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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통일사목] 민족과 국가가 함께하는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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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02 ㅣ No.876

[통일을 준비하며] ‘민족’과 ‘국가’가 함께하는 통일



분단국가의 딜레마

국가(체제이념)와 민족,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통일을 두루 생각하는 것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서 비롯된다. 체제가 서로 다른 두 국가이면서도 같은 민족이라는 남북관계의 이중성이 그것이다. 남북은 외국과의 관계처럼 독립적이고 서로 무관심한 관계가 아니라 상대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 관계이다.

1992년 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 전문은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이자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는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남북관계 규정은 남북의 현실적인 국가성과 명분적인 민족성 사이의 균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국가지향 가치와 민족지향 가치는 끊임없이 갈등의 양상을 보인다. 이상적, 규범적 차원에서 민족지향의 가치가 일정 정도 수용되고 있는 한편, 체제경쟁이라는 분단국가의 구조적 제약을 배경으로 국가지향의 가치 또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 담론, 나아가 통일개념 자체가 ‘국가중심의 시각’과 ‘민족중심의 시각’으로 서로 갈등을 빚고 대립하면서 남남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다. 민족성과 국가성의 대립은 분단국가가 가진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이 딜레마의 극복방향은 서로의 체제이념을 인정하면서도 같은 한민족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하면서 협력하고 소통의 역량을 증대시키는데 있다.

남북관계가 분단국가의 상호승인, 곧 국가관계의 정상화에서 출발해야 함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같은 민족임을 배제한 채, 남북관계를 일반적 국가 간의 관계로 여겨야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북이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관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체제이념이 다른 남북의 국가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분단된 두 국가의 실효적 지배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민족의 통일을 만들어가는, ‘민족’과 ‘국가’가 함께하는 통일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통일은 두 개의 분단국가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수립하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통일

‘민족’과 ‘국가’가 함께하는 통일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분단이 단순히 국가(체제) 간의 대립으로만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분단이 체제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는 ‘분단’을 내면화한 민족 구성원의 가치, 정서, 생활문화의 분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과 국가가 함께하는 통일논의는 단순히 두 국가나 체제를 하나로 통합하는 문제를 벗어나 민족 구성원의 몸과 마음을 소통하고 통합하는 ‘사람의 통일’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 간의 통일’론은 분단을 내면화한 믿음과 성향들 그리고 적대적인 사회심리에 주목한다. 분단의 적대성은 단순히 군사 정치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체와 마음을 통해 일상적 삶에 내면화되어 있다.

역으로 이렇게 내면화된 성향과 믿음, 적대적 사회심리는 분단체제를 강화한다. 남북의 주민은 자발적으로 서로 적대적 타자로 여김으로써, 분단의 상처를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 오히려 자발적으로 분단을 고착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

분단 70년이지만, 분단의 적대성은 집단 무의식으로 내면화되어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뿌리를 내린 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해방과 분단 70년을 맞이하면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남북의 적대적 관계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지난 몇 년 동안의 여러 사건은 냉전적 적대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동반한 이념대립, 비합리적 충동이 한반도를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과정은 남북주민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진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이다. 그것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구조적으로 제약하는 비합리적인 충동을 극복하고 남북주민의 민족적 열망을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에너지로 되돌릴 수 있는 방향을 찾는 일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 간의 통일’이라는 관점으로 통일논의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사람들 간의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정치경제의 통합을 떠받치는 바탕이자 통일을 진정한 사회적 통합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북 간 상호신뢰의 축적과 정서적, 문화적 소통, 그리고 분단 상처의 치유 없이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서로 다른 가치, 정서, 문화가 빚어내는 혼란과 파국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국가의 이념’과 ‘통일과정에서 공유해야 할 기본가치’를 구분해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사상이나 이념의 접근은 ‘사람들 간의 통일’이란 관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분단으로 조성된 냉전적 사고는 여전히 강고하며, 사상이나 이념의 대립은 합리적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도 비합리적 충동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이념이 대립하는 분단 현실에서 통일국가의 체제이념을 남북이 쉽사리 합의하기란 어렵다. 만약 남북이 서로의 체제이념을 통일국가의 최종형태로 여길 경우, 통일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남북 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 등 1990년대 이래 남북 합의문에서 보듯이, 통일국가의 최종 모습을 미리 정하지 말고, 각자의 체제에 충실하면서도 느슨한 결합부터 추진하자고 합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통일국가의 이념이 분단국가의 어느 한편이 자신에게 익숙한 가치들을 중심으로 제시할 때 그 이념은 다시금 분단의 적대성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에 대한 사상이나 이념의 접근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까?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통일국가의 이념적 가치’와 ‘통일과정에서 남북이 함께 공유해야 할 기본가치’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통일국가의 이념’을 미리 규정하고자 한다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은 배제될 수밖에 없으므로 통일지향의 연대적 관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가치체계를 통일국가의 이념적 가치로 미리 규정할 것이 아니라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란 남북의 이념과 체제를 인정하면서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말한다.

체제이념이 대립하고 있는 분단 현실에서 남북이 공유하거나 수렴할 수 있는 제3의 이념으로 흔히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분단 이전의 전통사상 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이러한 이념들이 남북 두 체제의 공통된 기반이 되거나 두 체제를 하나로 수렴하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 이념들 가운데 최소한의 공약수를 찾는 시도를 통해 어떤 합의를 기대하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비록 홍익인간 사상이 남북이 인정하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이라 할지라도 남북 체제이념, 역사관과 철학관의 차이로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으며, 따라서 해석상의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북 어느 일방의 가치체계에 근거하지도 않으면서, 이러한 제3의 기존 이념도 아니라면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할까? 그 핵심은 ‘통일과정의 기본가치’가 남북의 상호접촉 과정에서 공유하게 될 미래형성적 가치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크게 세 가지만 지적해 본다.


‘통일과정의 기본가치’ 수립의 세 측면

먼저 ‘통일과정의 기본가치’ 정립에서 중요한 것은 분단 이후 남북이 합의한 내용이다.

남북의 통일방안은 각자의 통일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공유하기는 어렵다. 통일은 어느 일방이 아니라 남북이 함께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분단 이후 남북의 당국자들이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공유한 합의문을 ‘통일과정의 기본가치’ 추출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물론 체제대립과 경쟁이 여전히 지속하고 있으므로, 그동안 남북이 합의문을 실천적으로 이행하지도 못했고, 또 자기방식의 상반된 해석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남북이 긴장관계를 완화하려고 그간 어렵게 구축한 통일의 기본원칙을 담고 있는 만큼, 다른 어떤 원칙보다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를 생각하는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는 인권, 평화, 생태 등 보편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데 있다.

통일은 한반도의 특수한 맥락을 지니지만,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와 인권, 생태적 가치와 결합할 수 있다. 인권, 평화, 생태의 보편적 가치를 통일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것은 체제중심의 관점이 아니라 인권, 평화권, 환경권 등 남북주민이 실질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의 관점에서 통일을 바라본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가 실현되는 과정은 분단 이후 남북 정부가 합의한 합의문과 달리 남북주민의 참여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다양한 영역의 남북교류와 소통과정에서 남북주민이 누려야할 보편적 가치의 권리들을 권리의 당사자들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는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의 화해협력과 상호소통, 남북관계의 진전과 맞물리면서 정립되어야 한다.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는 남북이 합의한 통일원칙의 실천적 이행뿐만 아니라 인권과 평화, 생태 가치의 실현이 남북관계 개선과 나란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통일과정의 기본가치’는 정부와 민간 차원의 남북 상호작용 과정에서 소통과 협력을 증진하면서 형성되는 동시에 소통과 협력을 위한 공통의 준거가 될 수 있다.

인권이든 평화든 각자의 가치체계의 틀 안에서 절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의 방향에서 유연하고 개방된 방식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권과 평화와 생태 같은 보편적 가치는 그것이 구현되는 구체적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는 남북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인권, 평화 등의 용어 자체에 대한 추상적 합의가 아니라, 서로의 소통과정에서 각자의 해석과 의미부여를 교환하면서 앞날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 이병수 - 서울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에서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8월호, 이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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