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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미신행위와 교회: 왜 미신행위와 우상에 빠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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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8 ㅣ No.770

[경향 돋보기 - 미신행위와 교회] 왜 미신행위와 우상에 빠지는가

 

 

“신부님, 하버드만 오면 인생이 다 풀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선 또 다른 시작이더라고요. 제 분야에 있는 수백 명의 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자기의 꿈을 좇아서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살아온 한 유학생이 제게 하소연하던 고백입니다. 학력을 유달리 중시하는 한국인들에게 미국 명문대 유학은 장밋빛 인생의 서막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학 과정을 제대로 마치거나 졸업하지 못하는 비율이 절반에 이를 만큼 불안정합니다.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

 

오늘날 우리 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회학자들은 세계화 시대의 우리 세계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봅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은 ‘합리성’을 근거로 확실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진보의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이성만을 강조하던 정신은 전통과 공동체와 다양한 가치를 급격히 해체시켜 왔습니다. 예컨대, 구교우들은 저녁에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했지만, 오늘날 신자들은 각자의 합리적 목적에 합당해야 한다는 이유로 뿔뿔이 자기의 삶을 살아가지요.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마저도 몸과 마음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합리적 판단’을 빌미로 ‘자식이 다 큰 다음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들도 많아졌지요.

 

근대사회의 합리성은 특별히 종교나 전통을 대신해서 ‘과학’을 통한 진보를 믿어왔습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연장된 것은 이를 반영하지요. 하지만, 인간의 삶이 과연 더 행복해졌나요? 원자력 기술로 전기를 더 많이 소비하지만, 핵폭탄의 위험뿐 아니라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인류에게 재앙과 멸망의 그림자를 늘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과학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 과학주의마저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신념이며 이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진보’를 가장했지만 실존적인 불안이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이 세상은 ‘위험 사회’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시장’만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가치마저도 시장 경쟁력으로 다 판단해 버리는 ‘시장 ? 우상숭배’가 판을 치고 있지요.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구실로, 누구는 ‘정규직’으로 다른 누군가는 ‘비정규직’으로 차별하고,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해고’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중년에 해고나 퇴직을 맞은 인생은 얼마나 큰 불안과 두려움에서 재기를 준비해야만 할까요? 그런 무한경쟁의 시장에 들어서고자 대학생들마저도 이제는 ‘취준(취업준비)’만이 인생의 절대 명제인 양 끊임없는 불안감 속에서 ‘자기계발’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학점 관리를 하고, 해외 연수도 하고, 자격증도 따야 하고, 인턴 실습도 해야 합니다. 또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몰라서 불안에 떨며 눈물을 흘리는 많은 학생들을 제 주변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끊임없이 계발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를 강요당하는 이런 세상을 ‘피로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대학생들은 ‘헬조선’이라고도 부릅니다.

 

요컨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그다지 합리적이거나 진보한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불확실성이 가득한 위험 사회, 실존적 피로감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피로 사회의 모습이 우리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감의 난관을 헤치려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에서 불안감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이 험난한 난관을 어떻게 바라보며 헤쳐 나가고자 할까요? 어떤 이는 사주나 토정비결, 운세, 궁합, 점성술 등을 알아보려고 사주 카페나 철학원 등을 방문해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는 흔히 미신이나 우상숭배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당위적인’ 교리로 제시하지요.

 

그런데 저는 ‘지식, 문화 사회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현상을 분석해 보고, ‘미신 또는 우상숭배’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더욱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성찰하도록 제안하고 싶습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사주나 토정비결 등이 기초하고 있는 주역의 음양오행설이라든가, 서구 사회에서 전개되어온 점성술 같은 원리는 일종의 ‘전통 문화’에 기반한 특유한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특정한 문화 안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징과 의미를 해석하는 하나의 지식체계인 셈이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커다란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 전통적인 세계관은 흔히들 전(前) 과학적인 차원에 머물기 때문에, 해석하는 사람의 권위와 주관이 많이 반영될 수 있으므로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객관성이 떨어지니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고 그때그때의 상황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를 상쇄시키는 장치가 기괴한 도사 같은 용모에서 보이는 ‘신비적 이미지’를 통한 ‘신령함’의 담론입니다. 무엇인가 일반인과는 다른 권위적인 분위기를 내풍기며 확신에 찬 강한 어조를 내던져야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뭔가 다른 신념을 줄 수 있어 보이기 마련이지요. 더욱이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고 장사가 잘 되게 하려면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신성함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는 진리를 깨닫고 향유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실제로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세계관들은 ‘결정론’의 사고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결정론이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특정한 원리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과 행복이 모두 결정된다는 논리이지요.

 

관점은 운명론과 같은 ‘폐쇄적인 세계관’에 인간의 사고를 가두어버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함으로써, 자유롭게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은총도 결과적으로 거부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을 공부한, 신령하다고 소문난 한 역술인이 말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운세와 팔자를 말하는 것은 기껏해야 40%의 성공률이라고 단언하면서 본인의 마음가짐과 노력이 이를 보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꽤나 우습지요. 확실성과는 거리가 먼 낮은 확률을 믿게끔 하고, 결국에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게 정답인 셈이니까요.

 

실제로 주변에서 ‘궁합’이 좋아 결혼했다고 해서, 서로에 대한 희생과 헌신 없이 부부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평생 행복하기만 한 부부를 여러분은 본 적이 있나요? 부부 간에 자식 문제나 돈 문제 또는 집안 문제로 다툴 수 있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자기의 관점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희생과 사랑 없이 ‘성가정’은 결코 이루어지기 힘들잖아요?

 

 

삶의 확실성을 보증해 줄 것을 찾아

 

이제 우리 삶의 자리를 더욱더 실제적으로 성찰해 봅시다. 여러분은 과연 미래의 불확실성을 없애줄 그 무엇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여러분들은 자녀의 장래나 앞날의 노후를 어떤 방식으로 확실히 보증받고자 합니까?

 

유교적 계급사회에 뿌리를 두고 무한경쟁의 사닥다리에서 더 높이만 올라가려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학력’을 지나치게 중시하지요. 혹시 학력과 학벌만이 확실성을 보증해 준다고 지나치게 믿는 것은 아닌가요? 명문대 입학도 바늘구멍 같지만, 취직도 쉽지 않은 판국이니 ‘학력과 학벌’이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주요 변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적으로 타당해 보이지요.

 

그렇다고 ‘학력과 학벌’만이 절대적이며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그것 또한 ‘학력 ? 우상숭배’가 아닐까요? 혹시 학력을 통해 높은 신분 상승과 더 많은 고액 연봉만이 불확실한 앞날을 보증한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신념체계에 관해서도 더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의 확실성을 위해서는 ‘사업 성공’이나 ‘취업’이, 무엇보다도 ‘돈’이 중요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려면 물질적인 요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론은 개개인이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땀 흘려 노동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면 인생이 확 풀려버릴까요? 안타깝게도 일확천금하게 된 이들 중에는 인생을 불행하고 불쌍하게 마감한 사례가 많다고 하지요. 제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인생의 참된 의미와 행복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그렇다면, 과학과 같이 전문화된 현대지식이 우리 삶의 확실성을 보증해 줄 수 있을까요? 어느 분야에서건 ‘지식’의 유용성은 경험적으로 규정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갖기 마련입니다. 컴퓨터나 인터넷에 필요한 지식, 각종 자격증을 얻어내는데 필요한 지식, 암환자에게 필요한 의료 지식 등은 ‘도구적’인 차원에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도구적 지식의 유용성은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지식체계로 말미암아 늘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또한 삶의 목적에로 우리를 이끌기보다는 삶의 쳇바퀴 안에서 우리를 가두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말기 암환자를 병원에 모시고 인위적으로 연명하며 신약(新藥) 처방을 기다릴 수는 있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마주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요컨대, 학력도, 돈과 성공도, 과학과 전문 지식도 우리의 삶과 미래의 확실성을 그 자체로 보증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세상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찾는 것, 하느님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에서 미래의 확실성을 보증받으려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우상(idol)이란, 참된 하느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절대시하는 믿음이지요. 이 우상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대학에 가고 돈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구하며, 물질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집단 강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상과 미신에 빠지지 않고 참된 신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를 내맡기고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이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 곧 성경의 의미로 ‘죄인’이라는 걸 하느님 앞에서 인정할 때, 우리는 세상적인 그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확실성’을 보증받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우리 인간은 삶의 질곡 안에서 희로애락을 겪는 존재지만 하느님 없이 자신과 세상 안에서 ‘확실성’을 소유할 수는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일상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번뇌, 불안과 두려움의 자리에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폐쇄적이거나 결정론적인 신념체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불안감이 가중되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교회는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안에서 서로서로를 인내하고 용서하며 신뢰함으로써,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의 삶을 내맡기고 더불어 삶의 여정을 걷는 순례자들의 공동체입니다.

 

* 오세일 대건 안드레아 - 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미국 보스턴칼리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오세일 대건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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