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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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송해붕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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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9-12 ㅣ No.2018

[믿음과 은총] 하느님의 종 송해붕 요한 세례자 (1) 공깃돌 송해붕 요한 세례자

 

 

연구소로 출근할 때 매번 가슴속에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종 송해붕(宋海鵬, 1926-1950) 요한 세례자입니다. 고촌 천등고개에 위치한 미래사목연구소는 송해붕 요한 세례자가 총살형을 당한 곳과는 불과 100m도 안 되는 곳에 있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송해붕 요한 세례자는 1926년 당시 행정구역인 부천군 계양면에서 아버지 송희진(요셉)과 어머니 송예분(마리아)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1944년 인천 공립 직업학교(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덕원신학교로 편입합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동료 신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동료들을 위해 단식을 하고 성인전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1945년 조국의 해방과 함께 기쁨을 맞이했지만, 신학교 폐교로 송해붕은 일 년 남짓의 신학교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 계몽 교육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는 1946년 계양면 귤현리를 시작으로 교육 사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교육은 주로 저녁 7시~11시에 진행되었는데, 이 교육과 함께 학생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며,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참다운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끔 교육했습니다.

 

송해붕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공깃돌’로 소개합니다. “내 별명은 공깃돌이야. 공깃돌이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 아쉬운 때 갖고 놀고 싶은 만큼 갖고 놀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라는 의미지, 여러분은 이제부터 공깃돌 놀이하듯 나와 함께 신나게 공부해 보자.” 그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버려진 공깃돌이 될 때 하느님께서 값진 ‘진주’로 여겨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육 방법은 언제나 재밌고 명쾌하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아직도 그의 수많은 제자는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송해붕은 이어서 고촌면 신곡리 은행정과 누산리 공소(현 김포시 양촌면 누산리)를 쉴 새 없이 오가면서 공부를 가르치고 전교 활동도 왕성하게 펼칩니다. 이 활동은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소화해내기 어려울 정도의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늘어나는 학생으로 인해 고촌에 강당을 지으면서 계몽 교육과 복음 전파의 열은 더욱더 뜨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송해붕의 복음 전파의 뜨거운 열정이 절정에 다다를 때, 6·25전쟁 이후의 상황은 그를 순교의 길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2021년 9월 12일 연중 제24주일 인천주보 4면, 김상인 필립보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

 

 

[믿음과 은총] 하느님의 종 송해붕 요한 세례자 (2) 불꽃처럼

 

 

송해붕 요한 세례자의 복음 전파 열정은 끊임없이 성장했으며, 가는 곳마다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9월 28일 서울 수복이 된 다음 송해붕에게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시 공산 치하에 부역한 소위 ‘빨갱이’ 소탕작전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었습니다. 당시 『대한 신문』(1951년 7월 6일)에 나온 기사를 살펴보면, 고촌면 신곡리에 사는 일가의 밀고로 송해붕은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고 나옵니다. 그 원인은 한 일가가 6·25전쟁 이후 허다한 부역행위를 했는데, 그 범죄 사실이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벌어진 범죄행위였다고 합니다.

 

신앙적 측면으로 볼 때, 당시 증인들과 故 차동엽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고촌 일대에 송해붕이 가져온 복음 전파의 파급은 당시 그를 밀고한 일가와 유지들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만큼 큰 것이었고, 그가 그들 눈에는 눈엣가시로 작용해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송해붕 죽음의 이유를 ‘신앙 전파’로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민 계몽 교육과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은 송해붕은 철저하게 이런 사태에 희생양이 되었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순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후에 우여곡절 끝에 송해붕의 유가족은 그의 시신을 그가 죽은 천등고개에서 기적적으로 발견하고 여러 번 이장을 거쳐 고촌 성당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가족은 송해붕과 함께 묻혔던 많은 이들 속에서, 그가 늘 입고 있었던 검은 신학생복과 그가 지녔던 유리 묵주와 소화 데레사 상본을 통해 그의 신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시체와 함께 있던 널빤지에 하얗게 핀 눈꽃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때는 6월이었는데, 백장미의 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생전에 시계가 땡 하고 치면 일을 멈추고 기도를 드리면서 묵상하곤 했는데, 그때 “저도 세례자 요한처럼 목을 바치겠습니다. 요한처럼 목을 베이소서.” 하고 기도했다고도 합니다.

 

송해붕은 이처럼 비록 스물넷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 열정과 주님 복음을 통한 진정한 삶의 길을 전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진정 살아서 성인이 되려고 노력했고, 많은 이가 천국 영복을 얻기 위해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현재 송해붕 요한 세례자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은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2021년 9월 19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인천주보 4면, 김상인 필립보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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