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모태 곰실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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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13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모태 곰실 공소

 

 

엄주언 마르티노의 선교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 이곳은 대룡산(899m)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농촌 마을이다. 곰실 · 웅곡(熊谷) · 고은동1)이라고 불렸던 고은리(古隱里)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공소가 있는데, 바로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모태인 곰실(고은리) 공소이다.

 

고은리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 것은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 1872-1955)에 의해서였다.2) 엄주언은 1872년 12월 10일(음) 강원도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1893년 늦가을에 맏형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증언3)에 따르면, 1894년 엄주언은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1894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신부, 즉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중에서 한국 성(姓)이 ‘목’인 신부가 없었기 때문이다.4) 증언자가 기억한 목 신부는 아마도 원주 본당(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2대 주임 리굴로(A. P. Rigoulot, 陸, 1873-1900) 신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굴로 신부가 한국에 입국한 시기는 1898년 1월5)이었기 때문에 그가 1894년 엄주언에게 세례를 줄 수 없었다. 요컨대, 세례를 받은 시기와 세례성사를 베푼 신부가 서로 맞지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엄주언이 1894년에 세례를 받았다면, 그에게 세례성사를 베푼 신부는 리굴로 신부가 아닌, 다른 신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가능성은 엄주언이 리굴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면, 그 시기는 1894년이 아니라, 그 이후라는 점이다.

 

엄주언이 1894년에 세례를 받았다면, 그에게 세례성사를 베푼 신부는 두세(C. -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두세 신부는 1891년에 설립된 약현 본당(현 중림동 약현 본당) 주임신부였다. 당시 약현 본당의 관할 지역은 서울의 사대문(四大門)을 기준으로 사대문 밖의 전 지역, 즉 도성 밖 인근과 경기도, 황해도 배천이었는데, 광주도 그 관할이었다.6)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두세 신부가 엄주언에게 세례를 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엄주언이 이굴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면, 그 시기는 1898년 7월부터 1900년 3월 사이였을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엄주언 가족은 1896년경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귀향한 지 2년 후인 1898년 7월, 리굴로 신부는 원주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00년 2월 공소 순방 중에 독감에 걸려 그해 3월 17일에 선종하였다.7) 그렇기 때문에 엄주언이 리굴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면 그것은 1898년 7월부터 1900년 3월 사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현재로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1896년경 엄주언과 그의 가족은 광주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천주학쟁이’라 하여 냉대를 받아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외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고은리 윗 너브랭이8)에 있는 폐가를 사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엄주언 가족은 화전을 일구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갔고, 그 결과 아래 너브랭이로 이사하였다. 엄주언은 마을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권장하였고, 강당을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갖추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신자들이 꾸준히 늘어 1920년 곰실 본당이 설립되었고, 1928년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후에도 올곧은 신앙을 보여 온 엄주언은 1955년 4월 30일에 83세로 선종하였다.

 


공소의 설립

 

엄주언의 선교로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곰실에는 언제 공소가 설립되었을까? 곰실 공소는 1900년경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원주 본당의 교세 통계표와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서 확인된다. 원주 본당의 1900-1901년도 교세 통계표에 처음으로 ‘곰실’이라는 명칭이 나온다.9) 그리고 1900년 11월 4일 조선 대목구장 뮈텔(G. -C. -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사목 순방10) 중에 곰실을 방문하였는데, 일기의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7시 40분에 곰실[春川]로 떠났다. 60리를 더 가서 춘천 강을 건넜고 기나긴 계곡을 올라가 산 하나를 넘어 40리 평야에 들어섰다. 이 평야 끝에 곰실이 있는데, 거기에는 큰 집 한 채가 있고 그곳에는 세 가족이 살고 있다. 오후에 모두 합해 10명에게 고해를 주었다. 우리는 12시간 동안 길을 걸어야 했으므로 11시 반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11)

 

원주 본당의 교세 통계표와 “뮈텔 주교 일기”를 토대로 볼 때, 곰실 공소는 1900년경에 설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곰실 공소는 춘천 지역 최초의 공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곰실 공소가 춘천 지역 최초의 공소였다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876-1877년 평신도 회장인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가 블랑(M. -J. -G.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를 모시고 강원도와 경기도 일부 지역의 공소를 순방하였는데, 그때 춘천의 두 공소를 방문한 바 있었다.12) 또한 프와넬(V. L.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가 작성한 강원도 지역의 1884-1885년도 교세 통계표를 보면 춘천에 각기리(객기리) · 새암밭 · 다라목이(다라메기) · 베들골 · 무리울(물이울) 등의 공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13) 그리고 곰실 공소가 설립된 1900년경에도 이미 ‘가래골’이라는 공소가 있었다.14) 요컨대, 곰실 공소 설립 이전에도 춘천 지역에는 공소가 존재했고, 곰실 공소가 춘천 지역 최초의 공소라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본당 승격

 

설립 직후의 곰실 공소는 신자가 17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소였다. 하지만 신자가 꾸준히 늘어 불과 10년만인 1910-1911년에는 102명에 이르렀다.15) 이처럼 교세가 늘어남에 따라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풍수원 본당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63-1943) 신부의 1913년 4월 4일자 서한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주교님

 

춘천 교우들이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신부를 갈망하였습니다. 금년에도 몇몇 회장들이 모여, 신부를 청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원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주교님께 이 편지를 올립니다. ‘곰실’이라는 공소 강당은 매우 아름답고 잘 지은 강당입니다. 교우수는 99명인데, 모두 농업에 종사합니다. 거의 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이나, 열심하고 독실한 신자들입니다. 곰실은 춘천읍에서 10리가량 떨어져 있고, 풍수원에서 퇴침리에서는 110리입니다. 근천에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이 있는데,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50리 안으로 공소 셋이 있는데, 홍천(洪川)군 면배(面背)와 안비(安備)와 장본(章本, 샘밧) 등입니다. 멀리 있는 공소들은 일곱이니, 즉 화천(華川)군에 있는 솟대박이, 만산리, 직골, 터앗재, 노장골이며, 양구(楊口)에 있는 방산(方山)과, 가평(加平)에 있는 개무덤이입니다. 이 모든 공소들이 100리 이내에 있습니다. 그런즉 주교님께서 가능한 한 저들의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정 신부16)

 

위 서한을 보면, 춘천 지역의 신자들이 1913년 이전부터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를 논의하기 위해 정규하 신부를 만났던 것으로 보이며,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신부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직접 서울에 올라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규하 신부도 신자들의 뜻에 공감하였다. 그는 곰실에 잘 지어진 강당이 있고, 독실한 신자들도 있다는 점, 춘천 지역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 춘천과 가까운 거리에 여러 공소들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본당 설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자들이 원했던 것과는 달리 본당의 설립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 이유를 추정해 보면, 우선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사제의 수가 부족하여 본당의 설립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부 선교사들이 소집령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함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종전될 때까지 사제 부족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인 신부가 충분히 배출되었다면 이러한 공백을 메울 수 있었겠지만, 1915-1919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는 5명에 불과하였다.17) 이처럼 사제의 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소집되지 않은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은 그들의 본당뿐만 아니라 귀국한 선교사들이 사목하던 본당의 관할 구역까지 나누어 맡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당 설립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본당의 구역 조정으로 인해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가 본당 설립을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첫 번째 이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14년 원주 본당의 조제(J. Jaugey, 楊秀春, 1884-1955) 신부가 소집령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그에 따라 용소막 본당의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1882-1970) · 마룡리 본당(현 용문 본당)의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1877-1927) ·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가 원주 본당의 관할 구역을 나누어 맡아야 했다. 그런데 구역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풍수원 본당의 관할 공소였던 곰실 · 장본 등이 거리가 가까운 마룡리 본당에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1919년 10월경에 조제 신부가 원주 본당에 복귀하여 구역이 원래대로 되돌아갈 때까지 곰실 공소는 손성재 신부의 사목 하에 있었다.18) 때문에 정규하 신부는 춘천 지역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알고 있었지만, 본당 설립을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미루어지던 본당의 설립이 실현된 것은 1920년 9월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9월 18일 종현 성당(현 명동 성당)에서 한국인 사제 5명이 탄생하였다.19) 그들 중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1892-1972) 신부는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임명됨과 동시에 새로 설립될 본당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20) 그가 부임함에 따라 1920년 9월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본당 설립 직후의 관할 구역은 춘천 · 홍천 · 화천 · 양구 · 인제와 경기도 가평이었고, 관할 공소는 14개였다. 신자는 본당이 138명이었고, 공소 신자를 포함하여 총 1,016명이었다.21) 신자들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임시 성당도 짓지 못했다. 대신 초가집 한 채를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22)

 

 

죽림동 본당의 토대를 세우다

 

김유룡 신부는 엄주언을 비롯한 신자들과 함께 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본당 승격 3년 만인 1923년 6월 홍천의 송정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황정수(黃貞秀, 요셉, 1890-1975) 신부가 부임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다.23) 그러나 곰실이 춘천읍내에서 떨어진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에 선교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 신부와 신자들은 춘천읍내로 본당을 이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본당의 이전은 1928년에 이루어졌는데, 신자 단체인 애련회(愛煉會)의 역할이 컸다. 애련회는 연령을 위한 단체로, 15세 이상의 신자가 가입하였다. 회원은 종신회원으로 1인당 50전씩을 거두었다. 회원들은 기금을 마련하여 농토를 구입하였고, 여기에서 수확한 쌀을 필요한 사람에게 장리로 주어 기금을 늘렸다. 그 밖에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등을 통해서도 기금을 마련하였다. 엄주언도 자신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새 성당 터를 사는데 보탰다. 이러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1928년 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 마당, 수녀원 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구식 목조 함석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함으로써 춘천의 전 지역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24)

 

1928년 본당이 읍내로 이전됨에 따라 곰실은 춘천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하지만 곰실 공소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갔는데, 당시의 교세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1931-1932년에 228명이었던 교세는 이후에도 점차 늘어 1936-1937년에는 283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춘천 본당보다도 많은 것이었다.25) 이러한 사실은 1930년대에도 곰실 공소의 선교 열기가 뜨거웠음을 말해준다.

 

 

공소 활성화를 위한 노력

 

곰실 공소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고된 시련을 겪었다. 교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공소 건물이 폭격을 받아 불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휴전 뒤, 신자들은 미군으로부터 목재의 지원을 받아 공소 건물을 재건하였다. 미국의 구호물자가 공소에 지급됨에 따라 이른바 ‘구호품 신자’가 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촌 지역의 특성상, 신자는 계속 줄어들어 한때 300명에 가까웠던 교세가 1969년에는 75명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1980년대에는 공소 건물 지붕이 낡고, 한쪽 담도 무너지는 등 보수 공사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26)

 

이처럼 침체를 겪고 있는 곰실 공소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공소 신자들은 대중교통 수단이 불편하여 부활절과 성탄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본당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효자동 본당27)의 오세철(吳世哲, 가브리엘) 신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매주 오전 7시 곰실 공소에 가서 직접 주일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와 동행한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 장영숙(마리안나)은 신자들에게 미사 전에 성가를 지도하였고, 미사가 끝나면 초 중등부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낙후된 공소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효자동 본당은 1991년 3월 장궤틀을 제작하였고, 1994년 11월에 축대 및 담장 시설과 진입로 포장 공사 등을 실시하였다.28)

 

춘천교구는 곰실 공소의 역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춘천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춘천 지역 선교의 초석이 되었던 평신도들을 기념하기 위해 엄주언의 본명 축일(성 마르티노 축일)인 11월 11일을 ‘평신도 추념의 날’로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 11일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교구장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 신자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념미사를 봉헌하고 뜻을 기렸다.29) 그리고 춘천교구는 2006년 9월 15일자로 곰실 공소를 죽림동 주교좌 본당과 춘천교구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살려 효자동 본당에서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관할로 영구히 옮겼다.30) 죽림동 주교좌 본당은 2009년 곰실 공소의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고, 11월 11일 현지에서 장익 주교의 주례로 중창(重創)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통해 곰실 공소 내부에 제대와 독경대, 성미술품 등을 새롭게 갖추게 되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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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지명 총람” 2(강원 편), 한글학회, 1967, 460쪽.

2) 엄주언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죽림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춘천 죽림동 교회, 1990, 55-58쪽을 참고하였다.

3) 엄주언의 딸 엄 루치아(위의 책).

4) 한국 성이 ‘목’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는 리굴로신부와 베르몽(J. M. Bermond, 陸世榮, 1905년 10월 입국) 신부뿐이다.

5) 이유림, ‘리굴로’, “한국가톨릭대사전” 4, 한국교회사연구소, 2296쪽.

6) “약현 본당의 공소와 교세 통계표(1891-1991)”,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59-63쪽.

7) 이유림, 앞의 글, 2296쪽.

8) 너브랭이(너브래)는 곰실 뒤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춘천시 동내면 주민센터 홈페이지 ‘춘천시 지명 유래’ 참고).

9) 원주 본당의 교세 통계표(1900-1901)(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0) 뮈텔 주교는 1900년 10월 9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1월 6일 풍수원에 도착할 때까지 원주 본당의 관할 20개 공소와 8개의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원주교구 원동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원동 백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교회, 1999, 68-69쪽).

11) “뮈텔 주교 일기” II(1896-190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489쪽.

12) 금경숙, ‘강원도 영서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수용에 관한 고찰 -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 “춘천교구 70년사”(춘천교구 설정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2009, 36-37쪽.

13) 강원도 지역의 교세 통계표(1884-1885)(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4) 원주 본당의 교세 통계표(1898-1899)(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5) 풍수원 본당의 교세 통계표(1910-1911)(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곰실 공소는 원주 본당의 관할이었으나 1903-1904년도 교세 통계표부터는 원주 본당이 아니라 풍수원 본당의 관할 공소로 나온다.

16) ‘정규하 신부의 서한(4)’, “교회와 역사” 229(1994. 6), 한국교회사연구소, 11-12쪽.

17)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1855-2005),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158-159쪽.

18) 원주교구 원동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9, 78-79쪽; ‘정규하 신부의 서한(4)’, 앞의 책, 12-13쪽; 마룡리 본당의 교세 통계표(1914-1919)(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9) “뮈텔 주교 일기” 6, 1920년 9월 18일,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382쪽.

20) ‘새 신부 차정’, “경향잡지” 454(1920. 9).

21) 춘천(곰실) 본당의 교세 통계표(1920-1921)(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유룡 신부의 1920년 10월 20일자 서한에서는 공소가 15개라고 하였다(“죽림동 본당 70년사”, 52-53쪽). 이 글에서는 공소 및 교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교세 통계표를 따랐다.

2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 편, ‘1922년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I, 명동 천주교회, 1987, 173쪽.

23) 홍연주, ‘홍천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2, 한국교회사연구소, 9753-9754쪽.

24) “죽림동 본당 70년사”, 53-62쪽; 오영환 · 박정자, ‘곰실(고은리) 공소’, “순교의 맥을 찾아서”, 가톨릭출판사, 2009, 80-81쪽.

25) 춘천 본당의 교세 통계표(1931-1937)(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936-1937년도 춘천 본당의 신자는 259명이었다.

26) ‘공소 탐방 - 춘천교구 효자 본당 곰실공소’, “생활성서” 34(1986. 6), 34-35쪽; “사도들의 모후”, 천주교 춘천교구 효자성당, 1999, 46쪽.

27) 1969년 11월 20일 효자 본당이 죽림동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면서 곰실 공소는 그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사도들의 모후”, 46쪽).

28) “사도들의 모후”, 91, 124쪽.

29) ‘춘천교구 평신도 추념의 날 제정’, ‘가톨릭신문’ 1998년 11월 22일자.

30) ‘춘천교구 본당 신설’,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24일자.

31) ‘춘천교구 곰실 · 신남공소 중창 축복’,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9일자.

 

[교회와 역사 431, 2011년 4월호, 양인성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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