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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교 영성 (1) 열정과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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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22 ㅣ No.1979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교 영성 (1) 열정과 노력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의 자세는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이다. 이러한 마음은 한계 상황의 어려움이나 난관을 극복하고 복음을 널리 전하도록 이끌어 준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 교회의 두 번째 사제로서 고국의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다음 중국에서 지내고 있을 때, 조선에 혹독한 박해가 지속되고 있었음에도 그는 조선 입국의 날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국에 복음을 전파하고픈 열망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도 조선을 가리켜 “우리의 포교지”라고 부르며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통해 복음 전파에 열성을 다한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한양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는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최양업 신부와 같은 시기에 조선 교회에서 활동하였던 메스트르 신부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최 신부 자신은 비록 이 나라의 기후와 음식에 익숙하지만, 그래도 일에 찍혀 눌려 있었다. 최 신부는 한 해의 대부분을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선교 활동에 있어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통해 큰 결실로 보답해 주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856년 9월 13일에 스승 신부에게 자신의 한 해 동안의 사목 활동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금년에는 하느님 자비의 허락하심으로 사목 순회를 별 탈 없이 꽤 평온하게 무사히 마쳤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주님의 고기잡이 그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무려 180명이 넘는 어른이 거룩한 샘터에서 몸을 씻고 그리스도의 양 무리에 스스로 들어섰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사제 생활 전부를 자신의 조국 조선의 복음화에 바쳤다.

 

참조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9.

여진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2006.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18.

 

[2021년 5월 23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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