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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성령칠은4: 효경의 은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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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49

[성령칠은 제4강의] 효경(孝敬 piety)의 은혜 (1) (9월 6일 주일 오후)

 

 

(로마 8:14-17)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효경이라는 성령의 선물은 형제적인 사랑으로서 즐거움을 준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친밀하고 다정하고 연민에 가득한 것이다. 우리는 세련되고 기계화되고 컴퓨터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애정과 다정함의 자리가 없다. 큰 정거장에 가면 사람간의 접촉이 아니고 단추만 눌러서 표를 산다. 점점더 현대 사회가 기계화되어 간다. 심지어 노동자들조차도 기계 때문에 밀려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정을 무척 갈구한다. 이것이 마음의 근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가 비인간화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좌절감과 혼란을 준다. 때로는 폭력적이다. 훌륭한 가정에서조차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아주 작다. 어린이를 탁아소나 유아원에 가능하면 빨리 맡겨 놓고 “아! 내가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이가 유치원에서도 돌아와도 부모가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집에 방치된다. 텔레비전 앞에 있게 된다. 아이의 사랑의 욕구를 가라앉히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애정이 주는 안정감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전기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으로는 애정을 주고받는 관계를 배우지는 못한다. 어른들도 안정감을 찾는다. 사회적인 안정을 찾고, 경제적인 위기가 생기면 다른 안정 장치를 찾는다. 우리가 물직적인 안정을 찾는 한, 인간의 근본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세상적인 안정을 얻어 보려고 재산을 모으고 보험에 가입하지만 자신의 안정을 잃어버린다.

 

아우스티누스 성인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안착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산다. 인간의 삶은 점점 정이 없어져 간다. 우리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 경제적인 성장을 꾀하지만 실재로는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인간은 더 좋은 세상을 가꿀 필요가 있지만 물질적인 것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편안하게 느끼는 그런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종종 절망하는 경향이 있다. 애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것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다가 안되면 실망하게 된다. 현대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더라도 하느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예언자 에제키엘의 환상에 대하여 묵상하기 바랍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 대한 환상입니다.

 

에제 37장 4-15; (에제37: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6)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8)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9)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 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15)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마른 뼈들이 흩어진 환상을 본다. 마른 뼈들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인간성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이다. “이 뼈들을 보느냐? 이 뼈들이 살수 있겠느냐?” 인간에게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합니다. 나는 “내가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으면 너희가 살 것이다”고 한다. 이 숨결은 마른 뼈들을 다시 창조하는 기운이다. 처음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서로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긴다. 아직은 숨이 없다. 하느님의 숨결이 뼈들 안에 들어가니까 생명이 생기고 일어선다. 큰 무리를 이룬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반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너희는 내가 야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살아 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이 남편이 되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되리라.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파견되셨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호칭하게 하신다. 이것에 관해서는 내일 다시 봅시다. 오늘은 그냥 구약만 봅시다. 놀라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느님의 능력이 피조물 안에 드러난다. 각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시편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보고 찬양하라고 한다. 오늘 아침 기도의 성무일도 첫 시편은 하느님의 능하심을 노래하고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분의 사랑의 선물에 대하여 찬양하라고 한다. 사랑의 메시지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의 꽃송이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어린아이도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임을 볼 수 있다. 우리 형제 자매들도 하느님의 선물로서 우리를 매혹시켜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아씨시를 좋아합니다. 그분은 모든 것에서 친밀감을 표현하는데, 누이 물, 형제 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느님 가족의 선물이고, 피조물은 가족들에게 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이 온 누리를 채우고 있다. 시편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 역사 안에 가득하다고 노래합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또 모세를 좋아한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끌려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매혹된다. 모세는 하느님의 빛으로 빛나게 된다. 그는 산에도 가고 만남의 장막에도 들어가고 하느님께 이끌려 간다. 하느님은 모세와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이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신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아버지와 같다”고 말했다. 

 

호세아 11장

 

[(호세11:1)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바알 우상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3)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4) 인정으로 매어 끌어 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우리를 향해서 허리를 굽혀서 당신께로 이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이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감동을 주었다. 성녀는 “스스로 하느님께로 갈 수 없다”고 깨달았고 하느님이 자신을 아기처럼 앉고 가신다고 믿었다. 데레사는 효경의 모범이다. 아기와 같은 큰 단순성과 신뢰가 근본적인 효경의 태도이다.

 

(이사49:15)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49:16) 너를 나의 두 손바닥에 세겨놓았고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내 눈앞에 있다.

 

우리 이름은 하느님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열정적인 남편으로 묘사한다. 나는 너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이스라엘의 정녀야 내가 너를 가장 좋은 옷으로 입혀 주겠다. 아내의 불륜을 잊어버리고 다시 아름답게 회복시켜 주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불충한 아내를 용서하여 이끌어 가는 남편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이다. 내가 야훼 하느님임을 알고 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리라. 네가 하는 모든 것을 용서함을 알게 되리라. 예수님은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하신다. 탕자의 비유에서 그렇게 하신다. 당신의 자녀를 다시 형성시킨다. 탕자는 아들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품꾼으로 써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아빠라고 부르도록 아들로 회복하신다. 좋은 옷을 입혀 주신다. 이것이 성서의 주제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꿰어 내신다.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게되면,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말하게 하겠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어진 목자로 묘사한다. 나는 내 양들을 내가 보살피겠다.

 

(에제34:12)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오리라. (에제34:15)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에제34:16)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34:17)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수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에제34:20)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몸소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

 

내가 양들을 다 구해 내고 희생된 양들을 돌보겠다. 양들 사이를 판결하여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하겠다.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은 한 백성을 만든다. 내 영을 불어넣어 주어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리라. 나는 너의 것이고 너는 나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많은 성서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의 계약에 충실하고, 사랑의 줄로 묶어 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충실합니다. 우리는 걱정되거나 좌절할 때에도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힘이며 평화이다. 오늘 저녁에 단순하게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성녀 데레사가 이끌렸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단순하게 “아빠”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복음적인 중요한 자세이다. 주님께 나가서 우리의 걱정이나 긴장을 다 말씀드릴 수 있다. 하느님 앞에 신뢰하는 어린이처럼 나아갈 수 있다. 게으르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용기와 평화를 발견하시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인간의 사랑을 당신의 손에 새겨져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다. 단순하게 우리를 새롭게 합시다. 우리 자신이 불충할 때라도 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새롭게 한다. 당신 용서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당신의 충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것만이 우리를 평화로 이끈다. 각자 묵상합시다. 성모송으로 끝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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