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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2: 앙리 드 뤼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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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28 ㅣ No.381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2) 앙리 드 뤼박 (중)

그리스도교의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 제시



칼 라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앙리 드 뤼박(오른쪽).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작업을 하면서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 등과도 만났다. 사진출처=www.karl-rahner-archiv.de


암흑기와 불교 연구 그리고 명예회복

「초자연성에 대한 연구」(1946)로 예수회 제재를 받은 앙리 드 뤼박은 예수회 총장의 지시에 순종하고 1950년부터 1959년까지 리옹을 떠나 파리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이 암흑기에 불교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 세 권의 책을 냈다. 「불교의 관점들 I」(1951), 「불교와 서양의 만남」(1952), 「불교의 관점들 II, 아미타불」(1955). 동양의 신비주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드 뤼박에게 인류의 영성사가 제공해주는 방대함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위대한 유일성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보편성을 확인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 사상를 숙고하게 했다. 1954년에는 교회에 관한 아름다운 저서 「교회에 관한 묵상」(Me'ditation sur l'Eglise)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지금도 인용되는 유명한 저서로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1958년 그는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60년 8월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으로 임명됨으로써 그의 사상은 교회로부터 공인받게 됐다. 그는 공의회 개최 기간(1962~1965)에 신학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의회 모든 문헌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 드 뤼박은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 등과도 만났다. 공의회는 계시헌장에 나타난 성경과 성전의 유일한 원천, 무신론, 교회헌장, 비그리스도인 선언 등에 그의 사상을 수용했다.


「교회에 관한 묵상」 책 표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드 뤼박은 공의회 결과로 설립된 교황청 그리스도교일치평의회 산하 '비그리스도교인의 사무국' 위원으로 5년간 활동했다(1969~1974). 이 사무국은 유다교를 제외한 타종교와의 대화와 우호적 관계를 위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공의회의 근본 정신에 대한 해설서를 내고 강연했다. 계시헌장과 사목헌장 등에 대한 그의 해설은 유명하다.

마침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2월 2일 드 뤼박을 이브 콩가르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의 깊고도 위대한 신학사상이 교회에서 정통한 것으로 공인받게 됐다. 그가 87세에 사제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신학적 공로 때문이다. 드 뤼박 추기경은 1989년 93세 때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역사적 상황과 주요 주제를 다룬 책을 발행한 후, 곧바로 몸이 쇠약해져 파리의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진 그는 1991년 9월 4일 생을 마감했다.


인품과 학문적 열성

앙리 드 뤼박과 함께 살던 동료와 제자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얌전하고 꼼꼼하며 신중한 성격이었다. 평생 연구에만 몰두했던 학자로서 공부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수도원의 공동 방에 동료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게 됐는데, 방을 나서려는 순간 드 뤼박은 라디오가 켜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라디오를 끌 줄 몰라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한다. 그가 유일하게 다룰 줄 알던 기계는 타자기뿐이었다. 드 뤼박의 제자로 은퇴 후 많은 신학책을 펴내고 있는 세스부에 신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주 뒷목 통증을 호소하면서 저녁이면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서도 쉬기는커녕 다시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려 동료들은 이런 그의 학문적 열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천재성은 탁월하다. 그는 많은 교부의 책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의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중요한 구절을 편지봉투 뒷면에 메모해 두곤 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세스부에 신부는 어느 날 그의 방에 들렀다가 글씨가 빼곡한 편지봉투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직접 타자를 치는 스승 앙리 드 뤼박을 봤다. 이렇게 탄생한 원고가 곧 책으로 발행된 것이다.

사실 그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교부의 글을 인용하고, 체계적인 목차도 생략하는 경우가 허다해 읽기가 지루하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지 않으면 무슨 주장을 펴는지 알기도 어렵다. 그저 한 주제에 대한 교부들의 진술을 모아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교부의 언급이 자신의 주장을 펴는 중요한 신학적 논거로 정리돼 있다. 드 뤼박은 또한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이유로 어떤 사상에 대해 단순화해서 말하기를 피한다. 그만큼 신중의 신중을 기한다. 이러한 학문적 열성과 철저함으로 그의 책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인용되고 재판되며 중요한 참고서가 된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프랑스 독자들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에 혀를 내두른다. 그의 문체는 프랑스어의 분위기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아 프랑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앙리 드 뤼박은 인문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초신학의 새 길을 열었다. 그는 역사와 타종교를 연구하면서 '그리스도 사건'의 위대한 유일성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졌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보편성을 확인했다. 【CNS】


작품세계와 신학적 공헌

그의 신학 작품세계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폭넓고 다양하며 심오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전집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출간했다(1979).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를 추모하는 국제협회가 생기면서 Cerf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오기 시작됐다. 총 50권으로 계획된 전집은 각 권이 600쪽을 넘는다. 현재까지 20여 권이 나왔다.

그의 작품은 주로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담아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를 제시한 것이었다. 유명한 작품은 인본주의 무신론,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론, 신학적 인간학, 초자연성, 교회론, 불교에 관한 연구, 테이야르 드 샤르댕에 관한 저서 및 당대의 신학자나 철학자(모리스 블롱델, 에티엔느 질송, 쟈크 마리탱)와 교류한 사상교류집 등이 있다.

그의 신학 전반에 흐르는 사상은 당연히 인류에게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새로움이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신비나 인간의 신비, 그리고 역사의 신비를 읽어낸다. 그의 신학적 독특성이 드러나는 작품과 신학적 공헌도가 높은 것만을 추려 소개하도록 하겠다.


프랑스 기초신학의 선구자

1929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리옹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교수 임용 기념 교내 학술대회에서 '신학과 호교론'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 그는 당시엔 생소했던 '기초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 신학의 변화와 쇄신을 예고했다. 그 당시 신학은 주로 호교론(護敎論)과 신학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호교론은 가톨릭 신앙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을 향해 제시하는 학문이다. 호교론은 신앙에 도전하는 유럽의 이성적 합리주의자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지, 왜 그리스도교 신앙을 참된 진리로 믿어야 하는지를 '순수 이성적으로' 제시하는 데 몰두했다. 반면, 신학은 일종의 교의신학으로서 호교론을 통해 믿음의 정당성이 제시됐다고 전제하고, 교회가 믿고 있는 교의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드 뤼박은 이러한 호교론과 신학의 '외재적 관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신학은 믿음을 전제로 하거나, 수동적으로 변론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봤다. 보다 적극적으로 왜 믿어야 하는지를(호교론) 믿음의 내용(신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 믿음의 내용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실천)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 뤼박은 1930년 '종교의 역사'라는 새로운 교과목을 맡게 돼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특히 힌두교와 불교에 심취했다. 사실 역사학의 발전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는데, 많은 경우 종교의 역사적 탐구는 본연의 학문적 특성 때문에 많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고유성과 새로움을 간과하고 심지어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상대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종교가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성에서 기원한다든가(심리학적 기원론), 사회와 문화의 발전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등종교로 발전해(사회-정치적 기원론) 훗날 없어질 것이라든가, 모든 종교가 근본은 하나라든가(신비주의적 관점) 하는 주장들에 맞서 드 뤼박은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을 역사성 안에서 고려하면서 그 고유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특히 1950년부터 불교에 대한 그의 심층적 연구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초월적 본성을 더욱 확신하게 했으며,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신비사상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데 노력했다. 이와 같이 드 뤼박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어떤 신앙신조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그리스도교 계시나 역사, 교회의 생활 전체를 일관성 안에서 다시 숙고하는 기초신학적 자세를 정초했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26일,
곽진상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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