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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잉보호: 콩나물 기르기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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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1 ㅣ No.373

과잉보호 - 콩나물 기르기의 비유

 

 

콩나물은 원래 콩이 자라서 갖추게 되는 꼴에 비해 기형으로 생겼다. 그것은 콩으로서의 특성으로부터 가능한한 멀리 떨어진 모습이다. 그래서 콩나물과 소나무의 초기 형태 사이에는 별차이가 없다. 그뿐 아니라 콩나물은 식물의 테두리를 벗어나 동물의 초기 형태와도 비슷한 데가 있다. 생물책에서 정충의 모습이라든지 올챙이의 생김새를 보면 콩나물과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콩나물은 모든 생물체의 초기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그만큼 가장 덜되고 미개발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생물의 대표격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콩나물 기르는 방식을 지켜보아야 한다. 우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 다음 빛을 차단하고 무엇보다도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요컨대 일체의 자극을 가능한 대로 차단하고 콩나물 자체 내부로부터 오는 자극까지도 발휘할 기회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목마를 겨를이 없이 물을 계속 흠뻑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실뿌리가 나오지 않고 줄기 끝이 그냥 뿌리 역할까지 겸하는 기현상을 유지할 수가 있다. 결국 콩은 그 자체 안에 있는 생명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하고 차츰 그 능력까지 잃어 유약한 모습으로 기형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생명체를 일체의 스트레스 요인(자극과 고통)이 제거된 인공적인 공간에 두고 과잉보호를 해서 기른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콩나물인 것이다.

 

현대 자녀를 기르는 대다수의 세대들은 가난과 대가족 제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녀 하나하나에게 적절한 신경을 써주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다. 또 요즘 부모들은 바빠서 자녀들에게 적절한 신경을 써 주지 못한 죄책감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종의 보상심리로 애들을 무분별하게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애들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교육하는 일이라기보다 콩나물을 기르는 일이다. 그래서 콩나물처럼 유약하고 기형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나약한 인간을 기르는 꼴이다.

 

[이병호, 신앙인의 사색,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8년, pp.19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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