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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29년 감천리 신자묘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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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12 ㅣ No.61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산 이와 죽은 이의 만남 - 1929년 감천리 신자묘지 시작

 

 

동학혁명 직후 한국을 답사한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을 ‘무덤의 나라’라고 했다. 가난해서 평생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 살던 사람도 죽은 후에는 양지바른 곳에 모셔지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했다. 이러한 묘지는 산 이와 죽은 이가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고, 또 그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공간이다.



신자들 함께 잠들기를 꿈꾸다

교회는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곳인 성당과 함께 신자들의 묘지를 ‘거룩한 장소(locus sacer)’로 규정해 왔다. 교회의 교도권자는 그래서 교회묘지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도 그러했다. 일제는 한국을 병합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전개하면서 임야법, 묘지법 등을 만들어 한국인의 생활을 규제했다. 묘지에 대한 신법을 접하면서 드망즈 주교는 1913년 남산동에 성직자묘지를 마련했다. 주교는 또 신자들도 새 법을 활용하여 국유지를 양도받아 교회묘지를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랐다. 주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성당의 묘지 크기를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최대 2평으로 정하고자 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그 안식처의 크기를 동일하게 정하고자 했다. 이 묘지는 죽은 신자들이 세상 종말 때까지 함께 쉬다가 공심판 때 일제히 부활해 함께 천국에 들어갈 장소였다.

그러나 대구대교구의 교회 묘지는 1929년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계산성당에서는 본당의 신자활동이 강화되면서 교회묘지의 조성을 서둘렀다. 그 결과 달성군 성서면과 월배면과의 경계지점인 본리동 前山(감천리, 현 월성성당주변)에 교회묘지를 마련했다. 묘지는 본당 단체였던 친애회와 인애회가 5백 원씩을 기금으로 출연했고 유지 신자들이 헌금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이 일에는 김봉삼, 이영언, 유윤옥, 최정복, 김상옥, 최복만 등이 앞장섰다. 이어 1937년 인접 산을 매수했고, 1950년 월배 상동산에 증설 확장하여 대구의 각 본당 신자들도 이곳을 영면하는 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1932년 이곳에는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치명한 허인백, 이양등, 김종륜의 세 순교자 유해가 오게 되었다. 이들은 병인박해 때 경주 산내면 범굴로 피신해 살다가 경주 포졸에게 체포되었고 결국 울산병영으로 옮겨가서 치명했다. 이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가 수습하여 형장 근처의 다리 밑에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온 뒤 진목정 안산에 합장했다. 진목정 교우촌에는 그때까지 김종륜의 친족인 김준년이 살았고, 허인백의 후손은 대구에 살고 있었다. 허인백의 손자 허명선과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은 드망즈 주교와 계산성당 페셀 주임신부의 허가를 얻어 순교자 유해를 감천리 교회묘지로 이장했다.

신자들은 세월이 어려울수록 순교자로부터 신앙을 격려받고자 했다. 서정도 신부는 교회가 민족과 함께 수난을 겪고 있던 1944년 일제 말기에 이 묘들 앞에 순교비를 세웠다. 또 휴전을 맺은 직후인 1954년에는 계산성당 이철희 신부와 신자들이 이곳에 루르드 성모상을 세우고 축성했다. 1962년 순교자들의 유해는 성모상 앞으로 옮겨졌다. 루디 크라네비(서기호) 신부는 학생을 중심으로, 11월 위령 성월에 감천리 묘지로 가는 순례운동을 하기도 했다. 세 순교자의 유해는 1973년에 이창호 신부와 최해달 등에 의해 복자성당에 모셔졌다.
 

군위 가톨릭묘원 - 성소를 후원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감천리 교우 공동묘지는 거의 빈자리가 없게 되었다. 1963년 교구 이사회에서는 내당동의 산을 팔아 대구시 범물동과 경산군의 경계임야에 묘지 신설을 결의했다. 박상태 계산성당 주임신부가 묘지를 조성했고, 1965년 서정길 대주교가 묘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여기서 대주교는 “이곳에 묻혀 공심판을 기다리는 수많은 연령들을 위해 기구할 것을 잊지 말자.”고 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기를 강조했다. 이 범물동 묘지는 묘 앞에 십자가가 없다면 거의 일반 공동묘지와 별다름이 없다. 묘의 형태도 제각각이다. 계산동 신자였던 서상돈과 그 일가의 묘도 또한 교회묘지 바로 옆에 있다.

한편, 감천리 묘지는 또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한주택공사가 시행한 대구 월성택지개발사업지에 감천리 묘지 가운데 약 4만평이 편입되었다. 교구는 대토와 이전 보상금을 받고 감천리 묘지를 군위로 이전했다. 1989년부터 이듬해까지 약 5천기의 분묘가 군위묘원으로 이장되었는데, 무연고 분묘는 납골당에 모셨다. 택지개발 사업지에 편입되지 않은 대구. 달서구 월성동 지역에는 일부 분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보상받은 재정은 장애자 시설인 고령 성산의 국제재활원, 반야월의 일심원을 인수 운영하는 등 복지사업에 환원 투자되었다.

군위묘원은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산들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곳이다. 어쩌면 그리도 넓은 터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대구교구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본당은 군위묘원본당이라고 했다. 그곳에 들어서면 그 말이 절로 생각난다. 군위읍 용대리는 이 묘원을 서양처럼 관광 공원화하면 마을 전체가 활성화되지 싶다. 군위묘원의 시작은 이성우 신부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71년 계산성당 보좌신부로 발령받았다. 이때 그는 감천리묘지 관리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감천리묘지는 초기 신자들의 묘를 무료로 관리해 오다가, 이때부터는 관리비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관리해야 할 묘의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제2보좌 김부기 신부와 함께 묘를 세러 나갔다. 그 결과 묘의 숫자도 장부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향후 묘를 쓸 자리도 충분치 않았다. 또한 그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도 나고 있었다. 그는 일년 후 잠시 자인본당을 거쳐 경주본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진목정에서 감천리로 옮겨간 세 순교자의 묘 자리에 가묘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까지는 순교자의 유해 이장을 목격했던 김회장 이하 노인들이 살아있었다.

이성우 신부는 1977년 주임신부로 계산성당에 다시 왔다. 이때도 그는 1년만 지내고 사무처장으로 가게 되었지만 그 짧은 기간 군위묘원의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감천리와 범물동 묘지가 다 차서 공동묘지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미 보좌신부일 때 느꼈던 문제였다. 그는 계산동 보좌신부로 오기 직전에 삼덕본당의 보좌신부(1969~1970)로 있을 때 조직되었던 성소후원회를 생각해 내었다. 교구에서는 1970년에 신자 한 명이 신학생 한 명을 책임지자는 성소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신학생 육성은 어려운 교회 살림 중에 제일 큰 비용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신학생 한명이 졸업할 때까지는 약 10만 원 가량 들었다. 물론 학비는 교황청에서 후원했기 때문에 순전히 신학생 생활비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자가 한 구좌 10만 원을 내는 회원으로 가입하고, 이 기금을 운영하여 신학생의 생활비를 감당하도록 했다. 돈을 모아서 불리는 방법은 삼덕동성당에 미사를 나오던 조동완의 아이디어였다. 신자 중에 금융계통 출신이 없었고 본당에는 아직 신용조합도 없을 때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그는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현 교보생명) 상무를 하다가 대구본부장으로 2년간 근무하던 때였다. 성소후원회는 대략 200명이 뜻을 함께 하여 호조를 띠며 출발했다. 그런데 당시 경제사정이 급변하여, 몇 년 못가서 신학생 생활비가 5배쯤 뛰었다. 그래서 한 구좌 가지고는 신학생이 두 학기밖에 공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금 회원의 모집에도 한계가 있게 되었다. 이에 모든 신자들이 교무금의 5%씩을 더 내자는 안이 나왔다. 이 안이 채택되고 성소후원회는 한일호텔에서 해단식을 가졌다.

이성우 신부는 성소후원회의 남은 돈으로 묘지를 사자고 제의했다. 그 돈이 기금이 되어 성소후원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은 모두 죽으니, 성소후원회의 돈이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드디어 이성우 신부는 서정길 대주교와 이문희 주교로부터 성소후원회의 남은 돈 4천만 원을 받았다. 그는 당시 계산동성당 연령회 김반석 회장과 함께 묘지를 보러 다녔다. 김반석은 김장수 신부와 김 아가다 수녀의 부친인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기도를 해서 ‘양찰(양철) 회장’으로 알려졌었다. 두 사람은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가 군위 땅을 보게 되었다. 교구는 그곳 땅 40만 평을 샀다. 점점 묘원확장을 추진하고 있으며 25만여 평의 부지를 1982년부터 묘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성우 신부는 보좌신부일 때 묘지 문제를 느끼고, 주임신부일 때 결국 새로운 묘지를 시작하는 길을 열었다. 지속적인 성소후원금을 창출하겠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군위묘원은 강제 폐교되었던 성유스티노신학교가 1980년 선목신학대학(후의 대구가톨릭대학)로 재개교할 때, 이의 수익용 기본 재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70년도의 성소후원회는 1985년 사제양성후원회로 재발족되어 활동하고 있다.

위의 감천리, 범물동, 군위묘원과 남산동 교구청 내 성직자묘지가 교구직영 묘원이다. 그 외에도 현재 열여섯 곳의 성당(비산, 칠곡, 신동, 청도, 경산, 영천, 하양, 금호, 성주, 가천, 고령, 죽도, 원평, 해평, 선산, 김천황금, 지좌, 왜관, 신동본당 등)이 교회묘지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오는 11월 2일에는 군위묘원에서 성직자묘역과 봉안담을 축성한다. 즉 지난날 성직자는 남산동, 신자들은 감천리나 범물동에 자리 잡았지만, 이제 군위에서 성직자, 수도자와 신자가 죽은 다음 함께 만나게 된다. 게다가 가톨릭 군위묘원 입구에는 김수환 추기경 이 유년시절을 머물던 집도 있다. 본래 군위묘원을 살 때는, 길이 없어 길을 내주겠다는 조건으로 매입했는데, 매도자에게 연고가 생겨서 결국 교구가 나중에 길을 내게 되었다. 이 길은 김수환 추기경 살던 집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은 부활을 기다리는 성직자와 신자뿐만 아니라 이곳 출신인 김수환 추기경도 함께 만나는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한 마디라도 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진솔한 만남의 순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도움 : 이성우 신부, 정기원, 황인기, 신동호, 교구공문집)

[월간빛, 2013년 1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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