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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50주년 맞은 프라도회 리옹 국제본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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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22 ㅣ No.321

창립 150주년 맞은 프라도회 리옹 국제본부를 가다


‘가난한 사람의 복음화’ 위해 전세계서 활동

 

 

프라도회 본부 경당 외관.

 

 

1850년경 프랑스의 리옹. 화학 금속공업과 함께 철강 공업이 급성장하게 되자 시골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리옹 변두리에 속하는 라기요티에르 지역은 이러한 도시 빈민들의 주요 거점이었고 술집과 카바레 등이 들어서면서 유흥 빈민가의 이미지로 떠오른 대표적 장소였다.

 

과도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도시 빈민들, 교육은 고사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 빈민 노동자들의 주머니 돈을 노리는 유흥시설들, 가난은 넘쳐나고 희망의 뿌리는 보이지 않았다.

 

1850년 5월 사제서품 후 이 지역 본당 보좌신부로 발령받은 새 사제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 비참한 지역민들의 현실에 눈 뜨면서 ‘가난함’의 의미를 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1856년 성탄절 밤 구유 앞,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육화의 신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인간을 지극히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특별한 회심을 경험했다.

 

이후 1860년 12월 10일, 그 동네에서도 ‘저급’에 속했던 카바레 ‘프라도’(Prado)’는 가난함을 살고자 하는 사제들의 거점으로 변신했다. 슈브리에 신부가 이를 매입함으로써 ‘가난한 사제단’의 공식적 탄생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프라도회’ 명칭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카바레 프라도 매입후 슈브리에 신부는 회심의 구체적 실천을 길거리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신앙 교육에서부터 시작했다. 당시 8살 정도부터 공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어린이들을 받아들였고 또 시골에서 상경, 미사 참례 시간도 없이 시장으로 공사판으로 일을 나가야 했던 청소년들과 삶을 나눴다. 특히 아이들이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도록 이끌면서 그 과정을 통해 글을 깨우치게 하고 교육 받도록 했다.

 

창립 150주년의 해를 맞고 있는 프라도회 국제 본부는 리옹 변두리 뒷골목 그곳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카바레 건물은 남녀 청소년들의 기숙사, 경당, 집무실, 사제관 등으로 개조해 사용됐는데 그 모습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철저한 가난의 삶을 살고자 했던 슈브리에 신부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었다.

 

프라도회 창설자 슈브리에 신부의 흉상. ‘오직 성인들만이 세상을 쇄신한다’는 글귀가 흉상 전면에 새겨져 있다.

 

 

슈브리에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는 ‘가난한 사제 양성’의 독특한 교육학을 고안, 자체적인 사제 양성에도 힘쓴 것으로 알려진다. 1865년 소신학교를 프라도에서 개교했는데 그 모습도 본부 건물에서 더듬어 볼 수 있었다.

 

1877년 마침내 4명의 신부가 사제품을 받음으로써 사제 양성의 결실을 보았던 슈브리에 신부는 이와 함께 가난함의 사목을 나누기 위해 사제들을 찾아 뜻을 모으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로부터 150년이 흐른 2011년 현재, 슈브리에 신부를 따라 ‘프라도회’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은 50여 개국 1250여 명의 숫자로 늘어나 있다. 또 평신도들로 구성된 프라도 형제회, 프라도 수녀회 등 함께하는 가족들도 구성돼 활동 중이다.

 

현재 국제 본부 건물에는 총장 신부를 비롯 부총장 사무총장 프랑스 프라도회 책임자 등이 거주하고 있다. 프라도 대신학교가 있는 리모네에는 류달현신부(의정부교구), 김형진 신부(서울대교구), 박광훈신부(대구대교구) 등 3명의 한국 회원도 프라도회 국제양성 과정 참여를 위해 머물고 있다.

 

프라도회가 설립 이후 활동의 빛을 발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복구로 인한 현대적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사목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최근 들어서는 이주 노동자들을 비롯 중동 지역 등에서 폭력 테러 전쟁으로 고통 받는 각 지역교회 소외 계층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복음적 가난’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5년 고 이용유 신부의 서약으로 프라도회가 정식 활동을 시작했으며 회원들은 본당을 비롯 노동사목, 이주민사목, 신학교 사제양성, 사회복지, 병자사목, 학생사목 등 특수 분야에서 고유한 몫을 실천하고 있다. 양성 중인 회원을 비롯 1백여 명이 활동 중이다.

 

프라도회의 특징은 재속 사제회라는 점. 회원들은 소속 교구장 인사 명령에 따르며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배려를 하는 주교들을 돕는다.

 

 

[인터뷰] 프라도회 총장 로베르 다비오 신부


“자유로운 가난으로 주님 삶 실천”

 

 

로베르 다비오 신부.

 

 

프라도회의 영성은 ‘가난의 은총’으로 설명된다. 왜 가난함일까.

 

로베르 다비오 총장 신부는 “먼저 예수님이 가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삶을 닮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화두라면 가난하고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그들과 그 상황을 좀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로써 가난함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사제들을 쉽게 접하고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가난하다는 것이 힘들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결코 실패한 삶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의미의 가난은 자유로운 가난입니다. 가난이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보여준 가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가난의 의미는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집착하지 않는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가난이다. 다비오 신부는 물질이 넘쳐나고 있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극심한 현대 사회 안에서 신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프라도 회원들은 자발적 가난에 먼저 투신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물질적 가난뿐 아니라 영성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다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사회 안에는 사랑이 부족한 데서 오는 가난도 많은 듯 하다”고 피력한 다비오 신부는 “결손가정문제 · 이혼문제 · 독거노인 문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러한 현상 역시 포괄적인 가난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생전 슈브리에 신부의 책상과 기도처.

 

 

프라도회라는 존재가 그간 교회 안에 자리한 의미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다비오 신부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닐까 싶다”면서 “프라도회가 창설되던 19세기 당시 상황은 프랑스혁명 등으로 교회가 부정적 존재였고 ‘성경’을 보는 것조차 금기시되고 있었지만 슈브리에 신부는 말씀을 통해 일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150주년 동안 프라도회는 큰 조직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 속에 늘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 화두를 던져 주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더 잘 드러내고 살아가고 닮아갈 수 있는가’하는 것이 150주년을 맞은 프라도회의 가장 큰 도전이자 목표라고 밝힌 다비오 신부.

 

한국 회원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부유해진 한국 현실에서 사제들도 물질적 풍요로움을 쉽게 접하는 상황일 수 있는데, 단순하고 소박한 삶 등을 통해 반드시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의 삶을 보여주는 게 도전이고 비전’이라고 조언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주여성, 이주노동자 탈북자 등이 새로운 소외 계층으로 부상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른 새로운 가난을 도외시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본은 ‘말씀’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2월 20일, 리옹(프랑스)=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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