에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눈물겹게 고뇌한 로드리고 신부(엔도 슈사쿠 소설 「침묵」) 모두 예수회원이다.
 

"우리는 수도승이 아니다"

선교학 박사 김혜경(세레나)씨가 펴낸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서강대 출판부)는 500년 가까운 예수회 선교역사를 관통하는 '적응주의' 선교정신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 배경을 먼저 보자. 예수회 설립 무렵 가톨릭교회는 11세기 십자군전쟁 때부터 쌓여온 난제들로 인해 힘겨운 상황이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14세기)에 이어 시민사회와 르네상스 인본주의 출현은 교회의 영향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거기에 루터파의 개혁 움직임이 더해져 혼란이 가중됐다. 또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선교과제가 떨어졌다.

예수회는 이런 상황에서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선교서약)을 하나 더 하고 탄생해 가톨릭 부흥운동의 선봉에 섰다. 예수회원들 모토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다. 이를 위해 "교황이 명령하는 곳이면 세상 어디라도 달려가 무슨 일이든지 해서 영혼들을 구하겠다"며 선교대장정에 올랐다. 여타 수도회와 달리 수도복을 입지 않고, 함께 모여 시편 찬송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선교 기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는 중국 문화와 전통 속에 복음의 씨앗을 심기 위해 황실에 들어가 관복을 입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동료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중국 관습에 맞지 않는 것은 말하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며 토착문화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저자는 적응주의 선교 기원을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토대로 한 인문학적 관점으로 접근해 찾아들어간다.
 
기존 수도회와 여러 면에서 다른 성격의 예수회가 활동을 시작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고양하는 르네상스 교육을 받은 유럽 지성인들이었다. 예수회 교육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이성적 신학, 과학적 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직시(直視)에 초점이 맞춰졌다.
 
예수회 등장 이전까지만해도 선교 개념은 선교지 토착문화와 전통을 '백지화(Tabula rasa)'하고 유럽화한 그리스도교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선교역사가 그러했다.
 
하지만 예수회는 복음이 토착지역 문화 속에서 싹트도록 했다. 이교적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하느님 창조의 일부분으로 존중하고 보완해나가는 적응주의 노선을 택한 것이다. 당시로선 선교 패러다임의 일대 혁신이었다.
 
저자는 "예수회는 끊임없이 지역 문화를 탐구하고, 그 눈높이에 맞춰 복음을 재해석하고, 그들이 간직해온 전통적 종교 심성을 통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또 "이는 교회와 세상, 제국과 식민국가, 유럽인과 원주민, 선교활동과 문화교류 사이의 불편한 경계에서 세속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하느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적응주의 선교방식을 창안한 선교사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다. 하비에르는 일본에서 선교하던 중 한가지 깨달은 게 있다.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에 진리가 있다면 왜 중국에서 그것을 모르는가"라고 반문했다. 하비에르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생활풍습부터 사상까지 중국 영향권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영향을 받는 쪽이 아니라 영향을 미치는 쪽인 중국을 먼저 복음화해야 한다고 판단, 기수를 중국으로 돌렸다.


적응주의,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
 
적응주의 선교는 동아시아 선교 책임자 발리냐노를 거쳐 중국 명청시대 마테오 리치에 의해 꽃을 피웠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과 중국은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구조였다. 가장과 공동체 수장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래에서 무조건 따랐다. 아래로부터의 선교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선교가 더 적절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토착문화와 사상이 심오했다. 유럽의 우월주의적 태도나 강압적 선교방식이 먹혀들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황실에 들어가 그들 관복을 입고 상류층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질서와 생활풍습 구석구석에 뿌리박힌 유교사상은 서양 선교사에게 매우 낯설고 힘겨운 상대였다. 유교사상에도 유일하고 인격적이며 만물의 주재자로 간주되는 상제(上帝)와 천(天)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는 결국 유학사상을 가톨릭 시각으로 재해석한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에서 대화하고 문서선교를 했다.
 
하지만 적응주의는 선교방식은 1630년대 이후 중국 선교에 동참한 도미니코회와 작은형제회의 반발을 불러왔다.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은 미신이라며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이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100여 년간 격렬하게 대립한 의례논쟁이다. 또 문화적응 성격이 강한 터라 "선교가 아니라 문화교류"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위로부터의 선교'는 엘리트주의의 발로라는 비판도 받는다.
 
저자는 "적응주의 선교에서 드러나는 대화 방법 혹은 그 과정은 여전히 선교신학의 중요한 과제"라며 "적응주의 선교가 원칙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모두가 사는 길, 함께 발전하여 잘 사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8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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