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강론자료

2023-11-19.....연중 제33주일,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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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3-11-18 ㅣ No.2405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잠언 31,10-13.19-20.30-31          1테살 5,1-6      미태오 25,14-30

2023. 11. 19.

주제 : 부자로 사는 사람과 가난하게 사는 사람

오늘, 연중 제33주일은 프란체스코 교황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기억할 것을 권고하신 날입니다. 세상에서 가난은 미덕(美德)이라고 말하지 않고, 좋은 일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은 우리가 삶에서 극복해야 하는 악한 모습입니다.

 

가난은 부자라고 말하는 모습보다 즐거운 일도 아니고,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 그 모습을 극복하거나 이기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황님은 오늘을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가난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피부로도 느끼고 먹거나 즐기고 살기가 힘든 몸의 가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인으로서 생각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가난으로서, 세상의 일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해서 하느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이나 뜻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드러나는 부자의 삶을 지향하는 잘못된 가난입니다. 제가 두 가지로 말씀드렸지만, 이 두 가지 가난은 권장할 만한 일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신앙의 의미와 세상의 의미를 함께 생각하여 알아듣는 방법으로 삶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물질의 가난에 관한 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질병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을 신앙인인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세상의 삶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벌어들인 돈을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내어놓아야 하는 일일까요? 우리가 사도행전에서도 보는 모습이지만, 그 일이 얼마나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돈이 없거나 부족해서 가난하게 사는 일이나, 내가 행동한 수고의 결과를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방법으로 움직이는 일은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 행동도 쉽지는 않습니다.

 

오늘 들은 복음은 탈렌트를 대하는 종들의 비유입니다. 서양 세계에서는 탈렌트를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표현하지만,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돈을 셈하는 단위였습니다. 여행을 떠나려던 주인이 종들에게서 무슨 능력을 보았기에, 담보도 없이 그 많은 돈을 주었겠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주었다는 5탈렌트 혹은 2탈렌트, 그리고 1탈렌트의 돈은 현실의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큰돈이었다는 것을 우리나라의 셈법으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하루 동안 버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으면서 20년쯤(=16.5*365)을 모아야 하는 돈이라고 하니, 예수님이나 복음사가가 과장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기의 돈을 대하는 종을 두말하지 않고 믿은 주인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상상하겠습니까?

(1탈렌트=100,000*6,000=600,000,000=6)(12/30)

가난한 이의 날을 말하는 것은, 부자의 삶이 잘못이고, 가난한 이의 삶을 칭송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난은 나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이 해결할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돕는다면, 가난을 벗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내가 그 사람에게 나를 위해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생각과는 다르게, 신앙에서 말하는 올바른 삶이란, 나의 삶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도움을 간절하게 청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악의 개념을 적용할 일은 아니지만, 나의 삶에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만심을 드러내며 사는 부자의 삶은 권장하지 않을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일은 좋지만, 하느님의 앞에서도 자기만을 아는 부자의 삶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가난한 이의 삶을 잘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살이에서는 여자는 고생하고 남자는 편하게 살아도 괜찮을까요? 구약성경의 말씀을 대하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에서 생기는 문제는 부부로 사는 사람이 한마음으로 헤쳐야 하는 문제인데, 우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경쟁하는 관계로 해석하여 잘못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든지 하느님이시든지 나를 믿어주는 마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삶에서 다른 사람도 생각하여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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