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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문영인: 궁녀에서 오롯이 주님 섬기는 신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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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2 ㅣ No.469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3) 문영인 : 궁녀에서 오롯이 주님 섬기는 신자로


기도생활 전념한 동정녀 끝까지 신앙지킨 순교자

 

 

1801년 신유박해 전후 천주교 여성들의 신분은 거주 지역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지만 서울ㆍ경기 지역과 전라도 지역에는 주로 양반 가문의 여성들이 많았다. 또 과부와 동정녀들이 여성 신자 수의 3분의 2가 넘을 만큼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여교우들이 전통적 유교 사회의 관습을 떠나 복음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법을 깨닫고 실천했던 존재였음을 증거하는 수치이다.

 

신앙을 통해, 신앙을 위해 시대의 관습을 뛰어넘은 여교우들 가운데 궁녀출신 동정 순교자인 문영인 비비안나의 생애를 정리했다.

 

 

생애

 

문영인(비비안나, 1776~1801년)은 한양에 사는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주 예뻐 7살 되던 해인 1783년에 궁녀로 선발돼 궁중 예법을 배우며 성장하게 됐다. 15살이 되자 머리를 올렸고, 글씨를 잘 써 문서 일을 맡아 했다.

 

궁녀들은 저녁이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다과를 나누며 소일했다. 문영인도 여느 궁녀들과 다름없이 저녁마다 동기들과 어울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경련이 일어나면서 전신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응급치료를 다했으나 호전되지 않고 병세가 점점 심해져 21살 되던 해인 1797년 궁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가에 머물면서 치료에 전념하던 문영인은 실을 팔러온 김섬아(수산나)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후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에 대해 알게 됐고, 교리를 더 깊이 배우기 위해 강완숙의 집을 찾아갔다.

 

강완숙은 문영인을 보자 대수롭지 않게 대하면서 "그렇게 잠깐 왔다가면서 교리를 배워봐야 유익하지 않다"며 꾸지람만 했다.

 

문영인은 그후 강완숙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는데 얼마 후 강완숙이 만날 것을 청해 집으로 갔다. 문영인은 이 때 강완숙의 집에서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처음으로 만났다. 주 신부는 그에게 천주교를 열심히 믿으라고 권고했다.

 

그 뒤 문영인은 강완숙의 집을 드나들며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1798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비비안나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강완숙 집에는 윤점혜(아가타)를 중심으로 동정녀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는데, 문영인도 그 일원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문영인은 병이 완쾌돼 다시 궁궐로 들어가야만 했다. 궁궐에선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기가 몹시 어려웠다. 문영인은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기도생활을 했다. 그러는 사이 궁녀들 사이에서 그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소문이 퍼져 1798년 제명돼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 후 어머니 반대에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던 문영인은 이듬해 집안에서 쫓겨나 청석동에 따로 집을 마련해 살게 됐다.

 

문영인은 이때부터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데만 노력했다. 성인전을 즐겨 읽으며 그들을 본받아 순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늘 기도했다.

 

교회를 돕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청양에서 박해를 피해 한양으로 무작정 올라온 최인채 내외를 거뒀고, 1800년 여름에는 강완숙의 요청에 따라 두 달간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회장에게 집을 빌려 주기도 했다. 또 자신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소개했던 김승정의 어머니 김 수산나와 함께 주문모 신부를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문영인은 피신하지 않고 집에서 순교할 때만을 기다렸다. 그를 체포한 포졸들은 궁녀 출신임을 알았기에 포도청으로 끌고가 더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문영인은 여러 차례 극심한 주뢰형을 받고 참다못해 잠시 배교한다고 했으나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돌이켜 보건대 입으로는 배척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실제로 배척하지 않았다"며 배교를 철회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형조에서는 문영인의 마음을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문영인은 1801년 7월 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5살 동정녀였던 그는 포도청에서 주뢰형을 받을 때 다리에서 흘려내린 피가 꽃으로 변했고, 참수 때에는 목에서 젖과 같은 흰 피가 솟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철저히 하느님 중심적 삶을 산 여성

 

문영인은 궁녀였다. 누구보다도 조선의 법도에 대해 잘아는 그였다. 하지만 그는 교회 일이라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헌신하는 여성이었다. 그는 신여성이 아니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고, 가부장적 사회 제도의 탈피를 위해 앞장선 여성도 아니다.

 

그의 생활은 철저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다. 그의 삶을 전환시킨 것은 '세례'였다.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는 궁중의 폐습을 탈피해 기도생활에 전념했다. 또 그는 입교 후 주문모 신부를 수발하는 일을 맡아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리스도와 일치되길 갈망했다. 그 갈망은 '동정'과 '순교'를 염원하게 됐고, 교부 히폴리투스의 고백처럼 성체를 영할 뿐 아니라 성체와 일치하여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순교했다.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듯 조선 후기 탈성리학적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사회적 모순을 자각하고 중세체제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사상을 찾았기에 삶의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적 기반을 둔 삶은 조선 여성들, 특히 동정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여교우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 윤리 가운데 군신, 부자, 부부 관계에 대한 삼강의 윤리를 강조했다. 사회 전체가 최고의 윤리 가치를 효와 충, 열에 두어 효자와 충신, 열녀를 사회적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포상하고 장려했다. 문영인은 궁중 문서를 담당한 궁녀로서 조선 사회의 근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문영인은 천주교 신앙을 통해 모든 인간은 인격을 갖고 있으며 남녀의 성별이나 신분의 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는 신앙을 통해 깨달은 새로운 삶을 즉각적으로 실천했고, 자신과 다른 신분의 여성들과 함께 초기 수도 공동체 형태의 생활을 했다.

 

이처럼 문영인은 신앙을 통해 사회적 신분 평등뿐 아니라 경제적 평등까지 구현한 시대를 뛰어넘는 여성이었다.

 

교회는 부활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의 희생제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철저히 일치하려 했던 그의 삶을 본받기 위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하고 현재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평화신문, 2007년 9월 1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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